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한 잔의 인생이다
동양문인 : 무엇 때문에 차를 마셨는가?

  • 505호
  • 기사입력 2022.12.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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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동서양 문화에서 차의 위상


동양과 서양 모두 마신 차 종류는 달랐지만 차에 대한 의미 부여는 유사한 점이 있다. 동양문인들이 왜 차를 마셨고 차 한잔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를 보자.


린위탕(林語堂), 『생활의 발견』[중국문인 문화에서의 茶와 酒] : 차는 은자(隱者)에, 술은 기사(騎士)에 비할 수 있다. 술은 좋은 친구를, 차는 조용한 유덕자(有德者)를 위하여 있다.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茶書(The Book of Tea)』 : 차는 삶의 길을 알려주는 종교다.

일본 속담 : 인간이 차를 마시지 않으면 진실과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서양은 동양문인들이 마신 녹차보다는 홍차를 주로 마셨지만 동양과 마찬가지로 차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한다.


앨리스 워커(Alice Malsenior Walke) : 차는 액체로 된 지혜다

프랑스 속담 : 차는 한 잔의 인생이다.


날마다 먹는 ‘차 한잔에 무슨 이같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줄 모르나 동서양에서는 모두 차 한 잔에 이같은 대단한 효용성이 있다고 여겼다. 특히 린위탕(林語堂)이 ‘유덕자’를 차에 비유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가 어떤 효용성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2. 양생론과 인간관계 차원에서의 차


차를 마실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졸음을 쫓기 위해서 마시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런 점은 불가 스님들이 수행하는 가운데 밤에 졸음을 쫓기 위해 차를 마신 일이 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차가 갖는 효용성을 논한 것을 알 수 있다. 당대(唐代) 제상이었던 유정량(劉貞亮)이 말했다는 ‘차를 마시면 좋은 열가지 효용성[음다십덕(飲茶十德)]’에서는 차가 양생, 의료, 건강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유가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차로써 졸음을 쫓는다[以茶驅睡氣], 차로써 쌓인 울적한 기분을 푼다[以茶散鬱氣], 차로써 생기를 기른다[以茶養生氣], 차로써 병기를 제거한다[以茶除病氣], 차로써 맛있는 맛을 본다[以茶嘗滋味], 차로써 신체를 건강하게 한다[以茶養身體]를 말한다. 이것은 양생, 의료, 건강 측면을 말한 것에 해당한다. 아울러 차로써 인륜의 도를 행한다[以茶可行道], 차로써 뜻을 우아하게 펼칠 수 있다[以茶可雅志], 차로써 예법을 준수하고 인자함을 실천하는데 이롭다[以茶利禮仁], 차로써 상대방을 공경하는 뜻을 표현할 수 있다[以茶表敬意]라는 것을 말한다. 이같이 차를 마시는 정황을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 상대방에 대한 존중 더 나아가 인륜의 도를 실행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차 한잔이 갖는 인륜적 차원, 사회적 차원을 말한 것에 해당한다.

이상 말한 차에 관한 덕은 중국문화에서 차문화의 대략적인 것에 속한다. 일본의 묘우에쇼닌[明惠上人] 스님도 차의 십덕(十德)을 말하는데, 유정량과 비교했을 때 특이한 점이 있다.


건강, 양생 측면에서 말한 것을 보자. ‘수면을 스스로 제거하고[睡眠自除]’, ‘번뇌를 소멸하거나 감소하고[煩惱消減]’, ‘오장이 조화를 이루고[五臟調和]’, ‘부모를 효양하고[父母孝養], 붕우와 화합하고[朋友和合],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는[正心修身] 것 등은 유정량이 말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병이 없고 재화를 그치게 하는 것[無病息災]를 비롯하여 종교 차원에서 ‘여러 하늘의 가호를 받는 것[諸天加護]’, ‘악마를 항복시키는 것[惡魔降伏]’, ‘조용하게 임종하는 것[臨終不亂]’ 등을 말한 것은 독특한 점이 있다. 차 한잔에 이런 효용성이 있다는 것은 한중의 차문화에 다른 일본 차문화의 특성에 속하는데, 다선일미(茶禪一味)가 상징하는 일본에서의 차문화가 주로 스님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 이런 차인식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한다.


중국문화에 나타난 차문화를 보면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차를 대접받았고, 또 어떤 종류의 차 선물을 받았는지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가름하기도 하였다. 차가 이처럼 양생, 건강 및 사회적 관계에서 바람직한 인간 태도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된 것은 동양문화에서의 차가 갖는 독특한 위상에 해당한다.


▲ 金正喜, 〈茗禪〉, 간송미술관.

‘명선(茗禪)’은 흔히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고 푸는데, 추사는 이 〈명선〉을 쓴 동기에 대해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부쳐왔는데, 몽정(蒙頂)과 노아(露芽)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보답하고자 이 글을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를 빌려 쓰노라. 병중의 거사가 예서로 쓰다.”라고 밝히고 있다. 차를 통한 김정희와 초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3. 유가 철학을 통한 차에 관한 인식


차의 성질은 기본적으로 (기가) 맑은 것[淸]이다. 차의 본질을 청으로 규정한 문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유가철학 사유를 동원해 차를 규정한다.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던 초의(艸衣[意恂]) 선사는 「봉화산천도인사다지작(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에서 “고래 성현은 모두 차를 아꼈다. 다는 군자와 같으니 본성은 삿됨이 없음이라[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하여 ‘삿됨이 없음[無邪]’을 차의 본질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 발언은 공자가 “『시경』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무사(思無邪)[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진원보(陳元輔)는 『침산류다략(枕山樓茶略)』의 「차가 어떤 성품을 부여받았는가[稟性]」라는 것을 논한 글에서 유학의 인간 본성과 관련된 성선론을 차용해 차의 성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차에 본성이 있는 것은 인간에 본성이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선한데, 비유하면, 풍취가 있는 우아한 선비가 묘리를 맑게 말하여 스스로 강포(强暴)한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임협이 기를 부려 오로지 공격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인간 본성의 선함을 차의 본성과 같다는 것은 차 자체가 인간 기질의 탁한 기질을 청한 기질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잔의 차와 성선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차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맑은 것[淸]’으로서, 이같은 차의 청을 인간의 기질과 관련하여 이해하면, 인간 기질의 청탁(淸濁)을 구분할 때의 청과 동일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기질의 청의 속성은 선과 관련이 있고, 탁의 속성은 악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점에서 청의 속성을 지닌 차를 많이 마시면 인간 기질의 탁한 것 혹은 강포한 기운 같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차인식은 오늘날 인성교육 측면에서 차를 논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


우리는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한 잔의 차를 마신다. 하지만 차가 갖는 무사(無邪) 및 청의 속성을 통한 차인식에 담긴 수양론적 의미를 되새긴다면 차를 한잔 마신다는 것에는 매우 다양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4. 언제 차를 마시는 것이 좋은가


이상과 같이 양생, 건강, 사회관계 맥락, 철학적 측면에서의 차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보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차를 언제, 어떤 정황에서 마시는 것이 좋은 가를 따지게 된다. 풍가빈(馮可賓)은 『개다전(蚧茶箋)』의 「차마시기 좋은 정황[茶宜]」에서 차를 마시기 좋은 정황에 대해 말한다.

속된 것이 몸을 얽매이지 않을 때[無事], 뜻이 같은 좋은 손님과 함께할 때[佳客], 조용한 환경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때[幽坐], 흥취가 일어나 기분이 좋을 때[吟詠], 차를 통해 시상을 일으키고자 할 때[吟詩], 붓을 잡고 먹을 적셔 종이에 서화를 창작할 때[擇翰], 할 일 없이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徜徉]


이상 차 마시기에 적당한 것을 거론한 것을 보면 일상에서의 바쁜 삶과 관련된 정황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차를 마시는 것과 관련하여 까다롭게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음다 그 자체는 문인들이 지향하는 아취(雅趣) 문화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본 바를 보면, 동양문인들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들이 지향한 우아한 삶과 철학을 반영하는 ‘인문 음료’, ‘문화 음료’이면서 ‘철학적 음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