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군주 정조(正祖) 대왕 : 『일득록(日得錄)』
- 590호
- 기사입력 2026.06.30
- 편집 성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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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문예 차원[서예와 회화 포함]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 어떤 군주보다도 학문적 깊이가 깊었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왕은 조선 후기 문화와 정치가 찬란하게 꽃핀, 이른바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개명군주(開明君主)로 평가된다. 물론 문체반정(文體反正)과 서체반정(書體反正)을 통해 조선 후기 역동적으로 피어나던 자유로운 사상, 근대적 문학, 개성 있는 예술적 시도들을 ‘성리학적[朱子學的] 명분론’이라는 감옥에 다시 가두어버린 ‘보수적 문화 정책’을 펼쳤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부정적인 평가는 정조의 문예 차원의 ‘속살’에 해당하는 저서인 『일득록(日得錄)』 「문학」 부분을 보면 상당 부분 희석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선원보감(璿源寶鑑)에 실린 정조 초상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정조의 실질적인 御眞은 하나도 없다.
2. 『장자』 「소요유(逍遙遊)」 애독
‘날마다 얻은 깨달음을 기록하여 스스로를 수양하고 이를 통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 군주의 학문적 기록’인 『일득록』은 문예 차원에서 볼 때 군주로서의 정조보다는 학자로서 어떠한 학문적·정신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조 유학사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주로서는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사유와 발언들에 주목하여, 몇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상이 이르기를, “제자백가의 문장 중에서는 『장자』가 가장 훌륭하다. 내가 어려서 이 책을 꽤 여러 번 읽었는데, 책을 보다가 답답한 기분이 들 때마다 「소요유」를 펴서 한 번 읽고 나면 가슴속이 상쾌해져서 한점의 연기나 먼지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했다.
정조가 어려서 『장자』를 많이 읽었고 특히 「소요유」를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어린 시절,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정치적 정황 때문에 읽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차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 추측건대 왕이 된 이후에도 『장자』를 많이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조선조 유학자들이 문예 차원에서는 『장자』를 무조건 비판한 것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처럼 공개적으로 『장자』의 문장을 칭찬하는 것은 매우 드문데, 이것은 정조가 문예 차원에서 『장자』 문장의 탁월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읽힌다.
▲ 王守仁, 초상
3. 왕수인(王守仁[王陽明])의 문장 칭찬
조선조 역사에서 철학 차원에서 주로 이단으로 여겨진 왕수인의 문장을 좋다고 평가하는 것도 아마 정조가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학자가 아닌 군주의 위치에서 말이다.
양명은 학술이 비록 틀리긴 했지만, 문장은 매우 좋다.
명나라 3백 년 동안 많은 작자가 나왔어도 훌륭한 문장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꼽자면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이 가장 나을 것이다.
도문일치(道文一致) 관점에서 본다면, 양명은 학술이 비록 틀리긴 했지만, 문장은 매우 좋다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양명의 학술이 ‘틀렸다[양명 학술을 이단으로 여김]’라고 하는 사유를 문장에 적용하면, 그의 내면과 사상은 도(道)에서 벗어난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장이 ‘매우 좋다’고 인정하는 순간, 사상은 틀렸어도 문예 차원의 성취는 뛰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문장은 도에서부터 나온다[文從道出]’라는 주희(朱熹)가 주장한 도문론 차원에서 본다면 이른바 도문분리(道文分離) 차원에 속하는 이같은 정조의 발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황이 양명학을 비판한 이후 조선조에서 영남학파 대부분의 인물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한 정황을 감안하면, 정조가 명대라는 시대와 문장에 한하지만, 왕양명[왕수인]을 높인 것은 파격적이다. 문장과 철학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발언의 숨은 뜻은 정조가 왕수인 문장에 담긴 호걸스러운 풍조와 창의적 광자정신 등을 높이 평가하고 말한 것이라 본다. 정조가 양명의 어떤 문장을 보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마도 왕양명이 바람직한 군자상을 대나무에 빗대어 쓴 「군자정기(君子亭記)」, 청대 오초재(吳楚才)와 오조후(吳調侯)가 편찬한 『고문관지(古文觀止)』에 수록된 「존경각기(尊經閣記)」, 「상사기(象祠記)」와 같은 글을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추측을 해본다.
4. 호걸풍 선비 남명(南冥) 조식(曹植) 존숭
정조의 독특한 인물 평가는 남명 조식에 대한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그의 언론과 풍채는 사람을 용동(聳動) 시키는 점이 많았다. 그의 문집 중 한 편의 상소에 대해서는 대성인이 수용해 주시는 국량으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차 간절히 불러 다스리는 도를 묻고 예우를 융숭히 했다. 아, 성대하도다. 대저 그의 학문은 기상을 숭상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해 병폐가 적지 않았다. 말단의 폐해로는 심지어 정인홍(鄭仁弘)이 있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순경(荀卿)의 문하에 이사(李斯)가 나온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영남에서 절의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평가는 남명 조식(1501~1572)의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식이 조선 사림사에서 매우 드문 거목이었으며, 그의 공적은 한계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역사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조식의 대표적 제자인 정인홍이 북인의 영수가 된 후 강경한 당파 정치를 펼치고 이언적·이황을 비판하여 서인과 남인의 큰 반감을 샀고, 결국 ‘스승[조식]이 그러했으니 제자도 저렇다’라는 식의 비판이 조식에게까지 쏠렸던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조식을 ‘호걸스러운 인물’로 평가하며 영남의 절의(節義) 있는 선비들은 모두 조식 덕분에 배출되었다고 극찬한 것은 영남학파 주류들이 조식이 노장사상에 물들었다고 폄하하던 견해와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평가에 해당한다. 이러한 발언은 당시 조식과 같은 호걸풍의 인물이 부재한 현실에 대한 정조의 아쉬움과 바람을 투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5. 도교 인물인 정렴(鄭磏)의 자품(資品) 칭찬
조선조 유학사를 살펴보면, 유학자가 노장사상에 심취한 경우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도교에 깊이 심취한 경우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는 노장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차원에서 유학과 일정한 대화 가능성을 지닌 반면, 도교 신앙은 개인의 장생과 신선술, 기복적 수행 등에 치우쳐 사회적 윤리와 공적 질서를 중시하는 유가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도교에 심취하는 것은 개인의 수행과 구복에 머무는 경향이 강하여 유학자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실천을 저버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정조의 견해는 달랐다.
북창(北窓) 정렴(鄭磏)은 원래 이인(異人)으로 학문을 통해 인격을 이루었다. 삼교와 구류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자품이 대단히 뛰어났다. 문장 또한 맑고 새로웠으며 전혀 세속적인 기미가 없어 계곡(谿谷[張維])의 이른바 ‘일민(逸民)으로서 권도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 그의 아우 고옥(古玉: 鄭碏) 역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했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시 읊기를 좋아했으니 북창과 난형난제라고 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조식에 대한 평가는 그가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정조가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정렴과 동생인 정작에 대해 내린 평가는 유가사상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야 하는 군주의 언급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것에 속한다.
정조가 조선조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정렴의 학문과 인품, 문장을 적극적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를 ‘일민’으로 추숭한 것, 아우 정작까지 높이 평가한 것은 일반적으로 도교를 이단으로 경계하던 조선 성리학의 지배적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다. 특히 군주로서는 삼가야 할 발언에 속하는데, 정조의 학문관과 인재관이 유교의 정통성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6. 나오는 말
정조의 『일득록(日得錄)』과 제목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는 저서는 『논어』 「자장(子張)」의 “날마다 알지 못했던 바를 안다[日知其所亡]”라는 구절을 전거로 삼은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이다. 『일지록』에서 ‘지(知)’는 학문이란 고정된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매일 새로운 사실을 탐구하고 기존의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역동적 과정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는데, 고염무가 추구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 정신과 궤를 같이한다.
반면, 정조의 『일득록』에서 ‘득(得)’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학문적 성찰을 통해 이치[理]를 체득하고 통치 원리를 확보하는 외왕(外王)의 실천을 의미한다. 군주인 정조에게 학문이란 독서와 강론, 군신 간의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깨달음을 수확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득’, 지적 축적은 도덕적 수양과 정치적 판단력의 완성과 연결된다. 경연(經筵)을 통해 성현의 도를 체득하고 이를 치세 차원에 구현하려 한 정조의 성학(聖學)적 실천이 ‘일득’이란 용어에 집약되어 있다. 군주[정조]와 학자[고염무]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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