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문인의 예술론과 구별짓기[Distinction] Ⅱ

  • 472호
  • 기사입력 2021.07.27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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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위 그림 설명 : 보물 1054 호, 백자병(白磁甁)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한 기물들을 모은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기물들은 대부분 백자다. 궁중에서 어떤 기물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종친은 물론 사대부들에게 지대한 관심사였고, 이런 관심사는 특히 백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동양의 ‘문명화 과정’과 아(雅) 문화를 상징하는 백자는 단순 실용적 차원의 기물이 아니라 왕실의 권위와 신분 차별을 상징하는 기물이었고, 아울러 동양 문인들의 철학과 미학이 표현된 기물이었다. 즉 ‘마음의 자기[心磁]’이면서 타인과 구별하는 인문기물(人文器物)이었다.]



♠ 개인과 집단에 나타난 구별짓기


동양의 문인문화와 예술에 나타난 구별짓기는 개인과 집단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먼저 개인 측면에서 이런 구별짓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동양 문인들이 보낸 하루의 삶을 통해 살펴보자. 샘물을 길러 물을 품평하면서 차를 한잔 마시고, 독서를 하고, 금(琴)을 타고, 바둑을 두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강희안(姜希顏)이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말하듯이 정원의 꽃과 나무도 선택적으로 심고 감상한다. 때론 산수공간에서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쇄락적 삶을 즐기거나 강과 호수에 일엽편주를 띄운 채 고기보다는 세월을 낚는 탈속 지향의 은일적 삶과 정취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개인적 공간과 산수공간에서 삶이 보여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정취 및 심미적 취향에는 일종의 구별짓기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자신의 흥취를 표현하고, 경제적 상황과 관련없이 묵희(墨戱) 차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을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한 경지로 이해하고, 악기를 연주[특히 禁]하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학문적, 예술적 역량은 물론 경제적 역량이 동시에 갖추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같은 예술행위에 나타난 구별짓기에는 결국 ‘나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타인에게 보임과 동시에 타인에게 자신을 평가받는다는 사유가 동시에 담겨 있다. 이런 점은 동양예술에서의 구별짓기가 갖는 특징을 보여준다.


집단적 차원에서 보면, 정치적 측면, 철학적 측면, 종교적 측면에서 강조된 도통론(道統論)과 법통론(法統論)이 예술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철학사와 정치사를 보면 도통론은 치통론(治統論)으로 연결되어 정치적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특히 청대 건륭시대에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조선조의 경우 도통론이 때론 학통론(學統論)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집단적 차원에서의 도통론이 예술에 적용되었을 때는 관련 분야의 이른바 ‘예통론(藝統論)’으로 나타난다. 이런 예통론은 특히 회화와 서예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론 회화 이외에도 다도에서 보듯 비법을 전수한다는 차원에서도 이런 사유가 적용되기도 한다.


회화의 예통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동기창이 남종선과 북종선을 적용해 남종화와 북종화를 구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대에 오면 동기창이 말한 남북종론의 큰 틀은 유지하면서도 구분 방식에서는 유가의 도통론을 적용한 회화정맥론을 통한 구분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강희와 건륭이 주자학 사유를 회화에 적용해야 한 것을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이런 정맥론은 남종화와 북종화가 이른바 남종선의 돈오(頓悟)와 북종선의 점수(漸修)를 통해 구분한 것이 아닌 유가의 중화(中和)미학을 기준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른바 청대 초기 사왕오운(四王吳惲) 화풍의 유행은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겸재(謙齋) 정선(鄭敾), 독후간화도(讀後看花圖
향나무가 멋들어지게 자란 집의 선비가 마루에서 부채질하는 것을 멈추고 잠시 한가롭게 작약꽃과 난을 감상하고 있다. 선비들이 식물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 식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다. 작약꽃이 핀 것에도, 청순한 난초의 줄기에도 대자연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른바 선비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대상으로서 식물을 감상하는 것이다. 즉 집 주위에 식물을 심는 것이나 관물(觀物)의 대상이 되는 것도 모두 ‘의미있는 식물’들이었다. 쥘부채를 들고 살아가야 할 계절이 왔을 즈음 선비들은 이렇게 철학적인 취미생활을 하면서 보내기도 했다.


서예는 유가의 중화 미학과 그것에 대척점에 있는 이른바 광견(狂狷) 미학이란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구분한다. 당태종 이세민이 왕희지 서예를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최고로 높이고 손과정(孫過庭)이 『서보(書譜)』에서 왕희지 서풍은 중화미학을 실현했다고 평가한 이후 왕희지는 점차 서성(書聖)으로 자리매김된다. 주희가 『중용장구』「서」에서 ‘계천입극(繼天立極)’ 차원에서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라는 유가의 도통론이 확립된 남송대에 오면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명대 항목(項穆)이 『서법아언(書法雅言)』에서 유가의 도통론을 운용한 ‘서통론(書統論)’을 전개하면서 왕희지를 서성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최종적인 결론에 해당한다. 왕희지가 서성으로 자리매김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유가 성인 계보를 정리한 도통론에서 강조한 ‘윤집궐중(允執厥中)’ 사상을 서예 차원에서 실현했다는 점이 깔려 있다. 이런 서통론은 도통론이 갖는 벽이단(闢異端) 의식이 가미되어 중화미학에서 벗어난 광견서풍을 비판하고, 최종적으로 광견서풍이 중화서풍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예가 중화를 통해 서통론을 강조하는 것은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자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제한점이 있기 때문이다. 항목이 중화로서 중행(中行)을 말하고, 상대적으로 광과 견을 비(肥)와 수(瘦)에 적용하는 이유다. 이같은 도통론의 예술적 적용에는 구별짓기의 핵심사유가 담겨 있는데, 이런 점은 도(道)의 문(文)에 대한 선재성이나 도문일체 사유 혹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문예인식과 관련된 문제반정(文體反正), 서체반정(書體反正) 등과 같은 문화복귀론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밖에 이른바 동진시기 왕희지로 상징되는 위진 명사들의 난정아집(蘭亭雅集)과 북송대 소식(蘇軾)을 비롯한 명사들이 모인 서원아집(西園雅集) 등과 같은 ’집단적인 우아한 모임‘에도 구별짓기가 작동하고 있다.


각각의 예술 장르마다 다른 점이 있지만 동양문예와 예술에서는 전통적으로 ‘시문서화(詩文書畫)는 본래 일체’라는 관점을 제기한다. 송대 소식이 시화본일율(詩畵本一律)을 강조한 사유는 이후 확장되어 시서화문이 공통적으로 담아야 할 것이 다양한 관점으로 제기되는데, 이런 사유는 기본적으로 문인예술이 지향하는 구별짓기가 작동하고 있다. 이런 점을 중국 전통문예의 개략을 잘 정리된 『예개(藝槪)』를 쓴 청대 유희재(劉熙載)가 ‘예술에서 노니는데 요구되는 것을 요약한 말[遊藝約言]’을 통해 보자.


유희재는 “문장서화는 속된 것을 배척하고 무욕과 고요함을 주로 삼아야 한다.”, “시문서화는 풍도가 있고 품격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시문서화는 경기(勁氣), 견골(堅骨), 심정(深情), 아운(雅韻) 네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빠트리면 안된다.”, “문장서화는 신품(神品), 일품(逸品)이 있다.”, “문장서화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천연의 자연스러운 것[天眞]을 담아내야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등을 거론한다. 결론적으로 도는 언설과 형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문장서화는 모두 도라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예술이란 도가 드러난 것이다[藝者, 道之形也]라고 한다. 어떤 마음에서 창작에 임하고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한 이런 발언은 구별짓기의 전형적인 사유를 보여준 것에 해당한다.


김정희도 서화는 물론 군자의 모든 행위는 모두 도(道)를 담아내야 함을 강조한 적이 있는데, 도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문예론은 다양한 재도론(載道論)적 사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이재도’를 비롯하여 ‘화이재도(畵以載道)’, ‘서이재도(書以載道)’ 등이 그것이다. 물론 도를 유가에서 말하는 인륜도덕 차원의 도인지 아니면 노장에서 말하는 자연의 도인지 하는 구분은 있지만, 도를 예술창작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유희재는 부분적으로는 서예의 경우 금석기와 서권기. 은일의 기운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특히 기질이 조악한 자는 서예를 할 수 없다고 하여 기질의 차이를 통한 차별화를 강조하고, (『예개』의) 『시개(詩槪)』에서는 “시품은 인품에서 나온다”, “취향과 숭상하는 바는 예로부터 구별이 있다” 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유희재의 이상과 같은 견해는 중국 역사에 나타난 문예와 예술에 대한 구별짓기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 것으로, 유희재가 이상과 같이 시문서화의 공통점을 거론하는 것에는 바로 예술의 주체가 시인이면서 사상가, 정치가, 예술가, 문장가, 茶전문가, 음악가[특히 琴연주가]라는 융복합적 인간상인 문인이란 점이 담겨 있다. 이런 점은 군자불기(君子不器) 사유의 구별짓기 적용으로도 이해된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r]는 『문명화 과정(u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에서 서양의 경우 황실의 궁정 예절과 문화가 귀족 및 일반 서민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류층은 문명화된 행동의 과시를 통해 시민계급이나 국외자에 대한 거리감을 강조하고 동시에 권력과 위계질서의 차이를 공고히 하였다고 한다. 즉 자신들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류층의 차별화 전략이 바로 새로운 문화 수준의 지속적인 발전과 확산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은 오히려 문인들의 문화와 취향 및 예법 등이 황실[혹은 왕실]에 영향을 준 부분이 더 많았다. 동양의 이런 현상은 동양의 문인문화와 예술에 담긴 ‘아(雅)’자로 상징되는 우아함, 고상함 등이 갖는 영향력과 차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동양의 문인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차 한 잔을 마셔도 천연의 정취[天趣], 그윽한 정취[幽趣] 등과 같은 용어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차별화하면서 아울러 그런 취향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품격높은 인물이란 점에서 ‘인간과 작품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과 같다[~如其人]’는 사유를 강조하기도 한다. 즉 시여기인(詩如其人), 문여기인(文如其人), 화여기인(畵如其人), 서여기인(書如其人)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이고, 심지어 악여기인(樂如其人), 다여기인(茶如其人)까지 강조한다. 이런 사유에는 어떤 성향과 계층의 인물이 예술에 종사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일종의 차별상을 통한 구별짓기가 작동하고 있다.


이상 본바와 같이 동양 문인들의 문예와 예술에 나타난 구별짓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술론 이외에 철학과 미학에 대한 지식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서화에 대해 누구보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김정희가 자신이 잘난 것을 드러내면서 타인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唐] 안진경(顏眞卿),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안진경 글씨는 중국서예사에서 왕희지(王羲之)의 우아하고 품격높은 글씨와 비교하여 추악한 글씨로 일컬어지곤 한다. 하지만 당대의 충신열사였던 안진경의 글씨는 송대가 되면 소식(蘇軾)과 주희(朱熹) 등에 의해 최고로 높임을 받는다. 이런 사유에는 여타 서예가들과 차별화하는 유가 차원의 ‘서여기인(書如其人)’ 사유가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