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流配[귀양])가 주는 축복
- 570호
- 기사입력 2025.09.01
- 편집 성유진 기자
- 조회수 3127
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천하의 재자들은 반이 유배인이다[天下才子半流人].”
이상은 동양 문인사대부 문화권에서 흔히 회자되는 말인데, 동양 역사와 정치 상황, 더 나아가 학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유배 문화다.
선비가 처음 조정에 섰을 때에는 명예와 절조를 먼저 힘쓰되, 반드시 유배되고 감옥에 갇힐 것을 각오하여야 그 뒤에 수립해 놓은 것이 볼만한 게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뜻을 두고 있는 것은 오로지 좋은 수레와 귀한 벼슬에만 있으니, 그래서 쇠퇴하고 비천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이 평범한 것이다. *
정조가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당시 무기력한 삶을 사는 선비[사대부]들에 대해 일갈한 것이다. 정조가 유배 가고 감옥에 가는 것을 마다않고 과감하게 자신의 소신을 펼치면 뭔가 평가받을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정조가 만약 유배 경험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유배 가는 인물들이 대부분 강한 성향이 있는 인물들이기에 유배가 주는 육체적 고통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언제 유배가 풀릴지 모르는 정황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 이런 정황에서 유배 간 인물들은 주로 독서를 하거나 저술 활동을 통해 힘든 시간을 견디는 경우가 많다. 쓴맛을 본 유배가 풀린 해배(解配) 이후에는 많은 인물들이 정치판에서 떠나 은일(隱逸) 지향적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 正祖, 『弘齋全書』 卷百七十七 「日得錄十七 : 訓語四」
2. 유배가 주는 역설
과거 봉건사회에서 유배는 훈장처럼 여겨진 역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죄를 범해서 유배를 당하는가? 조선조에서는 오늘날 사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흉악한 범죄보다는 주로 가변적인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경우가 많다. 조선조 후기에는 당파성에 따른 권력 투쟁의 결과 유배를 가는 인물이 많아진다. 유배를 당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한 당파를 이끌어가는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면서 학자다.
많은 인물들이 유배를 당했지만 철학과 문예 차원의 대표적인 것을 거론하면,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전라도 강진에 18년 유배된 것과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圍籬安置]된 것을 들 수 있다. 개혁정치를 부르짖은 조광조(趙光祖), 조선의 천재인 허균(許筠), 서로 간에 치열하게 철학적 논쟁을 벌인 윤휴(尹鑴)와 서인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 등은 유배 중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 尹鑴와 宋時烈 초상. 윤휴는 송시열과 친구였으나 윤휴가 朱子 성리학에 대한 의문과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禮訟 논쟁의 과정에서 송시열과 원수가 된다. 두 인물 다 유배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다.
역모죄 혹은 대역죄(大逆罪) 등과 같이 왕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큰 죄를 짓지 않은 경우 대부분 유배는 풀린다. 다만 유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정황에서 왕의 특별한 사면(赦免)이나 소환(召還) 명령만을 기다려야 한다. 유배 기간에 조광조처럼 사약을 받고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유배지는 대개 교통이 아주 불편하고 사는 환경이 열악한 섬이나 오지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인물들이 유배를 간 경우 유배 지역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란 역설이 존재한다. 귀양 온 사람들이 다시 벼슬할 확률이 높을수록 현지의 대우도 좋았는데, 유명 정치가, 학자 혹은 예술가가 유배 간 지역은 학문과 문화 차원에서 엄청난 수혜를 받는다.
소론 일파의 역모 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 간 김정희 이전의 최고 서예가였던 이광사(李匡師)에게 유배지의 많은 사람들이 글씨를 얻으려고 혹은 배우려고 몰려든다. 이에 조정에서 이런 정황을 문제 삼아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시켜 버린다. 정약용의 수제자로 알려진 시인 황상(黃裳)도 정약용 유배의 문화적 수혜자다.
3. 유배와 학문
유배를 가는 인물들의 보따리에는 『장자(莊子)』가 있다는 말이 있다. 장자가 세속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마음을 자연에서 마음껏 노니라고 한 철학은 힘든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하는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배를 간 인물들은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가 마음의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그 육신을 피곤케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한다. 그가 하려는 바를 힘들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음을 쓰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성품을 기르고, 불가능하다던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키우기 위함이다.[『孟子』「告子章句下」]
하늘이 자신이 큰 인물이 되기 위한 시련을 준 것으로 생각하면 힘든 유배 생활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저술하라는 시간을 준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음먹기에 따라 유배는 축복(?)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많은 인물들은 유배 기간 동안 역사에 남는 많은 저술을 남긴다. 정약용이 1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사서육경에 대한 연구,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 牧民心書와 欽欽新書]로 말해지는 경세학 저술 등 500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저술한 것이 그 예다. 음악 분야[樂書孤存], 풍수 분야[風水集義] 등과 같이 철학 쪽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의 저술과 자료 모음이 가능한 것도 유배가 준 넉넉한 시간 덕분이다.
도가철학 쪽에서는 서명응(徐命膺)이 『노자』에 대한 주석서인 『도덕지귀(道德指歸)』를 완성한 것을 들 수 있다. 서명응이 1777년[정조 1년] 겨울에 염주(鹽州: 甲山府로 추정)에 귀향을 갔는데 아들 서호수(徐浩修)가 귀양 중 소요거리로 삼으라고 궤짝 안에 넣어둔 기존에『노자』를 주해한 것[도덕지귀 초고]을 찾게 된다. 이에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손수 책을 펼치는 동안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점들을 보게 되고, 마음속에서 깨친 말들이 나날이 더욱 많아지게 됨에 따라 다시 한번 꼼꼼히 정리한 『도덕경해(道德經解)= 道德指歸』를 완성한다. **
** 관련된 자세한 것은 徐命膺, 『道德指歸後序』 참조.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벽파(僻派)로서 활약하고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한 서명응의 인생이 녹아 있는 이 책은 태극음양론을 통한 노자사상 이해라는 점에서 조선조 유학자들의 ‘유학의 입장에서 『노자』를 해석한 것[以儒釋老]’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덕지귀』는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조선조 주자학 중심주의 학문 풍토를 감안하면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이처럼 유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저술이 탄생하는 역설이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서명응이 갑산부(甲山府)로 유배당한 뒤 평생소원인 백두산에 오른다. 얼마 있다가 해배되자 주위 사람들이 서명응이 유배된 것은 백두산을 견문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라며 부러워했다. 조선시대 문인사대부들 가운데 백두산에 오른 인물이 얼마나 될까? 문인사대부들이 언제 넘실거리는 바다를 배타는 경험을 할까? 오지, 벽지, 섬으로 가는 유배 때 가능하다.
4. 유배와 서화(書畵)
유배가 준 긍정적인 점에 관해 예술 쪽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유배가 서화 창작에 준 영향은 이광사와 김정희 및 조희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지도로 이배(移配)를 당한 이광사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오랜 유배 기간 동안에 서예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작성하여 자신의 서예 창작의 근거를 제시한다. 아울러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중국에서 발간된 많은 서예이론서를 감안하면, 이광사의 『서결』은 한국서예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보여준 역저다. 물론 이광사의 필획에도 힘든 유배적 삶이 배어 있다.
▲「五友歌」로 유명한 孤山 尹善道는 宋時烈과 갈등을 비롯한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낸다.
말년에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대단히 험한 벽지(僻地)인 ‘山水’ 유배지에서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이같은 유배의 결과물이다.
위리안치를 당해 행동에 제약을 받은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기간 어떤 생각을 하면서 막막한 시간을 견뎠을까? 추사는 그래도 서울에 있는 권돈인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힘든 유배 생활을 토로하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 또 인편으로 보고 싶은 책도 보내달라 하고, 이상적이 염량(炎涼) 세태를 무시하고 찾아온 것에 감격하여 〈세한도〉도 그려주는 등 타인의 유배와 좀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유배는 유배다.
김정희 유배 생활이 끼친 예술 창작 관련성을 보자. 김정희는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은 파도에 넘실대는 망망한 바다였을 것이고, 몸에 부딪히는 것은 강하게 불어오는 해풍인 이같은 자연환경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제주도 유배 이후 수경(瘦勁)하면서도 때론 너울거리는 듯 변화무쌍한, 기이한 맛이 있는 글씨 형상에 표현된 거친 야일(野逸)풍 기세는 거센 해풍이 몰아치던 제주도의 자연환경 그 자체는 아닐까?
김정희 자신의 일생이 오롯이 담겨 있는 〈불이선란도〉의 서체와 난의 형상은 이런 맛이 있다. 언제 왕의 윤음(綸音)을 듣고 위리안치의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암담한 시절, 그 암담함 현실에 굴하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삶이 꼿꼿이 치켜오른 꽃대와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맞서 꽃을 피운 형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닌가 한다. 신지도와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이광사와 김정희의 서체가 다른 듯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작품 모두 따사로운 봄바람보다는 차갑게 부는 가을바람을 연상시키는 서체 형상이 그들의 힘든 유배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도판참조]
▲ (왼쪽) 김정희, 〈不二禪蘭圖〉(오른쪽) 李匡師 글씨. 權常侍, 「題山寺」 : 萬葉風聲利, 一山秋氣寒, 曉霜浮碧瓦, 落日度朱欄
사실 여부의 논란은 있지만 흔히 김정희의 수제자로 알려진 조희룡(趙熙龍)은 임자도에서 19개월 동안의 유배 생활을 한다. 조희룡은 유배지에서 접한 자연 정경을 「화구암란묵(畵鷗盦讕墨)」으로 정리한다. 조희룡은 한국예술사에서 누구보다도 노장철학을 예술 차원으로 승화한 인물인데, 유배 경험이 도리어 문화적 활력소로 기능한 역설을 보여준 예다. 화제(畵題) 관련하여 한국회화의 자존심을 살려준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저술도 유배와 무관하지 않다.
▲ 趙熙龍, 〈慰勞人蘭〉. 鄭燮[板橋]를 좋아했고 조희룡이 그린 난 그림과 화제다.
화제는 정섭의 시를 쓴 것인데, 몇 글자 출입이 있다.
“忽得十日五日之暇, 對芳蘭, 啜苦茗. 時有微風細雨, 潤澤于疎籬仄徑之間, 俗客不來, 良友輒至, 適然自驚今日之難得.
凡畵蘭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5. 나오는 말
돌이켜보면 정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유배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닌 경우에 정약용, 김정희 등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삼불후(三不朽) 가운데 일종의 입언(立言) 혹은 입예(立藝) 차원의 결과물을 남겼으니 말이다.
蛇足 : 퇴계 이황은 유배는 아니지만 신퇴(身退)를 내걸고 도산으로 간다. 이후 많은 저술을 남기고 70세로 생을 마감한다. 상대적으로 천재로 알려진 율곡 이이는 정치권에서 치열하게 다투다가 49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이가 혹 짧은 기간만이라도 유배를 갔다면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 유배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동양 지식인의 속살을 이해하는 관건 중 하나다.
| No. | 제목 | 등록일 | 조회 |
|---|---|---|---|
| 84 | 592호 ‘휘파람 소리[嘯]’에 담긴 저항과 은일의 미학 | 2026-08-04 | 281 |
| 83 | 591호 허균(許筠)의 인재 등용 평등성과 월드컵 유감 | 2026-07-15 | 475 |
| 82 | 590호 문예군주 정조(正祖) 대왕 : 『일득록(日得錄)』 | 2026-06-30 | 972 |
| 81 | 589호 퇴계와 율곡의 차이: 퇴계 이황의 야성(野性) | 2026-06-15 | 1771 |
| 80 | 588호 박능생: ‘신이형미도(新以形媚道)’의 도시산수 | 2026-05-26 | 1264 |
| 79 | 587호 조선조 당파성과 노장사상 이해 다양성 | 2026-05-14 | 1695 |
| 78 | 586호 이름 없는 꽃[無名花]과 노장철학 | 2026-05-04 | 2154 |
| 77 | 585호 꽃을 보는 시선에 담긴 철학(2) : 정선(鄭敾) <간화삼매경도(看花三昧境圖)> | 2026-04-14 | 2167 |
| 76 | 584호 꽃을 보는 시선에 담긴 철학(1): 정선(鄭敾) <간화삼매경도(看花三昧境圖)> | 2026-03-31 | 2405 |
| 75 | 583호 신선(神仙)이 된 공자(孔子) | 2026-03-13 | 26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