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유학자들의 신선문화에 관한 연구 (Ⅰ)

  • 479호
  • 기사입력 2021.11.11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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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위 시는 조선조 유학자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이단 배척의식이 강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42세 때 어느 늦은 봄날에 꾼 꿈을 읊은 시[足夢中作]다. 이황은 현실에서는 리(理)를 중시하면서 철저하게 유가 윤리지향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꿈속에서는 신선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 이같은 이황의 시는 조선조 유학자들이 마음속으로 품은 신선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사후의 천당을 상정하는 기독교의 생사관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현실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인들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실리(實理)에 입각해 천도(天道)를 이해하는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불로장생의 신선을 부정한다. 이이(李珥)는 「신선책(神仙策)」에 대한 답에서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가 성인 차원의 장생불사(長生不死)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이황의 시에서 보듯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바랐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학자들이 천도를 실리 차원에서 이해할 때 역대 신선의 존재 유무는 논란 거리에 해당하지만 중국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신선전(神仙傳)’에는 이른바 신선으로 추앙받는 많은 인물들을 게재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신선에 대한 열망은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선전’ 등에 거론된 인물들의 실질적인 삶을 보면 실제 불로장생 차원의 신선이기보다는 ‘신선이 상징하는 삶’을 산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불로장생 차원에서의 신선의 존재 유무를 논하지 않고 말한다면 신선처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추앙은 있었는데, 신선처럼 사는 삶은 유학자들이 추구한 은일적 삶과 일정 정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갈홍(葛洪)이 말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 노동하면서 청빈함을 기준으로 한 은일적 삶을 사는 것하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신선처럼 사는 것’은 차이가 있다. 유학자들이 ‘신선처럼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적당한 때에 그런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연산수공간에서 은일 지향적 삶을 사는 양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丁若鏞)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이 신선 되는 근본이라고 하는데, 관료지향적 삶을 살면서도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조선조 유학자들이 추구한 신선풍의 삶은 도성(都城) 혹은 인경(人境)에 살아도 마음먹기에 따라 신선처럼 산다고 여긴 ‘마음의 신선[心仙] 경지’를 추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신선처럼 사는 삶과 관련된 신선경(神仙境)은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말한 이상형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 및 공간선택과 관련이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조선조 유학자들이 바란 신선경과 추구하고자 한 신선문화에 맞추어 논해보자


2. 신선 존재 부정과 불로장생 비판


황현(黃玹)은 신선의 존재 유무 및 유학자들이 추구한 신선의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정리한다.


세상에는 과연 신선(神仙)이 있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는 정말 신선이 없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째서 있다고 하는가? 전기(傳記)에 실려 있는 악전(偓佺)이나 팽조(彭祖) 같은 인물들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신선 역시 사람일 뿐이다. 어찌 옛날에만 있고 지금은 없다고 한다면 그래서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선의 유무는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그대는 잠시 그 유무를 말하지 말라. 가령 진짜 있다 해도 나는 그게 하잘 것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오래 사는 것’을 신선이라 하는데, 오래 사는 데에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처자식과 잘 지내고 예전처럼 봉양을 잘 받으며, 예전처럼 친구와 잘 지내면서 내 육신을 지탱하고 내 욕구를 발산하는 데 있다. 그래야 ‘오래 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신선처럼 사는 것의 핵심 중의 하나는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이다. 이같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벗어나지 않고 관계 지향적인 삶과 욕망 표출을 통한 즐거움을 누리면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은 도교 차원에서 말하는 ‘홀로[獨]’ 궁벽진 자연공간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면서 사는 신선의 삶과 차별화된 사유에 속한다.


이이는 조선조 과거시험인 ‘신선에 대한 책문[神仙策]’에 대해 행한 답에서 천지의 이치는 기본적으로 실리(實理)라는 입장에서 신선의 존재 및 신선술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부정한다. 실리를 통해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유가가 제시하는 전형적인 신선관이다. 생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의 취산(聚散)과 관련된 논의를 통해 불로장생의 신선 존재를 부정한다. 죽고 사는 것의 문제는 하늘에 달려 있을 뿐이지 인간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는 인명재천(人命在天) 사유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이이는 ‘천지만물은 나와 한몸’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을 통한 장생불사를 추구하면서 단명과 장수로 그 생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견해는 도교 신선술이 제시하는 장생불사가 한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과 다르다. 자연의 변화를 포함한 인간의 생사를 천지의 실리 및 기의 취산으로 이해하는 유학자들에게 신선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아울러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에서 신선의 존재 유무를 결정하는 유학자들에게 이른바 오균(吳筠)이 말한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신선이 될 수 있다[神仙可學論]’라는 것과 같은 논의도 없다.


이이가 모든 자연 현상과 변화가 천지의 실리 아닌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신선의 존재 유무 및 도교의 장생불사와 양생법을 부정하는 이같은 견해는 유학자의 신선관의 기본에 속한다. 그런데 이이는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선술과 관련된 장생불사 등은 기본적으로 부정하지만 현실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선과 관련하여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것은 신선처럼 사는 것과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김홍도(金弘道), 〈군선도(群仙圖)〉,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제139호.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 장과로(張果老), 조국구(曹国舅), 한상자(韓湘子), 노자(老子), 동방삭(東方朔), 이철괴(李鉄拐), 여빈동(呂洞賓), 문창(文昌), 종리권(鍾離權)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문인사대부와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선은 검선(劍仙)이라 일컬어지는 여동빈이다. 여동빈이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꾀했지만 실패한 것은 문인사대부들의 과거시험 좌절과 동일한 공감대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 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개인소장.

김홍도는 유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포의한 상태에서 호로병의 술을 비운 다음 비파를 연주하고 시간되면 문방사우를 통해 서화창작에 임하면서 풍류를 즐기겠다는 것은 조선조 유학자들의 ‘심선心仙’ 지향의 정황과 일맥상통한다. 김홍도는 이런 점을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서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나 읊조리며 지내리라[紙窓土壁 終身布衣嘯永其中]’라고 읊는데, 산호와 영지 등은 도교의 영물(靈物)이면서 부유함을 상징한다. 사인검은 여동빈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