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소리의 철학적 의미
김홍도의 〈「추성부도(秋聲賦圖)〉
- 559호
- 기사입력 2025.03.11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2667
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환경에서 살았던 한중의 문인사대부들은 ‘봄 꽃, 가을 열매[春花秋實]’이란 용어를 통해 봄과 가을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되 특히 가을 이미지에 주목하였다. 음양론의 관점에서 보면 봄은 양, 가을은 음을 상징하는데, 이런 음양론적 이해는 다양한 측면으로 확대되었다. 생(生)을 상징하는 봄은 젊음[若境]과 기운의 확산된 의미와 연계되어 이해하였다. 방위로는 동, 인물로는 동왕부(東王父), 오행으로는 목, 색으로는 청색, 예악에서는 악(樂), 인의예지와 관련해서는 인(仁)으로 이해되었다. 사(死)를 상징하는 가을은 늙음[老境]과 기운을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와 연계되어 이해되었다. 방위로는 서, 인물로는 서왕모(西王母), 오행으로는 금, 색으로는 백색, 예악에서는 예, 인의예지와 관련해서는 의(義)로 이해되었다. 짐승으로는 봄의 용(龍), 가을의 호랑이[虎]로서, 고택 대문의 좌문의 용자와 우문의 호자란 글자는 이런 점을 의미한다.
가을이 주는 맑은 기운은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지만 때론 북서풍과 같이 그 기운이 강할 때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죽이는 엄숙하고 살기가 있는 숙살(肅殺)의 기운으로 변하게 된다. 그같은 숙살의 기운을 담은 가을의 속성을 문예 차원에서 가장 잘 표현한 것은 구양수(歐陽脩, 1007~ 1072)의 「추성부(秋聲賦)」인데, 단원 김홍도는 그 「추성부」 내용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다.
▲ 金弘道, 〈秋聲賦圖〉, 55.8×214.7cm, 보물 제139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구양수의 「추성부」
중국문예사에는 이른바 당송팔대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있다. 당대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북송대의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정치가이면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는 구양수다. 구양수는 정치가, 시인, 문장가, 역사학자로서 자는 영숙(永叔),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다. 육일거사는 ‘장서일만권(藏書一萬卷), 금석유문 일천권(金石遺文 一千卷), 금일장(琴一張), 기일국(碁一局), 주일호(酒一壺)’ 다섯가지에 ‘자신[吾一翁]’을 더해 ‘육일’이라고 칭한 것이다.
구양수가 쓴 글 가운데 저주(滁州)에 귀양갔을 때 태수로 있으면서 스스로 취옹이라고 하면서 즐긴 즐거움을 읊은 「취옹정기(醉翁亭記)」도 유명하지만 최고작으로는 「추성부」를 꼽는다. 「추성부」는 구양수가 52세 때 쓴 문부(文賦) 형식의 작품으로 처량한 가을소리를 듣고 일어난 감회를 동자(童子)와 대화 형식을 빌려 표현한 것이다. 소식의 「적벽부(赤壁賦)」와 더불어 문부(文賦)를 대표한다. 주목할 것은 「추성부」의 내용에는 동양문화에서 이해한 가을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이해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 歐陽修 초상: 文忠이라는 諡號(시호)를 받았다. 1043년에 인종이 다시 范仲淹(범중엄) 등을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자 정적들이
朋黨(붕당)으로 몰면서 공격하였는데, 이에 구양수가 붕당에 대한 적극적인 논리를 전개한 「朋黨論」을 쓴다.
「추성부」 내용은 크게 다섯가지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구양수가 달과 별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고 사방에는 인적이 없는 정황에서 갑자기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 소리를 듣고서 그 바람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를 알아보는 내용이다.
구양자[=구양수]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 기울이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하길,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불어오는 서남쪽의 거센 바람이 일으킨 자연의 시끄러움과 어지러움의 정황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매우 생동감 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단락은 구양수가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소리가 가을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한걸음 더 나아가 구양수는 그 가을 바람 소리가 불어올 때 담긴 매서운 기운 때문에 쇠락하는 자연 정경을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은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며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서 볼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치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구양수는 봄과 여름을 거쳐 펼쳐진 푸르름이 주는 무성함, 울창함이 주는 미적인 자연 정경이 매서운 기운을 담은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누렇게 변하고 잎이 떨어지고 꺾이고 시드는 ‘추한 모습’을 보고 가을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철학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풀이한다.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陰)의 때요, 전쟁의 형상이요, 오행의 금(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音)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은 상심(傷心)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죽인다는 륙(戮)의 뜻으로,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게 되는 것이다.
구양수의 이상과 같은 가을이 갖는 다양한 풀이에서 주목할 것은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면 마땅히 죽은 것이란 사유다.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을 노자(老子)식으로 말하면, 천지불인(天地不仁) 차원의 기운이다. 노자는 가을을 인간의 처세와 관련하여 신퇴(身退)라는 용어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공을 이루면 몸을 물러나는 것이 자연의 도다[功遂身退, 天之道]’라고 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을이란 계절이 주는 ‘백발의 삶’, ‘주름진 삶’과 관련된 인생을 거부하느냐 그대로 수긍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紅顔)이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하건데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치고 있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恨)하는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명예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열정을 불태우면서 심신을 피곤하게 하는 삶을 산다. 따라서 가을이 주는 쇠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낙천지명(樂天知命)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자는 대답 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부추기는듯하다.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구양수가 이처럼 가을소리를 듣고 계신공구(戒愼恐懼)하면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동자가 대꾸하지 않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졸고 있다는 것은 이런 점을 상징한다. 물론 동자는 하루종일 행했던 집안일 때문에 피곤하였고 또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졸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구양수는 가을 이미지와 관련하여 소조담박(蕭條淡泊)이란 용어를 통해 탈속적이고 은일 지향적인 삶의 전형을 제시하여 동양문예론에 큰 틀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 김홍도, 〈추성부도〉 부분
3.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늘그막에 고요함과 적막감을 깨트리는 숙살의 기운을 품은 가을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는 구양수의 「추성부」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 왼쪽에 「추성부」 내용을 적으면서 ‘을축년동지후삼일(乙丑年冬至後三日) 단구사(丹邱寫)’라고 적은 것을 보면 1805년에 그렸다고 추정한다. 왼쪽 하늘에 보름달이 그려진 것을 보면 한밤이지만, 보름이기에 전반적으로 화면에 담긴 물체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별다른 나무가 없는 황량한 듯한 가을 산으로 둘러쌓인 공간 중간 부분에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에서도 볼 수 있는 ‘둥근 창[圓窓]’의 중국식 초옥이 있다. ‘원창’은 중국 정원을 가면 창 이외에도 들어가는 문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중국식 창이다. 따라서 중국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의 경우 창은 대부분 원창으로 그려진다. 좌우로 커튼을 걷어 올려 집안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가을밤 독서하기에 참 좋은 계절에 집 가운데에 관을 쓴 수염을 기른 인물이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추성부」를 쓴 구양수다. 지붕을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왼쪽의 허름한 공간에는 차를 끓이는 화로에 차주전자가 있다. 아마 구양수가 밤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차 한잔을 마실 예정이었던 것 같다. 「추성부」에서 말하고 있듯, 바람이 거세게 분다는 것은 집에서 기르는 학[혹은 두루미] 두 마리가 잠을 자지 않고 바람소리가 나는 북서쪽을 향해 목을 빼고 입을 벌린 상태에서 소리를 내는 듯한 형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화면에 그려진 세 개의 태호석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태호석도 학[두루미]들과 같이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서남쪽을 향한 듯한 형상이다.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화려하고 복잡한 도성 풍경보다는 한적함과 적막감이 감도는 산속 정경을 통해 「추성부」에서 말하는 서남쪽에서 바람이 불었을 때의 정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 安中植, 〈聲在樹間圖〉[「추성부」 한 글귀].
동자의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및 기울어진 대나무를 통해 서남풍을 잘 표현하고 있다.
4. 나오는 말
가을은 모든 것을 수렴한다는 의미와 가을이 올 때까지의 다양한 인생 경험의 쌓임이란 점에서 때론 인생의 주름, 자연의 주름이란 의미도 있다. 서정주는 가을 이미지를 ‘국화옆에서’ 라는 시에서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전개된 자연의 다양한 변화를 ‘봄의 소쩍새 울음[봄]’, ‘먹구름 속에서 천둥의 울음[여름]’, ‘간 밤에 저리 내린 무서리[가을]’ 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제 거울 앞에 선 누나의 눈가에도 주름이 서려 있다. 그 주름 형상은 추하지만 오랜 세월의 다양한 경험이 쌓인 ‘추한 주름’이라는 점에서 그 주름이 주는 지혜 및 메시지는 아무나 깨달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주름진 삶’을 상징하는 가을은 고담(枯淡)함의 미학, 물러남의 미학, 겸손함의 미학, 덜어냄의 미학을 의미하는데, 문인화에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을의 자연풍경이 자주 그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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