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노장사상(1)

  • 493호
  • 기사입력 2022.06.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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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흔히 ‘함석헌’ 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죽어 가는 시대의 양심’ 및 '씨알의 소리' 등을 떠올린다. 간디와 톨스토이를 좋아하며 비폭력주의를 말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함석헌의 삶 속에는 성경을 제외하면 동양적 사유가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노장철학은 군사독재와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자신의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하였다. ‘씨알’이란 말은 스승인 다석(多石) 유영모(柳永模)가 "대학(大學)" 제 1장인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므름에 있나니라[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라는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즉 백성 ‘민’을 ‘씨알’로 풀이한 것이다.  


씨알에서의 ‘알’은 본래 정신, 혼, 영을 의미하는 ‘얼’과 같은 말이다. 그가 ‘민’ 대신 굳이 ‘씨알’이라 쓰는 것은 주체성 때문이다. 그동안 핍박받고 무시당한 민을 위하는 사상이 깔려 있다. 함석헌은 영웅사관이나 성인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나 성인들 때문에 민중이 고통받았다는 장자(莊子)의 외침을 받아들인다. 함석헌은 씨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씨알주의를 강조하면서 이 씨알주의를 "노자"를 포함한 동양고전에서 찾는다.


함석헌의 동양사상 강의 모습: 중국 고대 하은주(夏殷周) 삼대에 나타난 사상을 씨알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2.

‘함석헌’ 하면 아는 사람은 ‘노장철학’을 떠올릴 정도로 오랫동안 노장철학을 강의했고 또 노장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독특한 면이 있다. 그가 노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본적으로 노자와 장자는 나라의 주체이면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자를 ‘생(生)’자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함석헌이 노자철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평화주의, 무위정치, 백성을 위하는 마음 등이다. 함석헌은 노장철학에는 ‘씨알(민)’을 깔보는 ‘서민’이란 말이 없다고 본다. 이런 이해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 행태와 전쟁을 비판하고 비폭력주의를 전개한다. 함석헌은 노자를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를 펼친 인물로 본다. 이런 이해를 통해 전쟁을 비판하고 비폭력주의를 말한다. 함석헌은 “나는 노자를 평화주의의 첫째 사람이라고 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해서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그때는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장자는 그것을 우주적인 나팔로써 외쳤다”고 말한다. 이같은 이해는 노자가 전쟁을 비판하고 평화사상을 전개한 '노자' 31장에  근거한 것이다.  


군대를 아름답게 만들면 좋지 못한 그릇이므로 만물이 그것을 싫어할 수 있다. 군사란 것은 좋지 못한 그릇이지 어진 이의 그릇이 아니다. 마지 못해 쓰는 것이므로 고요하고 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제일이요, 이기고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면 그것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는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슬프고 아픔으로 울어야 하고 싸움에 이겼으면 사람 죽은 때의 예법으로 지낸다.


함석헌은 '노자' 31장에 대해 “노자가 2,500년 전에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평화사상을 가르쳤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데모하는 학생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학대하는 군인들은 마음이 어째서 그럴까? 정상적인 인간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전쟁에 이기고도 부끄럽고 슬퍼서 상주의 심정으로 지내는 그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노자'에 나타난 전쟁비판, 평화주의적인 태도를 통하여 군사독재시절에 데모하는 학생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학대하는 군인들의 마음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해는 함석헌의 '노자' 이해가 현실과 유리된 '노자'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반증한다.


함석헌의 평화주의에 대한 바람과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비폭력철학으로 전개된다. 왜 비폭력철학이 필요한가? 전쟁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협화하여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진단한다. 그러면서 이런 점과 관련하여 함석헌은 노자에게서 참으로 귀중한 선물, 영원히 마지막 선물이라 해도 나무랄 데 없는 참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자' 67장에서 말하는 ‘삼보(三寶)’라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삼보’는, 첫째는 헤가림 즉 불쌍히 여김이고[一曰, 慈], 둘째는 졸라맴 즉 수수하게 함이고[二曰儉], 셋째는 감히 남보다 앞장을 지르지 않는 것[三曰, 不敢爲天下先]이다.

노자가 ‘삼보’를 말한 이유는 씨알이 고달프게 희생이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기본적으로 폭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깔려 있다.


톨스토이와 함께 '노자'를 공역한 소서증태낭(小西增太郞)은 톨스토이가 '노자' 31장의 “훌륭한 무기라는 것은 실은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다. 세상 사람들이 항상 그것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사람은 무기를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글을 읽고 펄쩍 뛰며 기뻐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3.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 정치를 불신하는가? 정치하면 민중이 자연스러움을 잃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에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가이다.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면 노장이 어쩔 수 없이 행한다는 ‘부득이(不得已)한 무위’의 정치 즉 ‘씨알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정치’를 하라고 한다. 함석헌은 노자와 장자는 춘추전국시대에 나서 문물은 발달하는 반면 인심은 점점 각박해졌고 제도와 법이 까다로워지는 대신 나라의 주체인 민중은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그 같은 경향과 싸우며 세상을 건지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것을 정치와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장이 무위의 정치를 말한 것을 거론한다. 우리는 흔히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수방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왕필(王弼)은 무위를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順自然]’으로 이해한다. 함석헌은 무위는 결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멍청히 있으란 말은 아니고 말을 바꾸어 말하면 일종의 자치정치라고 이해한다. 가만두고 그냥 맡기면 저절로 바로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아니 씨알의 자율성에 무한한 기대를 거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가만둔다는 것은 게으름장이 노릇을 하란, 모른 척 하란, 책임을 모르란 말이 아니고 민중을 믿으란 말이다. 나 자신 속에 절대의 뜻이 계신 것을 믿고, 그 뜻이 스스로 하기 위하여 작고 못된 뜻을 물리치란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했다고 본다.


요컨대 진정한 지도자는 결코 ‘내가 지도자’다 하고 민중을 구속하고 억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무위정치와 관련지어 '노자' 60장의 “큰 나라 다스림이 작은 생선지짐과 같다[治大國若烹小鮮]”라는 말을 그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백성은 될수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잘하는 정치라는 것이다.


4.

함석헌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이룩된 서양문명의 문제점과 한계성을 본다. 이제 서양의 사상이나 문명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다가올 미래세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할 큰 차원의 사고와 지혜를 찾기 위해 동양의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고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그의 입장은 시대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 변한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민중의 대변자로서, 때로는 시대의 예언자로서 살았다. 영어에 만일 ‘resist’란 말이 없었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라고 했던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지 않는 철학이 현실에 대해 무엇인가 발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철학 없는 민족’이라고 비판하는 그는 '성경'과 '노자'와 ‘장자’를 비롯한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역사를 이해하고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2,000년 전의 노자철학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응용하였기에 죽어있는 살아있는 노자철학으로 우리에게 와 닫을 수 있었다. 그가 '노자' 등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오늘의 현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