장유유서,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

  • 489호
  • 기사입력 2022.04.06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2918

글 : 고재석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찬 물이라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차례를 지켜가며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예의범절을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신입생과 재학생이 처음 대면하는 학기 초가 되면, 통성명을 하고 난 뒤, 나이를 물어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신입생이 현역인지, 재수인지, 삼수인지 알아야 서열이 정리되어 선후배 관계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인관계에서 서열을 따지는 문화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른과 식사 할 때 식사를 마쳤더라도 어른이 식사중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연장자보다 잔을 낮게 부딪쳐야 한다는 등의 암묵적인 규범이 존재한다.


아마도 관계윤리를 지칭하는 ‘五倫’ 가운데 하나인 ‘長幼有序’가 우리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五倫’은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상호관계의 윤리덕목으로, 수천 년간 동아시아 사회문화의 토대로 작용해 왔다. 성인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육체적인 욕망추구에 충실한 금수와 다를 바 없다고 보고, 학교를 만들어 인륜을 가르쳤다고 한다.  ‘長幼有序’는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관계 윤리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성리학의 영향인지, 아니면 시대상황에 따라 형성된 문화의 영향인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대든다거나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맞서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어른에게 난데없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들어도 불편을 감수하고 순응하곤 한다. 최근에는 전통사회의 관계윤리에 대한 인식이 많이 옅어졌다. 장유유서를 말하는 순간 꼰대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장유유서는 가족단위로 살던 씨족사회에서나 봉건적인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윤리덕목이지,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인식한다.


고전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가치 있는 지혜의 보고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전개 속에서 왜곡되거나 변용된 점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원문의 맥락적 이해를 통해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논어』와 『맹자』 같은 동양고전에는 나이 많은 어른에 대한 공경의 사례가 자주 눈에 띤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자리를 떠야 비로소 나가셨다.”

[『論語』「鄕黨」: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천천히 걸으면서 어른을 뒤따르는 것을 공손이라고 하고, 빨리 걸어 어른 보다 앞서는 것을 불손이라고 한다.”

[『孟子』「告子(下)」: 徐行後長者, 謂之弟. 疾行先長者, 謂之不弟.]


자리에 앉을 때건, 식사를 할 때건, 밖으로 나갈 때건, 어른 보다 먼저 하지 않고 어른을 뒤따랐다는 것은, 웃어른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뒤따른다는 ‘수행(隨行)’은 어른보다 한 발짝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걷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른 보다 뒤에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행동이다. 양심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길에서 물건을 지고 가면 물건을 나눠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주역』에서는 “무릇 대인은 四時와 그 차례를 함께 한다”[夫大人者, 與四時合其序.]고 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 변화는 어김없이 순서대로 다가온다. 봄은 만물의 싹을 틔우고, 여름은 성장시키며, 가을은 결실을 맺게 하고, 겨울은 수렴하게 한다. 봄이 끝났는데 여름 없이 가을로 접어들면 엽등이다. 여름 이후 가을이 오지 않고 다시 봄으로 돌아가면 역행이다. 엽등과 역행처럼 차례가 어긋나면, 천지만물은 존재할 수 없다. 훌륭한 인격을 지닌 대인은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런 사계절의 운행처럼 ‘차례[序]’에 맞게 선후를 구분하며 대처한다.


사계절의 변화 속에 드러난 ‘차례[序]’의 본질은 ‘살림’이다. 만물을 살리는 이치가 자연변화의 순서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어른을 먼저 하게 하는 것도 상대방을 살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살림’의 실현은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공경하는 ‘幼敬長’의 한 방향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른이 어린 사람을 사랑하는 ‘長慈幼’ 의 방향 역시 포함하고 있다. 어른이 어린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원리 역시 ‘차례’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차례’의 기준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살리는 마음을 표현할 때 익숙한 방식이나 고정된 잣대를 고집하면 잘못이다. 양심에 따라 상황에 맞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어른이 어린 사람을 사랑하고, 어린 사람이 어른을 공경하는 살림의 마음은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식사를 할 때 어린 아이 먼저 하게 할 수도 있고, 인사를 할 때 어른이 먼저 하는 경우도 있으며, 길을 걸을 때 어른이 뒤에 서서 걸을 수도 있다. 서로 살리는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장유유서’의 본질적 의미다.


오늘 하루, 후배들을 만났거나 나이 어린 사람과 대면했을 때, 선후의 ‘차례’를 구분하며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따졌다면, ‘장유유서’의 본의를 다시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첫째, 먼저 하고 뒤에 하는 차례의 구분은 아랫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후배와 어린 사람에게만 공경을 강요하며 ‘장유유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전에서 근거를 찾아 합리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유유서는 웃어른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慈],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공경하는[敬] 상호적인 관계윤리 덕목이다.


둘째,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익숙한 관습이나 암묵적인 기준을 무조건 따르고 강요하면 장유유서가 아니다. 사랑과 공경의 기준은 고정될 수 없다. 서로를 아껴주는 선한 마음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차례의 본의이다.


세상 경험이 풍부하고 삶 속에서 축적된 지혜가 높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 사람을 바르게 성장하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유유서’의 실현은 차갑게 식어버린 사회에 따뜻함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관계윤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