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박물관은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우리대학 박물관장 김대식

  • 509호
  • 기사입력 2023.02.15
  • 취재 윤지민 기자
  • 편집 김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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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학과 조환 교수가 그려준 김대식 관장 캐리커쳐(왼쪽 상단)


목수를 꿈꾸던 소년은 어떻게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장이 되었나. 김대식 관장은 목수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독립운동가로 일한 할아버지를 통해 차차 역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김대식 관장의 할아버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로 만주에 파견을 가며 임시정부 자금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관장은 타인들의 동정에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으나 나이를 먹으며 그의 뜻을 알게 되었고,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박물관에서 일하기를 꿈꾸게 되었다 한다. 학예직 출신 첫 대학 박물관장으로 임명된 김대식(사학 89) 관장이 들려주는 우리 대학 박물관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시기가 좋았어요” 박물관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저는 지금의 600주년 기념관으로 박물관을 옮기기 전 처음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오게 되었어요. 학교에서 600주년 기념관을 지으면서 박물관도 이사를 했습니다. 박물관의 부지를 옮긴다는 것은, 박물관을 새로 짓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만들 때는 건물을 먼저 지은 다음에 유물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본래 지니고 있는 유물에 맞추어 공간을 설계해야 해요.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 정장인 셈이죠. 하지만 박물관이라는 것이 몇십 년에 한번 짓게 되는 만큼, 어떻게 설계하고 설비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운이 좋게도 같은 시기에 국립중앙박물관, 리움 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이 설립되고 있었어요. 따라서 외부 박물관을 통해 전시실을 설계하고 쇼케이스를 제작하는 방법을 직접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000년에 전시실을 완성하고, 박물관이 소장하던 유물들을 꾸려 개관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두 번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개관을 하니 다른 대학의 교수님들, 외부 박물관 관계자분들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유물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제가 보기에도 그랬고요 (웃음). 참 난감했습니다. 전시장에 유물을 배치할 때는 한 평에 한 점을 전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에요. 그 모든 전시물 중 단 5%만 좋은 전시물이면 되고요. 근데 우리 박물관은 5%의 좋은 유물조차 없었어요. 우리 박물관에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나 유교와 관련된 유물이 있어야만 했는데, 공부를 상징하는 유물들은 가격대가 높았죠. 그 당시 박물관에 주어진 예산이 적기도 했고요.


이때 또 다른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맞이한 북한에서 문화재가 일본으로 많이 유출 되었습니다. 유물 중에서도 청자나 자기가 참 비쌌는데 헐값으로 팔리고 있더라고요. 일본도 불황을 겪고 있기도 했고요. 그렇게 유출된 유물들이 인사동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인사동에서 유물을 구입하려 하자 교수님 중 한 분이 감정을 봐주셔서 좋은 유물들을 박물관에 많이 들일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도 지원을 해주기도 했고요.


▲12~13세기 고려시대 청자



한국 문화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예전에 종합 대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서관과 박물관이 필수적이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종합대학 설치령에서 박물관 항목이 제외되었습니다. 대학 박물관은 수익도 발생하지 않고, 유지비도 많이 들어서 여러 대학이 박물관을 운영하지 않아요. 하지만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박물관은 하나의 자료 뱅크입니다. 해외의 유명 대학들은 모두 자기 대학의 역사를 전시하곤 해요.


그러나 한국 대학들의 특징은 땅에서 유물이 많이 발굴 되는 만큼, 자국의 역사를 교내 박물관에 전시 할 수 있어요. 자국 문화를 지닌다는 것은 한국 대학만이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죠. 대학 건물은 아무리 열심히 지어 놓더라도 결국에는 전부 없어질 거예요. 그러나 유물은 전승되겠죠. 학생들이 갈만한 공간이 많지 않은데 이렇게 하나의 문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는 셈이에요.



“안 아픈 손가락 없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덜 아끼는 유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다른 대학보다 훌륭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문인 초상화입니다. 무인 초상화보다 문인 초상화가 훨씬 가격대가 높아요. 하지만 우리 대학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기에는 문인 초상화가 제격이었죠. 너무 귀해 쉽게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초상화 일인자였던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문인 초상화 두 점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박물관의 큰 변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로 우리 학교 박물관의 특징이라 하면 과거와 현재를 함께 전시한다는 점이에요. 지금은 퇴직하신 사학과 조동원 교수님께서 자비를 들여 제작하신 탁본을 전부 넘겨주시며 우리 대학이 탁본에서는 전국 1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증받은 탁본을 실물 사진도 직접 찍어 함께 배치했어요.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있도록요.


모든 유물이 귀하지만 우리 박물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탁본과 초상화가 그중 특별히 더 마음에 남는 유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인 초상화



유일무이하게 동북공정에 대응하다

1998년부터 우리 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며 약 30차례의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단언컨대 일제강점기 유리원판을 복원했던 것이에요. 일제 강점기 시기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관장을 가장 오래 한 후지타가 직접 찍어 소장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사진들이 있어요. 1920~ 1940년 우리나라 유적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죠. 1953년 경에 그 유리원판 필름을 입수하게 되었고, 2005년도에 고구려 부분 전시회를 열었어요. 처음에는 대학 박물관이 전시를 한다고 하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그러다가 동북공정 문제가 터지게 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증거를 찾으려 했는데, 마침 우리 대학에서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는 증거인 유리원판 필름을 전시하고 있다 하니 화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고 신문 1면에 기사가 나기도 하며 전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어요.



기획은 스토리텔링과의 싸움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며 가장 어려운 점은 아이디어 고갈이에요. 제가 박물관에 부임한 뒤로 완벽하게 기획한 전시만 해도 35번이 넘어요. 새로운 전시 아이디어를 고안할 때는 단순히 콘셉트만 구상하는 것이 아닌, 학예사들이 다 같이 해당 유물의 역사에 대해 조사하고 소재지를 파악하며 스토리텔링을 해야 해요. 새로 유물을 구입하면 원래 소장하던 유물들과 어떻게 조합해서 전시를 기획할지 생각하기도 해요. 한 유물을 가지고 전시를 두세 번 기획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2015년도에는 구성할 수 있는 소스가 전부 떨어진 거예요. 어떻게 전시를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했죠. 그러던 중 어떤 분께서 대동아공영 만세라고 적힌 떡살을 기증해 주셨어요. 마침 그 시기가 광복 70주년이었기에 다른 기관들과 함께 협업을 해서 광복 70주년 전시를 열기로 결심 하게 되었습니다. 전시물을 구성하기 위해 동국사에 학예사들과 직접 찾아가 절의 모든 유물들을 정리해 드리며 유물을 힘겹게 빌려오기도 했죠. 결국 유명 박물관 어디서도 하지 못한 광복 70주년 기념 전시를 열 수 있었어요.



국내 어느 박물관에도 없는, 우리만의 것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방문하면 우리나라 어느 박물관에도 없는 요소들을 찾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우리 박물관은 학예사들과 함께 직접 발로 뛰어 유물을 구해 오기도 하고, 없는 유물을 고증으로 구현해 내기도 하거든요.


우선 박물관에 정조가 다산에게 술을 먹였던 팔각잔이 있어요. 이 잔은 남아 있는 유물도 없고 재현작도 없는데, 저희가 기록을 바탕으로 팔각잔을 구현해냈죠. 서울역사박물관에 빌려주기도 했어요.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입는 옷을 내의까지 의상학과 교수님과 함께 완벽하게 재현해 내기도 했죠.


▲의상재현(왼), 팔각잔(오)


인재를 양성하는 성균관에 걸맞은 유물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각필이 있어요. 과거에는 책을 주로 빌려서 썼는데, 그 빌려온 책에 메모를 하기 위해서 쓰던 대나무 조각이에요. 각필은 구매할 수 있는 유물이 아닌데, 책을 기증받았을 때 끼워져 있어서 이렇게 전시 할 수 있었습니다. 글씨를 바로 쓰기 위한 선간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박물관 사람들의 섬세함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각필(왼)


마지막으로 외부 박물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유물들이 있어요. 백자청화산수문육각병은 정조나 순조가 술을 마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실 도자에요. 병에 쓰여 있는 ‘만수무강’이라는 글씨를 통해 알 수 있죠. 또한 좋은 기회로 구매하게 된 청자다완이 있습니다. 중앙박물관에도 우리 박물관의 청자다완과 같은 급의 청자는 한 점 정도밖에 없어요. 그만큼 우리 박물관에서는 외부 박물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백자청화산수문육각병



박물관은 사람을 키우는 곳

박물관으로 부임하게 됐을 때 제 첫 목표를 15년 만에 전부 달성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학교 박물관은 사람을 키우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박물관도 결국에는 학교의 일부에요. 저희 박물관은 모든 전시를 학예사들이 기획하고 구성합니다. 모든 학예사가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을 배치하기도 하고, 유물을 구입하는 과정부터 전시하는 모든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 하고 있어요. 실제로 유물을 만져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요. 유물을 전시하고 언론에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대학 박물관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니까요.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공간의 지배자를 양성하는 것이 제가 일하며 얻는 가장 큰 보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