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초상화의 시선과 신독(愼獨) (1)

  • 495호
  • 기사입력 2022.07.14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1354

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대부분 거의 본능적으로 영정(影幀) 사진을 찍듯이 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면서 경직된 표정으로 바뀌곤 하였다. 시선은 거의 대부분 정면을 직시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데, 이런 점을 주희(朱熹)가 「경재잠(敬齋箴)」에서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上帝)를 대하는 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도판 1]”라고 말한 것과 연계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특히 경배(敬拜)하고 경모(敬慕)하는 대상에 속하는 조선조 사대부 초상화의 형상은 한결같이 고요히 한곳을 응시한 채 절제된 표정과 엄숙 단정한 공수(拱手) 자세로 그려져 있는데, 이같은 형상이 갖는 의미를 신독(愼獨) 및 그 신독이 갖는 ‘대월상제(對越上帝)’ 의식과 연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도판 1 : 퇴계(退溪) 이황(李滉) 글씨,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 앞부분.]



2. 김홍도의 자화상에 나타난 두가지 몸가짐


우선 조선조 사대부들의 초상화 시선에 담긴 의미를 김홍도(金弘道)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그림을 통해 보자. ‘하나[A:도판 2](일명 布衣風流圖)’는 옷을 풀어 헤친 포의(布衣) 상태에서 맨발을 드러낸 채 편안하게 당비파(唐琵琶)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신이 평소 집안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기물[筆, 硯, 書冊, 笙篁, 陶磁器, 芭蕉葉, 葫蘆甁, 鼎, 觚, 士人劍]은 방안에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다. 그려진 형상들 그 어떤 것도 정제된 것은 없다. 호로병이 기운 것을 보면 이미 음주 이후 상태로서, 시선을 아래로 한 김홍도가 켜는 당비파 소리가 화면에 가득한, 풍류 정취가 넘쳐흐르는 정경이다.


[도판 2 : 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다른 하나[B:도판 3]’는 방안의 모든 기물이 책상 위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가지런히 놓인 상태에서 김홍도의 몸가짐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손에 접부채[摺扇]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꽁꽁 여민 성복(盛服) 차림을 하고서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정제엄숙함을 유지한 채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 김홍도의 시선에는 긴장감마저 서려 있다.


[도판 3 : 김홍도 〈자화상〉]


두 그림에 그려진 인물의 시선은 모두 앞을 향하고 있지만, 그 시선에 담긴 마음가짐은 완전히 다르다. [A:도판 2]의 눈동자에는 화제[紙窓土璧, 終身布衣, 嘯咏其中]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 가득 풍류적 삶 혹은 쇄락(灑落)적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흥취가 담겨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제엄숙한 몸가짐을 유지하고 있는 ‘[B:도판 3]’의 눈동자는 유가 愼獨 차원의 경외(敬畏)적 마음가짐이 담겨 있다. 이글에서는 이같은 신독 차원의 자화상 형상과 그 형상에 담긴 종교성을 조선조 사대부들이 제사 때 사용했던 조선(祖先)의 초상화 혹은 경모하는 대상의 초상화에 적용하여 규명하기로 한다.


정이(程頤)는 제사 지낼 때의 초상화와 관련해 “지금 사람들은 영정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는데, 혹 화공이 그려 전한 것이 수염과 털 하나라도 서로 같지 않으면 제사 지내는 대상이 이미 딴 사람이므로 크게 온편하지 않다[今人以影祭, 或畵工所傳, 一髭髮不當, 則所祭已是別人, 大不便]”라고 말한 적이 있다. 초상화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눈동자다. 왜냐하면 눈동자 속에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눈동자를 통해 내면의 마음가짐이 모두 표현된다는 점에서 유학에서는 이른바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愼獨]’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같은 신독 강조의 사유는 이후 유학자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규정하는 핵심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점은 초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조선미는 한국회화사에서 볼 때 초상화는 유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방했던 조선조에 이르면 소위 효(孝) 사상을 기반으로 한 추원보본(追遠報本) 관념과 더불어 주희 혹은 송시열(宋時烈) 등과 같은 인물을 존숭하는 이른바 숭현(崇賢) 사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이에 향사에 쓰일 초상화 수요가 많아지게 된다고 진단한다. 아울러 이같은 사대부상은 주로 사당(祠堂), 영당(影堂) 및 일반 사우(祠宇)에 봉안하여 향사(享祀) 참배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조선조 사대부 초상화는 고인에 대한 추모나 기념용으로 제작되었다기보다는 사당, 영당, 서원 등에 봉안한 상태에서 후손이나 유림(儒林), 나아가 일반인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숭모(崇慕)의 생각을 일깨우면서 향사하고 첨배(瞻拜)하는 것이 주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본다. 이런 정황을 조선조 후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주목할 것은 문중 제사와 관련된 사대부상(士大夫像)의 득세다.


3.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제사와 초상화 수요


공자는 효도와 관련해 부모가 ‘살아있을 때, 돌아가셨을 때, 제사 지낼 때’ 모두 예로써 할 것을 말한다. 맹자는 ‘송사(送死)’를 부모에게 행하는 ‘양생(養生)’보다 큰일로 여긴 적도 있는데, 유가의 효도 관념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자식으로서 행해야 할 바람직한 도리의 하나로 제사를 강조한다. 『예기(禮記)』「제통(祭統)」에서는 사람 다스리는 길로서 예보다 급한 것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제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여 제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제사의 기본은 추원보본인데, 공자는 조선에게 祭事 지낼 때에는 조선이 계신 듯이 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제사 지낼 때 성의를 다하는 것이 형식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한 것인데, 이 때 만약 조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초상화가 있었다면 제사는 더욱 경건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조선이 계신 듯한 것’과 관련된 정황은 한당(漢唐) 이후에는 초상화가 그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문중이나 가족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 조선을 경모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제사를 지냄으로써 조선이 후손에게 유가가 지향하는 삼강오륜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통해 혈연공동체의 화목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이처럼 사당을 세우고 유상을 모시면서 행하는 제사에는 종교성과 윤리성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에 조선조 사대부들은 여건이 되면 사당을 세우고 유상(遺像=초상화)을 모시면서 제사를 지냈고, 이런 점은 조선조 후기에는 문중마다 초상화를 구입하여 제사에 사용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제사에 사용하는 초상화는 단순 인물화가 아니라 조선의 신명이 깃드는 성물(聖物)로서 종교성을 띠게 된다. 장현광(張顯光)은 제사를 지낼 때나 그 화상(畵像=초상화)을 보는 것이 마땅하고, 만약 화상을 꺼내 본다면 반드시 경배하는 경모의 자세를 표할 것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