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잇는 춤사위, 무용가 홍연지(무용학과 93)

  • 550호
  • 기사입력 2024.10.27
  • 취재 이다윤 기자
  • 편집 장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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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는 글과 말이 아닌 몸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춤으로 펼쳐 보인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내는 '몸짓'이라는 낯선 언어는 관객의 감정을 일깨우고 무언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무용가의 몸짓은 말보다 강렬하다.


수십 년간 전통 춤사위를 연구하고 재해석해 온 무용가 홍연지는 무대 위에서 한국 무용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그의 춤은 전통과 현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한국 창작춤의 산실'이라 불리는 서울시무용단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전통무용의 맥을 잇고 있는 홍연지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무용가 홍연지입니다.

무용학과 졸업 이후 서울시 무용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이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용무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춤이라는 점에서 한국무용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처용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처용무는 천년의 세월이 깃든 설화를 지닌 춤으로 호방한 춤사위가 특징이에요. 궁중무용 중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기도 해요. 다양한 형식의 구성으로 변형되며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위풍당당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춤이라는 매력이 있어요. 처용무는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어요.
저는 2004년도에 처용무 보존회 전수생으로 등록되어 7년간의 전수 교육 과정을 마쳤어요. 무용을 공부하면서 몸에 익혀야 할 춤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의미 있는 춤을 먼저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처용무를 이수하게 되었어요. 2011년에는 엄격한 시험을 거쳐 이수자 자격증까지 취득했어요.

| 지난해 7월 ‘미국 공연 예술의 심장’이라 불리는 뉴욕 링컨센터에서 서울시무용단의 공연 ‘일무(佾舞)’를 선보이셨어요. 이번 공연은 현지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한국무용의 새 역사를 썼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이 궁금합니다.
우선, ‘일무’는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제례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에요. 대규모 출연진의 역동적인 군무와 웅장하면서도 감각적인 무대 미장센이 눈에 띄어요. 한국무용 공연으로서는 이례적인 성과를 이뤄낸 훌륭한 작품에 출연하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작품을 조금 더 살펴보자면, 이번 공연은 한국무용 특유의 정중동(靜中動) 호흡을 살린 음악과 안무를 활용해 에너지를 극대화했어요. 전통의 현대적 해석과 뛰어난 미학적 요소, 대규모 출연진의 군무가 작품을 더욱 조화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링컨센터에서 공연을 관람한 뉴욕 현지 관객들의 환호를 마주할 때면 우리 무용들의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이번 공연 이후로 한국무용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매체를 향해 쏟아졌고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확실히 느꼈어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한 경험의 매력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예요. 무용가로서 춤을 추는 내내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한국 춤의 모던한 변신 역시 경이로웠어요. 뉴욕에서의 ‘일무’ 공연은 절대 잊지 못할 경험이에요.



| 한국무용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 민족 고유의 춤을 일컫는다고 해요.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둔 한국무용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조화와 균형미가 돋보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무대가 전통무용의 매력이에요. 느리고 우아하게 흘러가던 춤이 진화하듯 빠르게 변화할 때 보여지는 선(線)이 아름다워요. 전통과 현대적 요소를 융합해 새로운 춤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현대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서사와 추상, 유형과 무형의 명확한 대조가 일어나요. 정중동의 깊은 움직임과 여백미를 강조한 무대에서 빠르게 움직이면서 직선과 사선, 기하학적인 도형을 몸으로 그려보기도 해요. 호흡으로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면서 춤을 추다 보면 관객의 시선, 호흡까지 느껴지는 놀라운 흡인력을 무대에서 감지할 수 있어요.

| 최근 국내 무용계에서 폭넓은 관객층을 얻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면서 무용을 즐기는 관객층이 두터워지고 있어요. 공연장을 찾는 신규 관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무용이 낯선 관객들은 어떻게 무용 공연을 감상하는 게 좋을지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궁중무용은 엄격한 형식과 우아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왕실의 격식을 나타내요. 민속무용인 탈춤이나 농악무는 지역 사회와 민중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어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죠. 현대무용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철학적 사상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둬요. 자신의 경험이나 내면세계를 동작으로 표현하며, 때로는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험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기도 해요. 이렇듯 무용은 신체를 활용해 예술적 표현을 만들어 내는 행위예요. 단순한 신체 움직임 이상으로, 우리는 무용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메시지를 전달해요.
무용은 매우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장르로서 관객들에게 매번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선사해요. 무용가들은 무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해방하고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창의적이고 감정적인 해소를 얻기도 해요. 때로는 그 의미가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열린 마음으로 무용가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메시지에 집중해 보세요. 무용가가 감정을 표현할 때, 이 모습을 지켜보던 관객 자신도 무용가와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 일상적인 언어 대신 몸으로 예술적 차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작을 구상하고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무용가로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춤의 호흡법과 기교를 더욱 정교하게 조합해서 더 멋진 춤을 만들고 싶어요. 전통무용에서 호흡법은 표현력과 깊이를 결정해요. 정신과 신체를 연결하여 동작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유기성을 부여하기도 해요. 호흡을 들이마시면 몸이 열리고, 내쉬면 몸이 닫히는 움직임을 현대 동작과 연결하면 관객에게 더욱 깊은 감정과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어요. 오랜 시간 춤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인 호흡법을 아울러 동작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해요.

| 어느덧 무용단에 입단한 지도 27년이 되었어요. 무대를 떠나지 않고 꾸준히 경력을 이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용단에서 춤에 미친 청춘을 보냈어요. 그동안 수많은 공연과 안무, 대회에 출전했고 개인 공연과 문화재 이수 교육을 준비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무용 이론 공부도 병행했어요. 우물 안 개구리로 남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을 이어 나갔죠. 결혼과 육아의 생활도 행복의 연속이었어요. 청춘을 낙오 없이 잘 지나온 듯했어요. 하지만 탄탄대로 속에서도 슬럼프는 찾아오더라고요. 문득 어딘가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춤과 무대를 향한 애정으로 버텼어요. 제가 오랜 시간 무대에서 쌓아온 경험치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어요. 결국 터닝포인트는 계속된 연습이었어요. ‘연습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다시 훈련에 최선을 다하게 됐어요.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 스승님, 친구들, 그리고 선후배님들의 아낌없는 격려가 이 과정에서 큰 힘이 됐어요. 주변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을 것 같아요. 무용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무엇인가요?
학부생 시절 실기 수업 시간이 되면 맨 앞에 서서 동료들에게 안무 순서를 알려주었던 경험이 떠올라요. 수업 시간마다 모두가 순서를 인지할 때까지 제가 시범을 보여야 했어요. 매일 같은 동작을 50번, 100번씩 반복했죠. 당시에는 굉장히 힘들었지만 이렇게 혹독하게 연습하니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어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반복 연습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 같아요.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훈련도 계속하게 됐어요. 연습을 이어갈수록 춤에 더욱 자신감이 생겼고 목표를 향한 집중력이 제 장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힘은 홍연지라는 무용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어요.

| 마지막으로, 무용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춤을 출 때 가장 중요한 건 호흡과 단전에서 올라오는 힘이에요. 팔과 다리만 잘 움직여서는 춤을 잘 출 수 없어요. 무용가가 충분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어야 해요. 코어가 탄탄하면 에너지 넘치는 동작을 선보일 수 있어요. 코어가 무너지지 않는 게 그만큼 중요해요. 저는 지금처럼 부족한 점을 하나씩 채워가되 코어가 잘 잡혀 있는, 내 스타일 답게 철학과 신념을 담은 멋진 모양새로 저만의 커리어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다면, 초심을 잃지 않고 내 자질이 재미있게 엣지있게 누군가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