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란 무엇인가 (Ⅰ)

  • 483호
  • 기사입력 2022.01.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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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중국역사를 보면 허소(許劭)가 “태평세월의 간신적자, 난세의 영웅”이라고 평가한 조조(曹操)는 생식불능한 환관의 손자였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시인이면서 서예가였던 조조를 일생 동안 가장 심각하게 짓누른 콤플렉스는 바로 사(士)계층이 아닌 것이었다. 조조는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조등은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숭을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환관이 처를 취한 것[宦官娶妻]’은 동한 시대부터 있었고, 이후 당대에는 이같은 ‘환관취처’ 현상이 보편적 현상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 속에서 ‘대가 끊기는 불효’를 면하기 위해 환관들이 양자를 들이는 풍조도 유행하게 된다. 


조조의 탄생은 바로 이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조조의 탄생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삼불효(三不孝)’ 가운데 가장 큰 불효인 ‘대가 끊기는 불효[無後]’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현상에 담긴 효도관은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울러 효도관은 ‘유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제한점은 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조조(曹操) 상.

조조는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인데, 조조의 예에서 보듯 이런 양자(養子) 제도는 삼불후 가운데 가장 큰 불효에 해당하는 ‘후사(後嗣)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無後]’을 모면하기 위한 효 관념의 전형을 보여준다.


2.

유가들은 충과 효 가운데 어떤 것을 더 강조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자. 흔히 ‘충효(忠孝)’라는 용어와 더불어 유가가 봉건제를 옹호한 사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유가는 효보다는 충을 더 강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가는 본래 충보다는 효를 더 강조한 학파다. 원래 부모에 대한 효[事親]와 군주에 대한 충[事君]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난 위급한 상황에 집안에 노모(老母)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노모를 봉양하기보다는 전쟁터에 나가 군주와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경우와[=충을 선택하는 경우] 자식이 노모를 모시지 않으면 노모의 생존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효를 선택하는 경우] 이 두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두가지 경우 중 후자는 군주된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정황도 나타난다. 유가는 이런 대척점에 있는 충과 효를 전혀 갈등 없이 처리하고 있다. 도리어 효를 충보다 강조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럼 유가는 효와 충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했으며 더 나아가 이같은 효를 왜 그렇게 강조했는가를 알아보자.


3.

유가에서 효보다 충을 우선시한 것은 공자가 말한 ‘직(直)’과 관련된 ‘부모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부모를 위해 숨겨 준다’는 사유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맹자가 순임금이 자신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아버지를 메고 바닷가로 도망가겠다고 한 말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직’ 관념과 맹자의 순에 대한 이런 고사는 효와 충 가운데 효를 더 중요시함을 상징한다. 맹자가 오륜(五倫)을 말할 때 ‘군신유의’보다는 ‘부자유친’을 먼저 거론하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순임금[제순(帝舜)]상.

순임금 상에 있는 ‘만세대효(萬世大孝)’라는 말이 상징하듯 순임금은 유가에서 효를 가장 잘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같은 순임금도 포악한 아버지인 ‘고수(瞽瞍)’의 허락을 받지 않고 요임금의 두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이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그런데 이같은 예법을 어긋난 짓을 한 것은 만약 ‘고수’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결혼을 하지 못함으로써 ‘후사(後嗣)를 이어가지 못하는[無後]’ 불효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처럼 유가는 효를 충보다 우선시하는데, 효와 충의 상충성을 교묘하게 접합시킨 것은 바로 공자 제자인 유약(有若)이다.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有若)가 말하였다.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우면서 윗사람 범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드무니, 윗사람 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있지 않다. 군자(君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기는 법이다. 효와 공경[悌]은 인(仁)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


유약은 ‘본립도생(本立道生)’ 사유와 인에 근간하여 ‘효제’를 실천하는 인물의 마음과 행동거지를 윗사람 범하지 않는 것[=충]으로 연결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효와 충의 충돌과 갈등은 해소되게 된다. 이런 사유는 이후 유가의 효와 충의 관계에 대한 기본이 된다. 이런 점에 근간하여 유가는 수신이 제가와 치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친(事親)’의 효는 ‘사군(事君)’의 충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대학』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점을 보여준다.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하게 함에 있다”는 것은 자기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을 나가지 않고서도 나라에 가르침을 이룬다. 효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제(弟)는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고, 자(慈)는 여러 백성들을 부리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효는 임금을 섬기는 충이란 것을 말한다. 이에 치국과 평천하의 관계성 속에서는 군주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백성들의 효에 대한 실천도 결정된다고 본다.


이른바 “천하를 화평하게 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효를 일으키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윗사람이 고아를 구휼하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군자는 구(矩:척도)로써 헤아리는 도[絜矩之道]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동일하다는 차원에서 윗사람이 모범적으로 효를 행하는 효용성을 말한 것이다. 즉 이른바 ‘혈구지도(絜矩之道)’에 의한 ‘상행하효(上行下效)’가 빠르게 실행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효와 사랑을 베풀 때의 효용성에 대해 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정자의 효행이 백성들에게 감화를 주어 결국 위정자 자신에 대한 충으로 이어짐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가 물었다. “백성들에게 윗사람을 공경하게 하고 충성하게 하고 이것을 권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대하기를 장엄하게 하면 백성들이 공경하고, 효와 사랑을 베풀면 백성들이 충성하고, 잘하는 자를 등용하여 잘못하는 자를 가르치면 권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위정자의 효행이 갖는 정치, 교육, 윤리 측면의 효용성이 대단하다면 굳이 위정자가 되어 정치를 행함으로써 치국평천하를 도모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경(書經)』에서 효에 대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정치를 하는 것이오. 어찌 꼭 벼슬하는 것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 하겠소?”


공자의 이 말은 군주가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대사회국가적 차원의 영향력, 파급력, 확장성과 관련된 효용성을 극대화한 예다.


『예기』「제통(祭統)」에서는 “충신이 ‘사군’하는 것과 효자가 ‘사친’하는 것은 근본이 같다. 위로는 귀신에 순응하고, 밖으로는 군장(君長)에 순응하고, 안으로는 친한 이에게 효도로써 한다”라고 하여 충과 효의 관계성을 총체적으로 결론을 맺는다. 『효경』에서도 사친 차원의 효가 사군 차원의 충으로 확장된 것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은 종법적 동형구조체에서 출발하여 전통적인 덕치(德治) 이외에 효치(孝治)를 통한 대일통(大一統)을 이루고자 하는 사유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