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호걸’인가?

  • 511호
  • 기사입력 2023.03.14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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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조선조 유학사에서 진유(眞儒)이면서 사종(師宗)으로 평가받고 의리를 강명(講明)한 퇴계 이황은 호걸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보자. 퇴계에 대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퇴계는 항상 염장(斂藏)과 염퇴(廉退), 청수(淸修)와 고절(苦節)의 도로써 스스로를 지켰다”라고 평한다. 퇴계는 ‘무불경(毋不敬), 신기독(愼其獨), 무자기(毋自欺),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를 항상 방에 걸어놓고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경외(敬畏)적 몸가짐과 마음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같은 퇴계에게 호탕하고 때론 자유분방한 행동거지가 연상되는 ‘호걸’이란 용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적어도 영기(英氣) 있고 반드시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 문과(文科)를 거쳐서 진출(進出)하려고 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서 무과(武科)로 가는 자가 많다고 하는 것은 호걸지사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데, 호걸지사라는 말도 퇴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퇴계는 호걸은 아니지만 호걸지사에는 속한다. 궤변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이다. 퇴계를 호걸지사라고 규정하는 것에서 조선조 유학사에서 호걸지사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알 수 있다.


2. 은일 지향 삶 차원의 호걸지사


호걸하면 경외적 삶을 지향하는 유가보다는 은일을 지향하면서 세속의 시비를 가리지 않는 도가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문인보다는 무인을 연상케 한다. 이런 점에서 유학자들은 때론 호걸지사를 이단시하면서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성인(聖人)은 색은행괴(索隱行怪)하지 않고 군자는 자현자매(自衒自媒)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데 호걸지사는 이 두가지 폐단에 자주 유입(流入)하면서도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호걸지사들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그것이다.

유가는 색은행괴(索隱行怪)와 자현자매(自衒自媒)하는 것을 이단에 가까운 것으로 여긴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은 모두 호걸지사의 재량이 다른 사람보다 지나친 것이란 견해를 제기한다. 그런데 임제의 호걸지사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알고 보면 은일적 삶을 살면서 노장에 이해가 깊었던 스승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의 기상으로 말해지는 ‘홍명구소(鴻冥九霄)’와 ‘봉거천인(鳳擧千仞)’이야말로 진정한 호걸지사의 면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 초상화.

신선풍을 연상시키는 이 초상화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쓴 남명 조식의 제문 : “[(嗚呼, 先生)禀天地純剛之德, 鍾河嶽淸淑之精, 才高一世。氣蓋千古. 智足以通天下之變, 勇足以奪三軍之帥, 有泰山壁立之像, 有鳳凰高翔之趣. 璨璨如峯頭之玉, 顥顥如水面之月. 自我而觀之, 宜其爲振東方未有之人豪矣.]”이 적혀 있다.]


조선조 유학사에서 호걸지사를 거론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될 수 있는 인물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조식에 대해 ‘태산벽립(泰山壁立)’의 상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호걸’이란 관점을 제시한다.


아, 선생께서는 천지의 순수하고도 ‘굳센[剛] 덕’을 타고났으며, 산천의 맑고 아름다운 정기를 한 몸에 받으셨으니, 재주는 한 세상에 드높고 기개는 천년을 압도할 만하였습니다. 지혜로움은 천하의 변고를 통달하기에 충분하고, 용맹은 삼군의 장수를 빼앗기에 넉넉하셨으니, 태산이 우뚝 선 기상이 있고 ‘봉황이 높이 나는 취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품은 산봉우리의 옥처럼 찬란히 빛나고 물 위에 어린 달빛처럼 해맑으셨습니다. 저의 안목으로 볼 때 당연히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호걸’이셨습니다.


‘태산이 우뚝 선 기상’이 있고 ‘봉황이 높이 나는 취향’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 호걸풍을 규정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조식이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천인(千仞)에 벽립(壁立)한 기상’이 있는데, 은둔하면서 벼슬하지 않았고 문장도 ‘기이하면서 위대하여 평범하지 않다’고 하고, 시에 대해서는 시의 운치가 ‘호걸스럽고 기상이 씩씩하다[豪壯]’는 평을 하여 남명의 처사(處士)적 삶을 잘 말해주고 있다. 남명 이외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도 호걸지사로 일컬어진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말을 보자.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서경덕(徐敬德)은 총명(聰明)이 뛰어난 자질로 도학(道學)이 끊어진 황무(荒蕪)한 지역에서 태어나 학문을 하는 데는 물리(物理)를 궁구하는 것을 힘쓰고, 앎을 이룸은 생각하여 얻는 것으로 말미암았으니, 이는 일거에 도(道)에 이르렀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 시대의 호걸지사(豪傑之士)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향(同鄕)의 많은 선비들이 풍문을 듣고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이상 호걸지사로 거론된 남명, 성운, 화담 등은 관료되기를 거부하면서 은일 지향적 삶을 추구하거나 노장사상에 심취, 혹은 기(氣)에 관심을 가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주자학만을 오로지 숭상하는 인물들의 호걸지사풍과 다른 점이 있다.


3. 유학[주자학] 존숭 차원의 호걸지사


[율곡 이이(좌), 퇴계 이황(우).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는 이른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던 퇴계,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던 율곡, 비록 이기론에서는 두 인물 모두 입장 차이를 보이지만 두 분 모두 호걸지사로 일컬어졌다.]


조선조 유학사를 보면 앞서 거론한 호걸지사와 다른 주자학을 존숭했던 인물들도 호걸지사로 규정하는 사유가 나타난다. 지면 관계상 관련된 내용만을 나열해보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문묘 배향과 관련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현인을 호걸지사로 규정한다.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의 다섯 현인(賢人)은 바로 우리 동방의 호걸지사(豪傑之士)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훌륭한 학문과 도덕은 마땅히 후세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전대의 성현들을 잇고 후대 학자들의 길을 틔워 준 공은 마땅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어야 합니다.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을 호걸지사로 규정한다.


성현이 태어남에는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받아 탄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천 수백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탄생하였고, 우리나라는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이 비로소 성현을 목표로 학문을 닦아, 혹은 나아가서 큰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물러나 스스로를 수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이이와 성혼이 탄생하여 학문과 덕행에 힘써 치군택민(致君澤民)의 도를 한결같이 성현을 본보기로 삼았으니, 참으로 맹자가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입니다.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도 호걸지사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왕조의 성리학은 김종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옳을 것이고 문장학이 김종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역시 옳을 것입니다. 김종직으로 말하자면 진실로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이밖에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는 오음(梧陰)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인물 됨됨이를 호걸지사와 연계하여 이해하면서 호걸지사의 정치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개 호걸지사(豪傑之士)가 완전한 재주와 해박한 식견으로 홀로 간기(間氣)를 받아 화려함과 실속을 겸비하고 좌우가 모두 마땅하여 사업에 시행하면 훈업(勳業)이 되고 말로 내면 사조(詞藻)가 되어 기상(旂常)의 공렬과 상소(緗素)의 업적이 나란히 전해지고 아울러 빛나는 경우는 고금에서 찾더라도 드물거니와, 고상(故相) 오음(梧陰) 윤공(尹公: 尹宣擧) 같은 분이라면 거의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자학을 존숭하면서 조선조 유학의 큰 맥을 이어온 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호걸지사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조 유학사에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일 경우 호걸지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성향을 규정한 경우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차원의 호걸지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호걸하면 떠오르는 호탕함과는 거리가 먼 것에 속한다.


4. 나오는 말


조선조 유학사에서 호걸지사로 일컬어졌던 인물들의 학문 성향이나 삶의 궤적을 정리해 보자. 하나는 처사로서 은일적 삶을 지향하면서 때론 노장사상에 심취한 인물들을 호걸지사로 규정한 경우다. 바로 대곡 및 벼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평생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았던 남명과 화담의 호걸지사풍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자학을 철저하게 신봉했던 퇴계, 율곡을 비롯하여 문묘에 종사된 많은 인물을 호걸지사로 규정한 것이 그것이다. 후자는 맹자가 남방 초나라 출신이면서 북방 중원에 와서 유가의 성인의 도를 전심전력으로 배우고자 했던 진량(陳良)을 호걸지사로 규정한 사유와 일정 정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본다.


퇴계는 호걸은 아니지만 호걸지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