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광기(狂氣)와 예술 (Ⅱ)

  • 474호
  • 기사입력 2021.08.29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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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광은 유가의 경(敬)과 대척점에 있는 대표적인 용어 중 하나인데, 광에 대한 사유에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다. 예를 들면 광을 ‘마음의 광[심광(心狂)]’과 ‘행위적 광[형광(形狂)]’으로 구분한 것이 그것이다. 완적(阮籍)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거짓 광자[양광(佯狂)]’도 있다. 외적 행동거지의 광탄(狂誕)함 때문에 비난 받을 수 있는 형광은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도, 은일적 삶과 관련이 있는 심광의 경우는 역설적이게도 유학자들도 추구한 경지였다. 이것이 바로 중국문화 속내의 한 측면이다. 특히 심광은 창신(創新)적 예술창작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청광(淸狂)’, ‘취광(醉狂)’ 등과 같은 용어를 통해 스스로 광자임을 강조하는 예술가들이 많았다는 점도 이를 잘 보여준다.


‘광’자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이해하는 상황에 따라 달리 이해되었다. 서경(書經)에서는 성(聖)과 광(狂)을 각각 ‘총명한 인물’과 ‘혼우(昏愚)한 인물’이란 이분법적 등식 속에 두고서 광을 부정적으로 말하고, “광을 극복하여 성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때의 성인은 ‘제왕으로서 성인’을 의미한다. 중국역사에서는 위대한 제왕을 성인과 동일시하여 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으로 사용된 광에 대해, 바로 공자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일정 정도 긍정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인간 이해에서 공자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반면 위진시대 형광과 관련된 임탄(任誕)한 광자 모습을 거친 다음, 송대 주희는 유가의 예법준수와 윤리성을 근거로 광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사유를 보인다.


광의 의미 변천 과정에서 문제시되었던 것은, 왜 공자가 차선책으로 ‘부득이(不得已)’하게 광자를 용납하였고, 특히 공자의 문하에서 광사(狂士)로 평가받는 증점(曾點)[=증석(曾晳)]이 ‘욕기영귀(浴沂詠歸)’하고자 한 삶을 어떤 점에서 허여(許與)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질문에 심도 있게 접근한 인물이 원굉도다.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아! 이 세상에 공자가 없었다면 천하에 누가 다시 광의 진면목을 헤아렸겠는가?”라는 발언을 통해 공자의 광자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광자 발굴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그는 광자를 비판하지 말고 그들이 가진 역량의 ‘크게 쓰임이 됨[대용(大用)]’을 통해 광자의 대사회적 효용성을 재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광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아가 이 세상에서 그들을 어떻게 제대로 쓸 것인지 고민하되, 그들을 이단시하거나 배척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말라는 것이다.


광자의 논의와 동시에 이뤄진 것이 성인(聖人) 존재에 대한 규명이었다. 광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보인 인물들은 유가가 규정한 성인관, 즉 ‘인륜의 극치’에 오른 인물이란 도덕 차원에 한정하여 성인을 말하지 않는다. 그 발단을 열어준 것 가운데 주목할 인물이 앞서 언급한 왕수인이다. 그는 광자의 정신경지와 마음[광자흉차(狂者胸次)]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실천만 따른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성인의 경지에 얼마든지 오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 모두가 성인이다[만가도성인(滿街都是聖人)]”라는 발언도 한다.


왕수인은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 규정한 뒤, 이른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말한 곳에서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기에 세상 사람을 보는 데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없고, 혈기가 있는 모든 것은 모두 그의 형제나 자식의 친족이기에 안전하게 그들을 가르치고 길러서 만물일체의 염원을 완수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인과 다를 바가 없는 천하 사람들’이 그 성인의 마음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것은 사심(私心) 때문이라 진단하고, 그의 극복을 통해 성인되기를 역설한다. 주희가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을 기본으로 한 도통론(道統論)의 입장에서 규명한 윤리적 성인관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같은 왕수인의 파격적인 성인관은 이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자는 모두 성인”이라는 서위(徐渭)의 견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성인을 특별한 존재로 보지 않으면 광자와 성인의 간극은 좁혀질 수밖에 없다. 광자가 스스로 제재(制裁)하여 중행에 합치되거나 혹은 말한 것과 관련된 실천을 위해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인이 될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데, 이런 시점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렇게 왕수인 등이 말하는 ‘광자의 성인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가 단지 철학의 관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술창작과 관련된 광자정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네 개의 경구를 해서로 쓴 것이다. 사무사(思無邪) : 삿된 생각이 없어야 한다. 무자기(毋自欺) : 자신을 속이지 말라. 신기독(愼其獨) : 혼자 있을 때 삼가라. 무불경(毋不敬) : 불경한 짓을 하지 말라. 이상 네 경구는 유학의 경외(敬畏) 사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광기와 대척점에 있는 대표적인 문구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철학사에서 광견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이가 바로 공자였다. 이후 주희를 비롯한 송대 이학자들은 이런 광견을 이단시하면서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지만, 사실 송대 이학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공자가 지향한 인간상과 철학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광견관에 대해서만큼은 이들과 다른 시각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유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자세다. 이와 더불어 광견에 관한 긍정적인 사유는 도가의 몫이었으며, 예술측면에서는 특히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명대 중기 이후의 이른바 양명좌파(陽明左派)들의 광견에 대한 발언도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중국역사에는 이른바 대영웅의 기상을 보인 인물이나 예술적 천재성을 보인 인물 중에는 광견에 속하는 인물이 매우 많다. 스스로 ‘초나라 미치광이[초광(楚狂)]’라 일컬은 이백(李白)은 그 하나의 예다. 대유학자인 주희조차 때론 스스로 광노(狂奴)라 표현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자칭 혹은 타칭 광자라 불린 이들은 모두 자신을 스스로 높이던가 아니면 역설적으로 타인이 자신을 높여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중국예술에서는 특히나 이런 측면이 뚜렷한데, 이는 중국문화와 철학, 예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면서 서양문화나 예술과 다른 점이다. 동양 문인문화에서 광기는 천재문인이 가져야 하는 독특한 기질이었다.


중국문화가 긍정한 광자는 미셀 푸코가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감금되어야 하는 부정적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존 체제와 법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정신의 경지를 창조해나간 이들이었다. 철학 측면으로 말하면 장자가 말했던, 소지(小知)에 매몰된 지식과 지혜의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라 구만리 창천을 향해 솟구친 붕(鵬)의 비상을 통한 대지(大知)의 세계를 꿈꾼 이들이었다. 창의적이면서 천재성을 발휘한 철학자와 예술가들을 자신의 광기를 통해 독립성·고고성·진취성·대담성·개방성·비판성·비타협성 등을 발휘함으로써 과거의 관습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주체적인 나, 즉 ‘참된 자아[진아(眞我)]’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동양철학과 예술에서의 광의 스펙트럼은, 윤리·철학·예술적 측면에서 유가의 중화중심주의와 예법지상주의를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동과 무한한 정신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것, 기존의 진리라 여겨온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펼치는 것, 그러다 보니 인간의 현실과는 때론 일정한 거리가 있어 ‘지향한 정신이 매우 높은[지극고(志極高)]’ 경지를 실천하려는 철학자 및 예술가들의 정신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참된 진리[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학문적 고뇌가 담겨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철학과 예술에서 이황과 다른 ‘길’을 간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티브 잡스가 말한 바와 같이 때론 사회의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들, 우리 사회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정해진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들에 의해 철학과 예술은 살아서 숨을 쉬고 윤기가 있을 수 있었다. 동북아시아 문명권에서 유가가 지향한 삶과 길을 거부하고 광견적 삶을 지향한 철학자 및 예술가들에 주목해야할 이유다.



팔대산인[八大山人=朱耷], <고매도(古梅圖)>, 96x55cm.
전통적으로 동양문화에서는 난과 매화는 비덕(比德) 차원에서 모두 군자라고 일컬어지나 생태학적 속성을 보면 차이점이 있다. 난이 주는 군자 이미지와 매화가 주는 군자 이미지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난은 음유(陰柔)적 이미지가 강한 반면 매화는 양강(陽剛)적 이미지가 강하다. 난은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자신의 향기를 발한다는 점에서 산속 은사를 연상시키고 우리가 손쉽게 접할 수 없는 식물이지만, 매화는 우리 일상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매우 친숙한 식물이다. 아울러 난은 ‘고란(古蘭)’이 없지만, 매화는 고매(古梅)가 상징하듯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풍상을 같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엄청난 풍상을 겪은 뒤 패이고 꺾이고 눌리다가 겨우 꽃잎 몇 개만 남은, 뿌리를 내릴 땅 조차 없어진 상태에서 기울어졌지만 꽃을 피운 고매를 통해 망한 명나라의 망국의 슬픔과 고통을 상징한 팔대산인의 이 그림은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망국을 상징한 그림보다 훨씬 더 처절하면서 드라마틱한 점이 있다. 소재를 난에서 고매로 바꾼 것 같지만, 동일한 내용이라도 이처럼 소재를 바꾸어 표현하는 것에는 법고 아닌 창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고자 한 팔대산인의 광기어린 천재성이 담겨 있다. 팔대산인의 이같은 광기어린 예술적 천재성은 그가 추구한 철학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