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왕들의 노장(老莊) 인식

  • 547호
  • 기사입력 2024.09.12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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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중국의 황제와 한국의 역대 왕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철학과 종교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중국의 황제는 도가와 도교에 긍정적인 견해를 보인 점이 상대적으로 조선조 왕보다 강했다는 것이다. 중국황제들이 행한 『노자』에 관한 주석서가 4종류[당현종(唐玄宗), 송휘종(宋徽宗), 명태조(明太祖), 청세조(淸世祖)]가 있고, 때론 『노자』를 치국의 책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황제들의 불노장생을 추구하는 도교에 대한 관심[특히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 송휘종(宋徽宗) 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였다. 한국역사에서 도교는 고려 예종 때 잠깐 흥기했고, 조선조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소격서(昭格署)가 완전히 폐지된 이후 공식적인 도관(道觀)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통해 유교 국가임을 표방한다. 불교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도가[노자와 장자]도 자연스럽게 이단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리(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 우월주의를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리[유학]가 기[도가]와 심[불가] 깨우친다는 이른바 ‘이유심기(理諭心氣)’를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유가 성인의 도통론[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 계보를 중시하는 주자학은 기본적으로 ‘노불(老佛:노자와 불가)’을 이단시한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주자학을 자신들이 지향하는 세계관의 기본으로 설정한 이후 주자학이 득세하게 됨에 따라 흔히 조선조는 주자학의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주자학 일색일 것 같은 조선조의 속살을 보면 그렇지 않은 점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이런 점을 왕들의 노장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자.


[선조 어필: 『莊子』를 좋아한 선조의 자유분방한 심경이 담겨 있다.]




2. 정조 이전 왕들의 노장 인식


조선조 유학자들이 노장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노장이 지향하는 철학이 인간 현실의 삶과 유리된 형이상학[上達處]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즉 유가가 지향하는 경세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조선조 역대 왕들도 당연히 노장을 배척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조 역대 모든 왕들이 노장을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조 역대 왕들이 무조건 노자와 장자를 배척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선조(宣祖, 1552~1608)가 『장자』를 매우 좋아했다는 정황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선왕[宣祖]은 『장자(莊子)』를 매우 좋아하여 전교(傳敎)하는 글에서도 가끔 『장자』를 인용하기도 하고 문법(文法)도 흡사하였다. 이로 해서 배우는 자가 『장자』를 읽다가 이에 빠질까 염려해서 해조(該曹: 禮曹)에 명하여 과장(科場)의 논(論)과 책(策)에는 절대로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자년(1600, 선조 33) 전시(殿試)에서 거인(擧人) 이함(李涵)은 문장의 첫머리에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삭과(削科)하도록 명하였다. 이함은 그 후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다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선조가 『장자』를 좋아했고 글에서도 가끔 『장자』를 인용하기도 했다는 것은 선조가 그만큼 장자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고, 아울러 왕으로서 정치를 하는데 장자 사상이 정치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 담겨 있다. 선조가 이처럼 『장자』를 좋아했지만 신민(臣民)들이 장자사상에 탐닉할 경우 자칫하면 이황이 장자가 ‘유가 성인을 헐뜯고 예법을 멸하고[훼성멸례(毁聖滅禮)]’ 결과적으로 명교에 병통이 되었다라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선조가 신민들이 장자 사상에 빠질 것을 염려하고 금한 것은 당연하다. 이함(李涵 1554~1632)이 과거시험 답안지 머리글에서 장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 삭과의 이유가 된 것은 이후 조선조 정치와 철학이 결과적으로 유학중심주의[주자학중심주의]로 전개되게 된다는 상징성을 띤다. 선조가 과장(科場)의 논(論)과 책(策)에는 절대로 『노자』나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다른 차원에서는 이후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사상을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하라는 책문(策問)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선조의 『장자』 애호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황이 1568년(선조 1) 8월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려 정치하는데 이단을 배척할 것을 말하고, 이후 이이가 1575년(선조 8년)에 저술한 제왕학 교습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노장을 이단시한 것을 말한 것을 참조하면, 선조가 이황과 이이 등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세조 어필 : 행동에서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 엄정함이 담겨 있다.]


선조 이전에 노장에 관심을 가진 왕들이 몇몇 있었다. 정종(正宗)은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에게 묻기를, “노자(老子)와 신선(神仙)의 도를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이첨이 그것에 대해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종이 유가 이외에 노자와 신선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조선조 왕 가운데 정조가 가장 노장을 긍정적으로 이해한 것이 보이는데, 정조 이전에 노장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왕은 세조(世祖, 1417~1468)다.


세조[7년]가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병서(兵書), 『장자』, 『노자』, 한유의 문장[韓文] 등의 서적을 강(講)하게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간택한 문신들에게 기한 내에 『노자』, 『장자』는 물론 『열자』까지 읽도록 한다. 세조는 나라를 경륜하는데 제자백가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성종(成宗)은 유가의 성경현전(聖經賢傳) 이외에 『노자』, 『장자』, 『열자』 삼자(三子) 등과 같은 제자백가 글을 읽고서 올바른 선악 판단을 내리겠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유가의 성경현전 이외에 『노자』, 『장자』, 『열자』와 같은 글을 통해 선악 판단을 내리겠다는 성종의 발언은 진리 인식 및 행동거지와 관련해 택선고집(擇善固執)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속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종은 보다 적극적으로 삼자[노자, 장자, 열자]의 글을 강하는 것에 대하여 승정원에 전교한다. 그러자 도승지 이세좌(李世佐) 등은 임금은 마땅히 성현(聖賢)의 글을 보고 고금(古今)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웠던 자취를 상고할 뿐이며, 『노자』, 『장자』, 『열자』는 이단(異端)의 글인데 경연에서 진강(進講)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하고,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이거(李琚)는 『노자』, 『장자』, 『열자』는 이단의 글이므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성종은 자신이 『노자』, 『장자』, 『열자』 등을 자신이 읽어보고 판단 할 것이라고 하면서 삼자(三子)에 능통한 자를 기록하여 아뢰라고 한다.


성종의 기본 입장은 이단을 배척하려면 이단서를 제대로 읽고서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상대적으로 이단의 그른 것을 알면 성도(聖道)가 높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성종의 자유로운 진리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종 어필 : 송설체(松雪體)[趙孟頫 서체]에 단정한 글씨체를 가미시켜 유려(流麗)하면서도 단아(端雅)한 맛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정조의 이단관 및 노장 인식


조선조 왕 가운데 노장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 것은 정조(正祖, 1752~1800)다. 일단 정조는 “오직 문장에만 주력하고 경술(經術)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異端)이다.”, “문장(文章)과 박람강기(博覽強記)를 자랑하고 사부(詞賦)와 필한(筆翰)에 뛰어난 것이 어찌 예(藝)에 노니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만 주력한다면 이것이 바로 이단(異端)인 것이다” 고 하여 이단의 외연을 매우 넓게 잡는다. 하지만 정조는 다양한 발언을 통해 노불을 이단시만 하지 않는다. 정조는 불가와 노자를 삼교라 일컬으면서 그 조예가 깊은 곳에 초점을 맞추면 최고의 경지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유불도 삼교일치 등과 같은 학문 차원에서의 융합적인 정조의 발언에는 당시 자신들의 당파에 속하지 않은 경우 철저하게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융합 모색이란 점이 담겨 있지 않은가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노불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상이 이르기를, “노불(老佛)을 이단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말류(末流)의 폐단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시원(始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만법이 하나로 귀결된다[萬法歸一]’는 것은 불교나 유가(儒家)가 애당초 다르지 않은 것인데, 불씨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네 글자를 덧붙여 놓은 따위가 이것이다.” 하였다.


[정조 어필 : 강경하면서도 엄정한 필체, 활달한 필체도 있는 등, 왕희지체(王羲之體)부터 조맹부체(趙孟頫體),안진경체(顏眞卿體), 황정견체(黃庭堅體) 등 다양한 서체를 공부하여 여러 서체의 어필을 남긴 것이 특징이다.]


노불 말류의 폐단을 보고 이단으로 여긴다는 것은 노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유학과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사유가 담겨 있다. 정조의 이같은 사유는 주로 노불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흔히 주장하는 논지로서, 이황을 추종하는 영남학파의 경우에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문장과 관련하여 정조가 유가 경전이 아닌 『장자』와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王守仁)의 글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상이 이르기를, “제자(諸子)의 문장 중에서는 『장자』가 가장 훌륭하다. 내가 어려서 이 책을 꽤 여러 번 읽었는데, 책을 보다가 답답한 기분이 들 때마다 「소요유편(逍遙遊篇)」을 펴서 한 번 읽고 나면 가슴속이 상쾌해져서 한 점의 연기나 먼지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하였다.


정조가 어려서 『장자』를 많이 읽었고 특히 「소요유편」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영조 둘째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처한 어릴 때의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정치적 정황 때문에 읽었다고 추측할 수도 하지만, 장차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장자』를 많이 읽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조선조 유학자들이 문예 차원에서는 『장자』를 무조건 비판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선택적으로 『장자』의 문장을 긍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처럼 공개적으로 장자의 문장을 칭찬하는 것은 드물다.


상이 이르기를, “명나라 3백 년 동안 많은 작자(作者)가 나왔어도 훌륭한 문장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꼽자면 왕양명(王陽明)이 가장 나을 것이다” 하였다.


비록 시대를 명에 한정하여 말하지만, 왕수인이 제창한 양명학을 이황 및 이황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이단시하는 것을 참조하면 이상과 같은 정조의 말은 파격적이다.


4. 나오는 말


조선조 역대 왕들의 노장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은 크게 선조 이전, 선조 이후 정조 이전, 정조 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선조 이전에는 왕들이 노장에 대해 무조건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조 이후 정조 이전까지는 노장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이 없다. 이 점은 조선조 학문 경향이 이제 이황과 이이가 제창한 주자학에 기반한 철학이 득세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정조에 오면 유불도 삼교 일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 왕들과 다른 인식을 보인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왕들의 노장인식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같은 각기 다른 양상이 정치적 상황, 철학적 상황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조에서 전개된 철학의 변천으로 말한다면, 주자학의 정립 이전[선조 이전의 노장 인식], 주자학이 정립된 이후 영향력이 발휘된 시기[선조 이후 정조 이전], 주자학이 흔들리는 시기[정조] 등으로 구분하여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