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절(固窮節)과 추사의 〈세한도〉

  • 509호
  • 기사입력 2023.02.16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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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공자는 군자(君子)에 대해 『논어』 「학이(學而)」 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말을 시작으로 하여 다양한 측면의 군자상을 말한다.


유가(儒家)가 지향하는 실현 가능한 인간상을 대표하는 것은 군자다. 유가는 기질론 차원에서 성인(聖人)은 태어날 때부터 ‘맑은 기운[淸氣]’을 100% 품부(稟賦) 받아 태어났지만 나머지 인간들은 탁기(濁氣)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현인(賢人), 사인(士人) 등으로 구분한다. 주렴계(周濂溪[=周敦頤])는 『통서(通書)』「지학(志学)」에서 ‘선비는 현인되는 것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되는 것을 바라고, 성인은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바란다[士希賢, 賢希聖, 聖希天]’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성리학에서는 수양을 기본으로 한 후천적인 학문을 통해 성인되는 가능성[이른바 성인가학론(聖人可學論)]을 말하면서 ‘안으로 수양을 통해 성인되는 학문[內聖學]’을 강조하는데,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성인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를 습득하면 군자가 될 수 있고, 실제 공자 3,000 제자 중에 육예를 습득한 인물이 72인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군자는 얼마든지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한 인간상에 속한다.


이런 군자상 가운데 예술 차원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유는 ‘군자도 진실로 궁한 정황에 처한다[君子固窮]’는 말이다. ‘군자 고궁’ 사유를 자신의 처지에 가장 적의하게 적용한 인물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도연명(陶淵明)으로서, 군자는 ‘진실로 궁한 정황에서 절개를 지킨다[固窮節]’라는 것이다. 동양 문인화가들이 그린 회화 작품을 보면 이같은 고궁절을 상징하는 다양한 예술적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회화 작품을 대표하는 〈세한도(歲寒圖)〉의 소나무 형상은 그 하나의 예다.


2. 고궁절(固窮節)과 군자 이미지


‘궁’과 ‘절’을 실제 군자의 삶에 적용하면, ‘궁’은 세상살이를 하면서 풍상을 겪는 시련이란 의미가 있고, ‘절’은 군자는 그같은 시련에 처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관과 지조 및 절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고궁의 정황은 실제 삶에서는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유배를 가거나 혹은 신체적으로 훼손을 당하는 것과 같은 정황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진정한 군자는 이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세계관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정황을 만약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형상으로 표현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즉 회화 형상에 나타난 시련의 형상과 이미지에 대해 알아보자.


이른바 문인화에서 군자의 삶을 의미하는 소재는 자연에 존재하는 식물 등을 인간의 덕에 비유하는 이른바 비덕(比德) 차원에서 말해지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를 비롯하여 소나무, 잣나무 등과 같은 식물, 그리고 큰 바위 등이다. 이런 비덕 차원의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면, 그려진 사물을 단순 자연 사물로 보지 말고 군자가 처한 다양한 현실, 특히 시련을 겪은 시절과 연계한 형상으로 보면 된다. 즉 이런 식물이나 바위 등은 단순히 자연에 존재하는 식물이나 바위가 아니라 군자가 살아온 역정과 그 삶의 역정 속에 깃든 고통과 시련을 상징하곤 한다. 따라서 문인화 작품 속에 표현된 식물이나 바위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군자로 상징되는 한 인물의 삶의 역정과 고통 및 그 고통을 극복한 몸의 상태 및 정신세계를 대입하면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5만원 지폐에는 탄은(灘隱) 이정((李霆, 1541~1626)의 〈풍죽도(風竹圖)〉와 어몽룡(魚夢龍, 1566~?)의 〈월매도(月梅圖)〉가 중첩되게 도안되어 있는데, 특히 패이고 꺾인 상태에서도 잔가지를 위로 쭉 뻗어간 〈월매도〉의 형상에는 군자가 겪었던 오랜 세월의 고통과 시련을 표현함과 더불어 그 고통과 시련 속에서의 새로운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동양화에서 시련을 상징하는 형상을 사군자로 일컬어지는 식물에 비유한 것을 보자. 흔히 거센 풍상(風霜)을 겪었다고 말하는데, 이른바 ‘거센 북서풍의 바람과 가을에 내리는 차가운 서리’는 군자가 겪는 시련과 고통을 대표한다. 이같은 풍상을 겪은 식물들의 형상은 대부분 중간 부분이 꺾이거나 잘린 형상, 나무 속이 심하게 패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것같은 형상 등으로 나타난다. 가지가 부러지거나 속이 패인 경우를 인간의 삶에 적용하면 그만큼 신체적으로 시련과 고통을 당했거나 혹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죽(風竹) 형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오른쪽을 향해 휜 형상 - 가을과 겨울 바람은 북서풍이기 때문에 휜 형상은 오른쪽을 향해 휘게 된다-을 비롯하여 위로 자라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아래로 굽혀진 형상도 마찬가지다. 바위의 경우는 심하게 패이거나 구멍이 뚫린 형상으로 나타난다. 구멍이 숭숭 뚫린 태호석(太湖石)은 이런 형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런 형상이 상징하는 시련과 고통 이외에 동시에 새싹이나 새가지가 돋는 형상 등과 같은 또 다른 장치를 통해 그런 고통스런 정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대치를 놓지 않는 형상이 동시에 그려지게 된다. 이런 형상에는 예를 들면 정치적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해 유배를 간 경우라도 상황에 따라 해배(解配)되거나 혹은 복관(復官)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런 기대치마저 없는 가장 힘든 상황은, 나라가 망해 생존의 근거가 되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뿌리가 드러난 난[露根蘭]’의 형상 혹은 뿌리를 내릴 땅이 없는 형상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은 이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정황에 처한 식물인 경우 대부분 굵기도 상당한 굵기를 가진 형상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 굵기는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대부분 장년 이후 노년의 삶을 상징한다. 그 형상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살아온 인생역정에서의 일종의 노경의 삶이 깃들어 있다.


이상과 같은 예비 지식을 가지고 추사의 회화 작품을 대표하는 〈세한도(歲寒圖)〉를 감상해보자.



▲ 민영익(閔泳翊), <노근묵란露根墨蘭>, 128.5x58.4cm, 삼성리움미술관.




▲ 정사초(鄭思肖), 〈묵란도〉

몽골이 중국을 지배했던 시절의 애국지사였던 정사초(鄭思肖)는 몽골에 대한 저항 의식을 난의 뿌리를 감싸고 있어야 할 흙을 그림에서 아예 제거함으로써 몽골이 강탈한 땅에 뿌리내림을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向來俯首問羲王, 汝是何人到此鄕, 未有畵前開鼻孔, 滿天浮動古馨香.”이란 화제(畵題)도 이같은 저항의식을 잘 보여준다. 어떤 이가 난초를 그릴 때 흙을 그리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오랑캐들이 우리 땅을 다 빼앗아가 버렸는데, 어디 흙 한 점 있겠소?”라는 대답으로 망국의 아픔을 나타내기도 했다.


3. 제주도 귀양살이와 추사 모습


〈세한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전에 헌종과 허유의 문답을 통해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정황을 보자.


헌종 : 김정희의 귀양살이는 어떠하던가?

허유 : 그것은 소인이 목격했으니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圍籬] 안의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북쪽 창문을 향해 꿇어앉아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좌장(坐杖)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마음 놓고 편히 자지도 못하며 밤에도 늘 등잔불을 끄지 않고 있습니다.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헌종 :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던가?

허유 : 마을 아이들 서넛이 와서 배우므로 글씨도 가르쳐 줍니다. 만일 이런 것도 없으면 너무 적막하여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상은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걷던 추사가 54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 서남쪽 80여 리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園羅安置) 당하고 있을 때의 정황에 대해 헌종과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9-1892. 초명은 許鍊)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제주도에서의 오랜 유배 생활은 추사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망가뜨리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평생의 친구였던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기력은 점차 쇠진하고 살이 너무 빠져 이제는 능히 앉을 수조차 없다”고 썼다. 아울러 사촌 형 김교희(金敎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세월이 빨라서 어느덧 겨울이 되니 몰골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탄 재와 같은데 앉아서 이런 허송 세월을 보내야만 할 뿐인가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이 같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유수 같이 흘러가 어느덧 추사가 귀양 간 지 4년 정도 지났을 때[1844년]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의 제자 우선(蕅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1843년에는 북경에서 구한 계복(桂馥, 1737∼1805)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 1757~1817)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를 보내더니, 다음 해인 1944년에도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제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 79책을 보내 준다.


추사는 한결같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의 따뜻한 마음에 감격하여 환갑이 다 된 59세 때 갈필(渴筆)과 ‘마른 묵[乾墨]’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문기(文氣)를 한껏 드러낸, 담(談)과 정(靜)의 미학을 듬뿍 담고 있는 그림을 그려 준다. 〈세한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세한도〉라고 일컬어지는 그림의 주제는 발문(跋文)에 잘 나타나 있다. 발문에서는 먼저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공자의 유명한 말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인용한 다음 “지금 그대와 나와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과 달리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을 칭찬하고 있다. 추사는 이런 전후 정황을 이른바 〈세한도〉로 명명되는 작품에 형상화한다.


4. 나오는 말

〈세한도〉에 그려진 나무와 집은 각각 의미하는 바가 있다. 큰 집이지만 휑하니 인간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정황은 추사의 제주도 유배 정황이 담겨 있다. 통째로 꺾이고 깊숙하게 패인 늙은 소나무이지만 새롭게 잔가지가 기운차게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형상은 추사의 현재적  삶의 시련과 미래적 삶에 대한 희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나는 이같은 소나무 형상에서 좌절과 희망을 한 데 담고 있는 추사의 인생을 읽고자 한다. 특히 『주역』의 시각에서 읽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