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와 율곡의 차이점(2)
순유(純儒)와 진유(眞儒)
- 562호
- 기사입력 2025.04.24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4944
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이전에 쓴 글에서 퇴계와 율곡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힌 적이 있다.[성균웹진, 동양철학산책 520호 참조.] 퇴계는 관료적 삶을 거부하고 도산으로 신퇴(身退)함으로써 비둔(肥遯)의 삶을 살았지만 율곡은 결과적으로 관료적 삶에 매인 결과 신퇴를 통한 비둔을 하지 못했다는 것과 퇴계가 철리시와 서정시 등 다양한 시가 많은 점에 비해 율곡은 퇴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시가 적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율곡도 퇴계처럼 50 대 이후의 삶을 살았으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는 가정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퇴계와 율곡이 유학자로서 후대에 어떻게 평가받았는가 하는 점을 순유(純儒)와 진유(眞儒)라는 용어에 초점을 맞춰 규명하고자 한다.
▲ 1000원짜리 지폐에 담긴 겸재 鄭敾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퇴계는 도산서당으로 가기 전에 계상서당에서 주자의 편지글을 읽고 그것을 이후 『朱子書節要』로 편찬한다.
2. 유학자에 대한 다양한 분류
유학자들은 한 인물을 분류할 때 학문, 인품, 처세 등을 감안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경우에는 순유(純儒), 진유(眞儒), 순유(醇儒), 준유(俊儒), 통유(通儒), 홍유(鴻儒), 대유(大儒) 등을 사용한다.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에는 소유(小儒), 속유(俗儒), 누유(陋儒) 등을 비롯하여 더 많은 용어가 있다. 수유(豎儒), 부유(腐儒), 비유(鄙儒), 구유(拘儒) 등은 주로 조롱할 때 쓴다. 도유(盜儒), 천유(賤儒), 이유(俚儒), 공유(空儒) 등은 배척할 때 쓴다. 도의 근본을 어기고 떠나면 벽유(僻儒)라고 한다. 이 가운데 부유(腐儒)의 경우는 두가지로 사용된다. 자신이 스스로 부유라고 하는 경우에는 겸칭에 속한다. 하지만 남에게 부유라는 표현을 하거나 듣는 경우에는 부정적인 것에 속한다.
중국 송대 이전 인물 가운데 유학자로 평가받았던 동중서(董仲舒)는 순유(醇儒), 정현(鄭玄)은 순유(純儒), 양웅(揚雄)을 대유라 일컬었다. 홍양호(洪良浩)는 한나라 가의(賈誼)가 경세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유(通儒)라 하는데, 정조(正祖)는 대유라고 한다. 송대에서는 진유라는 표현을 통해 송대 유학자를 규정한다.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 등을 진유로 꼽고, 그들에 의해 공맹(孔孟) 유학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장재(張載)는 순유(醇儒)라고 하여 정주(程朱)와 차별화하여 이해한다.
진유라는 표현은 조선조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유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조에 와서다. 윤근수(尹根壽) 문인인 조경(趙絅)은 순유와 진유를 통해 고려와 조선조의 유학자들을 비교 평가한다.
신라의 문창후(文昌侯:崔致遠), 홍유후(洪儒侯:薛聰)와 고려의 문헌공(文憲公:崔冲), 문성공(文成公:安裕[安珦])이 혹은 파천황으로 혹은 독행(篤行)으로 한 때 이름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순유(醇儒)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 아름다운 조선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성인이 일어나시어 진유(眞儒)의 무리가 나왔으니, 오천(烏川:鄭夢周))을 이어 계승한 자는 정암(靜庵:趙光祖)과 회재(晦齋:李彦迪)가 그 사람이다. 도산(陶山) 이선생(李先生:李滉)은 더욱 위대한 분이다.
조경이 평가한 조선조 이전 인물들 가운데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많은 것을 참조하면, 조경이 말한 진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된다.
3.조선조의 순유와 진유
조선조에 오면 정도전(鄭道傳),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 많은 인물들이 진유로 거론된다. 기대승(奇大升)은 통유로 본다. 순유(醇儒)는 독실한 자세[慥慥]를 견지하는 인물을 꼽는다. 이만부(李萬敷)는 동정(動靜)이 서로 함양되고 표리(表裏)가 서로 보탬이 되어 몸에 덕을 닦았기에 순유(醇儒)로 평가된다. 간혹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인물이라도 달리 일컬어지는 경우도 있다. 장유(張維)는 흔히 진유라고 일컬어지는 정몽주(鄭夢周)를 통유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유는 과연 어떤 인물상을 말하는 것일까? 율곡은 도학을 하는 선비를 진유(眞儒)라고 하는데, 진유에 대해 가장 정치하게 논한 인물은 허균(許筠)이다.
일찍이 보건대, 소위 진유(眞儒)란 세상에 쓰이게 되면 요(堯)·순(舜) 시대의 다스림과 우(禹), 탕(湯), 문(文), 무(武)의 공적이 사업에 나타난 것들이 이와 같았다. 쓰이지 못하더라도 공(孔), 맹(孟)의 가르침과 염(濂), 낙(洛), 관(關), 민(閩)의 학설을 책에 기록한 것들이 또 이와 같아서 비록 천만년이 지나도 이의(異議)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공적인 것[公]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許筠, 『惺所覆瓿稿』 卷之十一 「文部八:學論」(a074_228b), “蓋嘗見所謂眞儒者用於世。則唐虞之治。禹湯文武之功。著於事者如是。不用則孔孟之訓。濂洛關閩之說。載於書者又如是。雖經千萬世。而人無異議者。是無他。其志公也.”
허균은 진유의 속성을 종합적으로 공적인 것[公]을 지향하는 의지로 귀결하는데, 이것은 유가 선비라면 행해야 할 ‘명도구세(明道救世)’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균의 문집 『惺所覆瓿藁』와 시대를 앞서 간 허균 초상화. “나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를 꾸짖고 무리 지어 배척하니, 집에 찾아오는 벗이 없고 밖에 나가도 뜻에 맞는 곳이 전혀 없다.”
유학자에 대한 이같은 다양한 분류가 있는 가운데 주목할 것은 누구를 순유(純儒)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유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거의 적기 때문이다. 정조는 한림(翰林)에 조용히 깃들어 있으면 순유(純儒)라 하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치제문」에서 퇴계를 순유로 본다.
내가 전형을 생각하며(予懷典刑), 자나 깨나 순유를 잊지 못하여(寤寐純儒),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의 소차(疏箚)를 자세히 살피고(箚玩六條), 성학십도(聖學十圖) 병풍을 걸었다네(屛揭十圖), 도산도(陶山圖)를 그려 사모의 정성을 깃들인다.(繪居寓慕)
송시열(宋時烈)도 퇴계를 우리나라 최고의 순유로 보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은 『주자대전』에 대한 퇴계의 이해다.
대개 『주자대전』은 처음에 고려 말에 동쪽으로 왔고, 유신(儒臣) 정몽주(鄭夢周)가 제일 먼저 주창하고 존신(尊信)하여 세상의 가르침으로 삼은 것이 사서육경(四書六經)의 아래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의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우리나라 최고의 순유(純儒)인데, 오로지 이 책을 위주로 하여 한 구절 한 글자도 감히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송시열은 주희를 성인처럼 존숭한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볼 때 『주자대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었던 퇴계를 순유로 높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무오류적 진리 인식이란 담겨 있다. 율곡을 섬긴 송시열조차도 퇴계를 순유라고 규정하고, 왕인 정조가 퇴계를 순유로 규정한 것을 참조하면 조선조에서 퇴계를 순유로 보는 것에는 논란이 없는 것 같다. 퇴계를 순유라고 하지 않은 경우 ‘희대의 진유’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송시열 초상
퇴계 이외에 순유라고 거론된 인물은 율곡이다. 조익(趙翼)은 「증(贈) 영의정 이이(李珥)에게 사제(賜祭)한 글」에서 율곡을 거유(巨儒)라 하고 순유(純儒)라고도 한다. 조익이 율곡을 순유라고 한 평가는 주로 학문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조익이 율곡을 종주로 모시는 서인(西人)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순유라는 것이 그렇게 한정된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이상 본 바와 다양한 구분 방식은 유학자로 일컬어지는 한 인물을 학문, 처세, 인품 등을 통해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엄정함과 유학자로서의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런 점은 노장(老莊)과 차별화된 점을 보여준다. 노장은 전공한 인물들에게는 이런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노장의 경우에는 유가의 입장이나 불가의 입장에서 노장사상을 해석했는지 하는 해석 차이만을 거론할 뿐이다.
4. 퇴계가 ‘순유(純儒)’인 이유
퇴계가 순유로 평가받는 구체적인 것을 퇴계 사후 퇴계를 추숭한 글을 통해 살펴 보자. 조익은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에게 올린 제문」에서 퇴계의 학문과 추구한 삶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낙민(洛閩)의 학문을 이어받고서[學紹洛閩], 산림에 살지게 은둔하셨도다[遯肥山林] 趙翼, 浦渚集 卷之二十九 「牙山五賢書院祝文:祭退溪李文純公文」.
조익은 퇴계의 삶을 두가지로 압축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는 퇴계의 학문경향과 다른 하나는 퇴계의 처세다. 낙(洛)은 낙양(洛陽)에서 활동했던 북송대 정호와 정이의 학술사상을 말하고, 민(閩)은 민중(閩中)에서 활약했던 남송대 주희의 학술사상을 말한다. 퇴계는 흔히 정주이학(程朱理學)으로 불리운 학문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비둔이 상징하는 삶, 즉 세속적인 명리 추구에서 벗어나 도산에 신퇴한 다음 비둔적 삶 속에서 ‘그윽함[幽]’, ‘조용함[靜]’, ‘차가움[寒]’, ‘한가로움[閒]’, ‘맑음[淸]’, ‘숨음[隱]’ 등으로 상징되는 한거(閑居)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은 퇴계가 읊은 많은 시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퇴계가 肥遯의 삶을 살면서 후학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정경.
퇴계는 처세와 관련된 행동거지는 항상 도(道)와 의(義)를 기준으로 하여 처세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퇴계의 처세는 때론 현실을 도피한 ‘산새[山禽]’ 같다고 비판 당하기도 하였지만,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고 시속에 휩쓸리지 않고자 한 것은 이후 유학자들의 처세의 전범이 되었다. 퇴계의 덕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이식(李植)은 퇴계가 학자들을 인도하여 가르침을 펼치는 정황에 대해 마치 의사가 환자의 아픈 곳을 꼭 집어 치유하듯이 핵심을 집어서 가르치고 또 어떤 질문에도 다 답하는 학문의 정밀성과 광범위성에 대해 말하고, 결과적으로 이같은 피교육자를 위한 퇴계의 교육 방식을 퇴계 덕성의 심후함으로 귀결짓고 있다. 덕성의 심후함은 인품의 온화함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학식, 인품, 처세에서 모범이 된 삶을 살았던 퇴계는 이후 순유로 일컬어지게 된다.
5. 나오는 말
조선조 유학사에서 순유(純儒)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인물은 퇴계로서, 이후 퇴계는 이후 한국 유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자리매김된다. 상대적으로 율곡은 진유로 이해되었다.
다만 문제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순(純)’ 자에 담긴 순수부잡성은 때론 그것이 지나칠 때 순수성의 악마로 변질 될 수 있고, 아울러 학문의 배타성과 편협성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도 있다는 것이다. 퇴계가 순유로 평가받는 내용을 이기론 측면에서 접근하면 주리(主理)적 사유와 관련이 있는데, 퇴계가 유학을 리(理)로 보고 노장을 기(氣)로 보면서 결과적으로 이귀기천(理貴氣賤)의 이단관을 전개한 것은 이런 싹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퇴계 본인은 제한적인 점이 있었지만, 후대 퇴계를 존숭했던 많은 후학[예를 들면 영남학파]들은 비퇴계적 학문 경향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배척했던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급기야 율곡을 이단시하기도 한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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