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성인(聖人)’께 보내는 편지!

‘노자(老子) 성인(聖人)’께 보내는 편지!

  • 593호
  • 기사입력 2026.08.13
  • 편집 성유진 기자
  • 조회수 769

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존경하는 노자 어르신, 아니 성인(聖人)이시여!

계시는 하늘나라는 덥거나 춥지 않고 편안하신지요? 요즘 세상에는 넉넉한 돈만 있다면 에어컨과 히터 덕분에 지구상에서도 하늘나라 못지않게 편히 지낼 수 있답니다. 하지만 제가 어르신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까닭은 바로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셨다는 점입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어르신께서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상징하듯 늘 다투지 않는 삶[不爭]을 강조하셨는데, 서로 다툴 일조차 없는 하늘나라에서 신선으로 지내시는 일이 혹 지루하지는 않으신지요? 아, 조금은 지루하시다고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일없음을 일삼고[事無事]’, ‘맛없음을 맛보라[味無味]’ 하신 말씀도 하루 이틀이지, 하늘나라에서 2,500년 동안 매일 같이 그런 삶만 이어오셨으니 아무리 성인이라 한들 어찌 무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살다 보면 무미한 차 한 잔보다 때로는 혀끝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진한 커피 한 잔도 그리운 법이니 말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장황한 편지를 올리는 까닭은, 하늘나라의 무료함을 단번에 날려 버릴 만한 흥미진진한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르신께서 낙양(洛陽)을 떠나 은둔하고자 함곡관(函谷關)을 지나실 때, 관령 윤희(尹喜)의 간청에 못 이겨 남기셨던 5천여 자의 말씀(훗날의 『노자도덕경』)을 기억하시겠지요. 그 글을 두고 후대의 인물들이 저마다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 온 야사를 들으신다면 적잖이 재미있으실 겁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허허 웃음이 터지실 테고, 어떤 대목에서는 잠결에 벌떡 일어나 “이런 터무니없는 인간들을 보았나!” 하고 호통을 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간에 얽힌 기막힌 사정들을 차근차근 아뢰어 보겠습니다.


▲ 葛洪, 『神仙傳』 「老子」조에서 노자의 외모에 대해 “老子黃白色,美眉,廣顙,長耳,大目,疏齒,方口,厚唇;額有三五達理,日角月懸;鼻純骨雙柱,耳有三漏門”[노자는 누르스름하고 흰 안색이며, 눈썹이 아름답고 이마가 넓으며, 귀가 길고 눈이 크며, 치아가 성기고 입이 네모나며 입술이 두꺼웠다. 

이마에는 三五의 達理가 있었고, 日角과 月懸이 있었으며, 코에는 순수한 뼈로 된 두 기둥이 있고, 귀에는 세 개의 漏門이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 후대의 노자사상 이해

존경하는 노자 어르신!

혹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호학(好學)’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던 노나라 곡부의 공구(孔丘: 孔子)께서 어르신을 찾아와 예(禮)를 물었던 그날의 일을 말입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나온 공구께서 “내가 오늘 노자를 뵈었는데, 그분은 정녕 용과 같은 존재였다[[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라며 탄복을 금치 못했지요. ‘배움이란 날마다 더하는 것[爲學日益]’이라 여기며 현실의 형이하적 세계(有·下學處)에 매진하던 공구께서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爲道日損]’이라는 어르신의 경지와 형이상학적 무(無·上達處)의 사유 앞에 깊이 매료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전국시대에는 장주[莊周: 莊子]라는 인물이 나타나 「소요유(逍遙遊)」에서 붕(鵬)의 비상을 통해 분별지에 얽매인 소지(小知)를 넘어 대지(大知)의 세계를 이야기했고, 「제물론(齊物論)」에서는 만물은 본래 한결같이 평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사유를 펼쳤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어르신께서도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훗날 위진(魏晉) 시대에는 왕필(王弼)이라는 젊은 천재가 등장하여 어르신의 사상을 ‘무(無)를 근본으로 삼는 것[以無爲本: 貴無論]’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후한(後漢) 말기에는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저술한 인물[五斗米道의 지도자 張陵 혹은 張魯로 추정]이 등장하여,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도를 절대자로 규정하고 이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도는 인격과 주재성, 의지와 절대성을 지닌 존재로 탈바꿈하였고, 어르신은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격화되기도 합니다. 유약겸하(柔弱謙下)를 강조하시며 스스로의 잘난 것을 드러내는 것을 늘 경계하셨던[和光同塵] 어르신께는 어쩌면 가장 바라지 않으셨을 일들이 벌어진 셈입니다.
‘함부로 이름 붙여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고 위계(位階)화시키지 말라’ 하셨던 어르신의 말씀이 후대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때로는 변질되어 왔는지를 지켜보시는 일, 어쩌면 그것이 천상에 계신 어르신의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송대 유학자들의 노자 비판 : 주희(朱熹)

앞서 언급한 이들은 그나마 수긍할 구석이라도 있겠으나, 지금부터 말씀드릴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르신께서 그 한계를 명확히 짚어주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남송대 주희(朱熹: 朱子)는 어르신의 여러 말씀 가운데 특히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는 구절을 문제 삼았습니다. 주희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역에는 태극이 있는데,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는 사유에 담긴 이진법적 질서를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로 여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음양이라는 두 기운(二)이 서로 어우러져 충기(沖氣)라는 새로운 기운(三)을 낳는다는 뜻인 ‘이생삼(二生三)’은 주희의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진법에서는 시/비, 선/악, 미/추가 분명하게 갈라지는데, 삼진법이 되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또 다른 기운[冲氣: 三]’이 개입하게 되면 그 분별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점[어르신은 이런 점을 玄同이라 하기도 하셨습니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희는 불경스럽게도 어르신께서 우주의 생성 원리를 잘못 이해하셨다면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아울러 송대의 유학자들은 어르신의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는 구절 역시 크게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유생어무’의 ‘무’를 한낱 아무것도 없는 허무[空無]로 단정 지은 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데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생겨날 수 있는가?”라며 쏘아붙였지요. 그들이 내세운 대안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이미 ‘리(理)’가 존재했다는 논리였습니다. 주희는 ‘소리도 냄새도 없다[無聲無臭]’는 리를 비록 감각할 수는 없으나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라 보았고, 이를 ‘형체는 없으나 이치는 존재하는 것[無形而有理]’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지극한 상태로 존재하는 유(至有)’라 규정했습니다. 결국 송대 유학은 ‘지극한 상태로 존재하는 유[至有]에서 유가 생겨난다’는 존재론을 세우며 어르신의 ‘유생어무’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조선의 퇴계 이황마저 어르신을 향해 “리를 모른다”라며 단정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어르신께서는 ‘유생어무’의 ‘무’는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헛된 공무(空無)가 아닌데 하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쯤 되니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어르신께서도 그들의 헛된 오해를 두고 이제는 한 말씀쯤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 하지만 제가 잠시 어르신의 가르침을 잊었던 모양입니다. 애초에 시비를 다투고 분별하는 일에 매이지 말라 하셨거늘, 괜스레 덧없는 시비를 가려달라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하잘것없는 미물의 어리석은 청이라 여기시고, 부디 허허로이 웃어넘겨 주시길 바랍니다.


▲ 鄭敾, 〈靑牛出關圖〉. 老子가 靑牛를 타고 函谷關을 지날 때 關門의 長인 尹喜가 노자를 알아보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



4. ‘성인’으로서 노자

그러고 보니 저[曺某]라는 자가 주제넘게 제 말만 늘어놓느라, 어르신께서 자신을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것마저 탐탁지 않게 여기실 수 있다는 점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르신을 성인으로 깍듯이 모시는 일만큼은 부디 묵인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인류에게 풍요로운 먹거리를 베풀어 준 분이라면 누구든 성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어르신께서는 “마음을 비워 욕망을 덜어내고, 배를 채워 생명을 기르라[虛心實腹]”고 말씀하셨지요. 그 가르침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몸을 살찌우는 양식은 물론, 영혼을 지탱하는 정신의 먹거리까지 얻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성인’이라 부르는 것을 어르신께서 못마땅해하신다 한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그리 부를 작정입니다. 저 역시 어르신이라는 성인의 말씀으로 삶을 이어가는 유약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신 노자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일찍이 “참으로 (무위자연의) 도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 가르침에 감히 딴죽을 걸고 나선 인물이 있었습니다. 꽃등심의 매끄러운 기름결 같은 피부를 뜻하는 ‘응지(凝脂)미인’으로 양귀비[楊玉環]를 칭송하고, 그녀의 애달픈 죽음을 「장한가(長恨歌)」로 읊었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독노자(讀老子)」라는 시에서 어르신의 이 말씀을 정면으로 걸고넘어졌습니다. 감히 성인의 가르침에 태클을 걸었던 그의 시 한 구절을 끝으로, 이만 긴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言者不知知者默 : 말하는 이는 알지 못하고, 참으로 아는 이는 말이 없다 하네.
此語吾聞於老君 : 이 말씀을 나는 노군(老君: 노자)께 들었다네.
若道老君是知者 : 정녕 노군께서 도를 아신 분이라 한다면,
緣何自著五千言 : 어찌하여 몸소 오천여 자의 말씀을 남기셨단 말인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曺某] 역시 어르신께서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을 그토록 강조하셨으면서도 어째서 스스로 ‘오천언(五千言: 道德經)’이라는 글을 남기셨는지, 여전히 그 까닭에 대한 궁금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5. 나오는 말

 어르신께서는 “말[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되면서 참다운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본다[『老子』 47장,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떠올리다 보면, 혹 어르신께서는 오늘날 AI 시대의 도래까지도 이미 헤아리시며, 이 세상에는 언어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되었든 어르신께서 짧은 말씀으로 남기신 ‘5천여 자[道德經]’는 오늘날까지도 인류에게 깊은 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하오나, 어르신께서 “예절을 하나하나 따지는 것은 진정성과 신뢰가 옅어졌음을 뜻하며, 혼란의 시작이다[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만 줄이려 합니다. 하여 ‘나머지는 예를 갖추지 않습니다[여불비례(餘不備禮)]!


* 덧붙이는 글(PS): 장자는 편리한 기계를 운용하고자 하는 마음인 ‘기심(機心)’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요즘 지구에는 AI라는 신기한 기술이 등장하여 거친 문장을 말끔하게 윤문해 주곤 합니다. 성인께 올리는 이 편지글 역시 AI의 손길을 거친 덕분에 한층 윤택하고 매끄러운 글귀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술로 문장을 다듬는 세상이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