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은?

  • 506호
  • 기사입력 2022.12.30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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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를 보면 많은 영웅호걸이 나타난다. ‘난세에 영웅’이란 말이 있듯이 영웅은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나타나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호걸은 많이 거론된다. ‘호(豪)’ 자하면 흔히 호방(豪放)하고 자잘한 시비거리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적인 명예나 부귀 등에 연연해하지 않는 활달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성품을 지닌 인물을 떠올린다. 아울러 ‘호’ 자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돌(猪突)적인 성격의 ‘돼지 시(豕)’가 의미요소로 쓰인 것을 보면 강한 행동력을 지닌 소유자로 여겨진다.


이밖에 ‘호’자가 ‘터럭 호(毫)’ 자와 때론 동일시되는 경우에서 보듯 호걸하면 외형적으로는 수염이 긴 인물을 연상시킨다. 음양 차원에서 보면, 이렇게 수염이 긴 호걸은 강한 양기를 소유한 강의(剛毅)한 인물 혹은 의협심이 강한 인물 등을 연상시킨다. 정약용(丁若鏞)이 「조태서묘표(曹台瑞墓表)」에서 조태서를 호걸지사(豪傑之士)로 규정하면서, “해학을 좋아하고 겉치레를 꾸미지 않아 술이 취한 뒤에는 머리털을 쑥대처럼 헝클어뜨린 채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손바닥을 쳤으며, 하는 말은 모두 풍류스러운 것이었다” 라고 한 발언에 나타난 형상은 흔히 말하는 호걸지사의 면모와 가깝다.


‘호’자는 ‘걸’자와 결합되어 호걸이란 용어로 자주 사용되는데, 호걸이란 용어 뒤에 ‘사(士)’자가 붙으면 호탕함을 기준으로 한 호걸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의미로 이해된다.


2. ‘호걸’ 용어를 통해 본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


흔히 동양철학사에서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을 거론할 때 공자가 인(仁)을 강조한 것에 비해 맹자는 인 이외에 의(義)를 강조했다는 것을 거론한다. 『맹자』 「양혜왕장」(상) 1장에 나오는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갔을 때 양혜왕이 “어르신께서 천리가 멀다하지 않고 나를 찾아주신 것은 우리나라에 무슨 이로운 것에 대해 말해주고자 한 것인가”라는 부국강병과 관련된 질문에 맹자는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공자가 의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맹자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의를 강조한 것에 공자와 맹자의 차별성을 부여하곤 한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을 각각 제시한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다면 무엇을 거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자. 이런 질문과 관련해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자는 성인(聖人), 인자(仁者), 군자(君子) 등을 말함에 비해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양강(陽剛) 차원에서 대장부(大丈夫)를 비롯하여 호걸지사를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 맹자는 부귀, 빈천, 위의(威儀)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굴하지 않는 대장부를 말하는데, 이런 성향의 대장부를 ‘사(士)’에 적용하면 맹자가 말하는 호걸지사라고 본다. 예를 들면 정호(程顥)가 「추일우성(秋日偶成)」에서 “부귀에 빠지지 않고 빈천을 즐기니, 남아로서 이에 이르면 바로 영웅호걸이 아니겠는가?”라고 읊은 것은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맹자가 양강(陽剛)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호걸지사를 언급한 것은 맹자가 살던 시대는 공자가 살던 시대와 다르다는 것과 이에 맹자는 호걸지사를 통해 자신이 처한 시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상을 제시한 것을 의미한다.


맹자는 호걸지사의 예로 두가지 들고 있다. 하나는 초나라 태생인 진량(陳良)이 주공과 중니(仲尼[=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공부한 결과 북방의 학자들 가운데 진량보다 앞선 자가 없었다는 점을 들면서 진량을 호걸스런 선비라고 규정한다. 이같은 학문 습득과 관련한 호걸관에는 문화적으로 열등한 초나라로 상징되는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유학[주공과 공자]중심주의’가 담겨 있다. 이 문장과 관련해 주희는 호걸은 재주와 덕이 출중한 것을 일컬은 것이라 주석한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말한 “주나라 문왕을 기다린 후 일어서는 이는 평범한 사람이다. 호걸지사라 불리는 이들은 주나라 문왕(文王)이 아니 계셔도 홀로 일어선다”라는 차원의 호걸지사다. 문왕은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 임금의 폭정에 저항하면서 이후 주(周)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서, 요·순·우·탕 이후의 유가 성인의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다. 호걸지사란 불의한 세상이 닥치면 문왕이 없더라도 과감하게 봉기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고조[=劉邦]가 말한 유후(留侯)인 장량(張良) 같은 인물이 바로 그 예다. 소식(蘇軾)은 실제 「유후전(留侯傳)」을 지어 장량을 호걸지사로 규정한다. 주희는 이곳의 호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재주와 지혜가 넘치는 인물이라고 주석한다.


장량에 대한 찬 : “大哉留侯, 師範高皇, 功成智隱, 神機鬼藏.” 장량은 중국역사에서 진시황 암살 시도(BC 219년경)로 유명하다. 진시황의 순행 경로인 박랑사(博浪沙) 숲에서 철추를 든 역사(力士)와 매복하였다가 똑같이 생긴 3개의 마차 가운데 중간의 마차를 겨냥하여 철추를 던졌지만 진시황은 마지막 마차에 있어 살아남았던 역사가 있다.



이상 본 호걸지사와 관련된 주희의 주석을 보면 재주는 공통적으로 해당하고 아울러 덕과 지혜를 갖춘 인물이 호걸지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희의 해석처럼 재주와 지혜가 넘친다고만 해석하면 호걸이 갖는 강의한 실행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맹자가 여기서 말한 호걸지사는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면서 정의를 위해 발분하는 강한 실천력을 지닌 호걸풍 인간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공자는 호걸지사를 말하지 않지만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지사(志士)를 말한다. 그런데 이같은 지사는 공자가 ‘왕은 덕이 있어야 한다[王者有德說]’라는 것과 정명론(正名論) 차원에서의 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해 맹자는 ‘덕이 있는 자가 왕이 된다[有德者作王說]’라는 것을 말하면서 역성혁명을 말하는데, 이같은 역성혁명을 강조하는 차원에 어울리는 사는  ‘문왕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호걸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자와 맹자 모두 ‘사’를 말하더라도 차이가 난다고 본다.


3. 중국역사에 나타난 호걸지사


맹자에 의해 제시된 호걸지사는 이후 한중 역사를 통관할 때 어떤 입장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서는 지혜(智慧)가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은 영(英), 천인 중에 뛰어난 사람은 준(俊), 백인 중에 뛰어난 사람은 호(豪), 십인 중에 뛰어난 사람을 걸(傑)이라고 구분한다. ‘호’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행위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지력(知力)은 혐의를 푸는 데 충분하며, 청렴함은 재화를 능히 분배할 수가 있고, 신의(信義)는 약속한 것을 지킬 수가 있으며,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말을 하면 곧 도(道)가 되는 자가, 곧 사람의 호(豪)다”라고 규정하여 ‘호’ 자가 갖는 의미를 보다 자세히 규명하고 있다.


이후 송대 소식은 유방의 책사인 장량은 논한 「유후론(留侯論)」에서 호걸지사에 대해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해를 당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포부가 심히 크고 그의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장량이 행한 용기와 관련된 소식의 이상과 같은 호걸관은 맹자의 호걸지사의 대략적인 점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후 중국 역사에는 호걸풍과 관련해 다양한 인물들이 호걸지사로 거론된다. 문호(文豪)라는 말이 있듯이 문학 차원에서는 당대 한유(韓愈)가 문학 차원의 호걸에 해당한다.



중국문예사에서 문호(文豪)로 인정받는 한유(韓愈, 768~824년. 호는 退之)는 당대 중기를 대표한 문인, 사상가, 사대부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명이다. 잡문으로서 『進學解』, 『雜說』, 『獲麟解』, 『師說』 등이 유명하고, 서문으로는 『送李願歸盤曲序』, 『送孟東野序』 등이 유명하다.


한유는 백이(伯夷)의 특립독행(特立獨行)한 행위를 찬송한 「백이송(伯夷頌)」에서 백이를 호걸지사로 규정한다.


선비로서 빼어난 뜻을 지니고 탁월한 행동을 하는데 오직 의로움에 맞게 하면서 사람들의 시비는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모두 호걸스런 선비니, 도를 믿음이 독실하여 스스로 지혜가 밝은 사람이다.


호걸의 기준으로  의, 시비를 따지지 않는 것, 도에 대한 믿음이 독실한 것, 지혜가 밝은 것을 드는데, 이런 조건에 맞는 인물들이 역사에 나타난다. 주희는 소식의 기운과 재주가 호걸스런 점이 있다고 평가한다. 북송대 유학자로서는 소옹(邵雍)을 호걸지사로 본다. 이밖에 사공도(司空圖)는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에서 ‘의기(義氣)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다는 차원의 「호방(豪放)」을 설정해 시의 품격에서의 호방함을 논하기도 한다.


4. 나오는 말


이처럼 ‘호’ 자와 연계된 다양한 사유를 볼 수 있는데, 이같은 중국철학과 문예사에 나타난 호걸지사에 관한 사유는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이해된다. 이에 ‘퇴계 이황은 호걸지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후 조선조 유학자들의 호걸지사에 관한 견해를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