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의미

  • 495호
  • 기사입력 2022.07.20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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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재석 유학대학·학부대학 교수


# 공부에 빠진 공자 후예


논어』를 보면 공자는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에 대해 강조하였고, 스스로 ‘배우되 싫증내지 않았다’[學而不厭]고 하였다. 어떻게 공부가 좋고 싫증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공자의 후예답게 동아시아에는 공부 관련 고사가 많다. ‘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말이 있다. ‘현량懸梁’과 ‘자고刺股’가 합쳐진 성어인데, ‘현량’은 한漢나라 손경孫敬의 고사에서 유래하였고, ‘자고’는 전국시대 소진蘇秦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손경의 자는 문보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쉬지를 않았다. 잠이 오고 피곤하면, 끈으로 머리를 묶어 집안 들보에 매달았다.

      孫敬字文寶. 好學, 晨夕不休. 及至眠睡疲寝, 以繩繫頭, 懸屋梁. - 漢書


     소진은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렀는데 피가 발까지 흘렀다.

       讀書欲睡, 引錐自刺其股, 血流至足. - 戰國策


피곤하면 눕고 싶고 잠을 자야 몸이 견딜 수 있을 텐데, 자는 시간도 아까워 잠을 이겨내며 시간을 절약해 공부한 손경과 소진의 고사는,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들게 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도 유명하다. 형화螢火와 영설映雪이 합쳐진 성어이다. 형螢은 ‘형화螢火’의 준말로, 개똥벌레의 불빛으로 공부하였다는 차윤車胤의 고사에서 유래하였고, 설雪은 ‘영설映雪’의 뜻으로, 눈빛에 비추어 공부하였다는 손강孫康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차윤은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배우고 다방면에 통했는데,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을 수 없자 여름철에 명주 주머니에 수십 마리의 개똥벌레를 넣어 책에 비춰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胤恭勤不倦, 博學多通,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以照書, 以夜繼日焉. - 晉書

손강은 집안이 빈한하여 항상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
孫康家貧, 常映雪讀書. - 初學記


환경 탓에 공부 못한다는 말이 변명처럼 들릴 정도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며 공부에 매진한 차윤과 손강의 고사는 여전히 영향력을 주고 있다. 후학들은 기꺼이 서재의 창과 책상을 형창螢窓 · 설안雪案으로 명명하고 공부에 매진하곤 한다. 우리나라에도 공부벌레라 칭할 수 있는 선현들이 있었다. 김득신金得臣은『 백이전』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 『격물보망장』은 2만 번을 읽었다. ……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讀數記』에는 싣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억億은 오늘날의 10만이므로, 백이전을 11만 3천 번 읽었다는 것이다. 공부에 미치지 않고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하는 생각도 든다. 실로 공자 후예들은 공부에 빠져 공부의, 공부에,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흔들리는 배움의 전당

그래서인지, 공부해야 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빠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옆 눈 가린 경주마처럼 입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밤마다 대형입시학원의 좁은 입구는 야구경기가 끝난 후 통로를 비집고 빠져나오는 관중처럼 학생들로 붐빈다.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품에 물건 값을 붙이듯 사람에게 이름값 붙이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학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공부 열풍은 스펙 쌓기 노력으로 지속되고, 취업 후에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계속된다. 수단으로 전락된 공부 때문이지, 최근 배움의 전당이 흔들리고 있다. 몇 해 전 한 학생이 ‘자발적 자퇴’를 선언하였다. 꿈을 품고 진학한 대학이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해 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김예슬 지음,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가 찻잔과 같은 전문적 바보를 양산해왔다고 진단한다.


일본의 대학생은 교실 좌석에 배열되어 있는 ‘찻잔’같은 존재이다. 교사는 ‘주전자’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지식을 ‘찻잔’에 따르는데, 그 찻잔의 용량 따위는 완전히 무시된다.(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진리에 대한 열정과 도덕적 책임은 책속에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곳곳에서 대학에 대한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일본 대학의 지적 망국론을 지적한 책은 우리에게 배움은 무엇이고,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의 과제를 남겼다.

# 공부,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공부工夫’의 ‘工’은 땅을 다질 때 쓰던 돌 절굿공이를 형상하고 있다. 절굿공이로 땅을 다지듯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습’도 논어』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學而時習’ 갑골문에서 ‘학’은 집 안에서 아이들(子)이 두 손으로 새끼 매듭 짓는 법을 모방하는 것을 형상하고 있다.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의지를 발현하여 선현들의 축적된 지혜를 배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배움 [학學]’은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익힘[習]’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논어』는 공부를 배움과 익힘을 합친 ‘학습’으로 규정한다.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배움을 대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옛날 배우는 자들은 자기를 위해 공부하였는데, 지금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 『論語』 「憲問」


‘위인爲人’은 남의 시선이나 외부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는 대가를 바라기 때문에 과정은 참고 견뎌야 한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추는 공부는 수단화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기준이 바뀔 경우 피로감을 느끼거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위기爲己’는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하는 공부를 의미한다. 겉만 꾸미고, 바깥을 쫓으며, 명성이나 구하고, 명예나 취하려는 공부는 군자가 추구할 공부가 아니다.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천하는 공부가 자기를 완성하는 위기지학인 것이다.


퇴계는 군자가 힘써야 할 공부가 위기지학임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를 위할 뿐이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 인위적으로 함이 없음에도 그러한 것이다. 예컨대 깊은 산 무성한 숲에 있는 난초는 

     종일토록 향기를 피우지만 자신이 향기를 발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난초의 이러한 삶은 군자가 힘쓰는 위기지학의 뜻과 똑같다.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己者, …… 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 - 

   『退溪集』 「言行錄」

깊은 산 무성한 숲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남에게 향기를 자랑하기 위해 꽃 피우지 않듯이, ‘천성天性’ 그대로 꽃을 피우고 향내를 풍기는 자기 함양의 노력을 해야 한다.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묵묵히 자기 모습을 꽃피워야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오는 직관에 귀 기울이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위기지학의 공부는 ‘즐거움’을 덤으로 준다. 『논어』는 ‘학습’의 결과를 기쁨이라고 말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論語』 「學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는 기쁨을 주지 못한다. 참고 견뎌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을 통해 나다움을 완성하면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공부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참 나와 마주하여 나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게다가 ‘학습’의 결과는 기쁨의 확장이기도 하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 「論語』 「學而」


상대방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껴주며 관심 가져주는 친구는 그가 힘이 세거나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이익 될 만한 것이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자기답게 살면서 바른 행동을 하기에 만나고 싶어 저절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나면 즐겁고 뜻을 같이 하니 기쁘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지금 하는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인지 나를 위한 공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공부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도 의미 있다. 즐거움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