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br>소통하는 전대석 교수

존중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소통하는 전대석 교수

  • 317호
  • 기사입력 2015.02.13
  • 취재 노혜진 기자
  • 편집 유정수 기자
  • 조회수 17572

‘한 학기 동안 들었던 수업 중 가장 남는 게 많은 수업’, ‘처음으로 유익하다고 느꼈던 강의’, ‘학생들과 소통을 많이 하는 교수님’ 이는 전대석 교수의 학술적 글쓰기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 내용이다. 배움과 더불어 소통을 추구하는 교수. 이번 인물포커스에서는 전대석 교수(철학 97) 를 만나보았다.

전대석 교수는 우리학교 철학과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철학과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후 의사소통교육센터에서 연구원으로 4~5년간 근무했다. 근무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법학전문대학원, PSAT, 언론고시 논술 활동 등을 진행하다 덕성여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우리학교에서 학술적 글쓰기를 강의 중이다.

대학 졸업 후 대부분 대학생들의 일반적인 진로와 같이 회사에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했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생활에 얽매여서 어렴풋한 생각만 했었죠. 그러던 중 저와 친하게 지내던 직장 상사께서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때가 아니면 평생 못할 것 같다면서요. 결혼해서 아이도 있으신 분이 그런 결단을 내리는 걸 보고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그 분을 보고 저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자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된 거고요.

어떻게 보면 정말 큰 모험이었어요.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편안함, 안정된 생활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도하는 도전이었죠. 옛 어른들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을 하곤 하시죠. 주변의 친구들은 그러한 보편적인 때에 맞춰서 안정된 직업도 가지고 결혼도 하는데 그런 것들을 다 포기해야 했어요.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경제적 어려움이었어요. 요즘의 대학생들처럼 학비 부담이 가장 컸죠. 그것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계속 아르바이트도 하고 친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힘들 때마다 저를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과 의학의 관련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의대에서 무슨 철학이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의대야 말로 철학이 가장 중요시 되어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대생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방대한 양의 공부를 합니다. 대부분 암기가 주가 되는 내용이지요. 학생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 흘러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때가 되면 인턴, 레지던트, 의사가 되죠. 의사로서 다져야할 기본 덕목이나 실제 사회 속에서 어때야 한다는 고민을 전혀 해본 적 없이 그저 졸업해서 의사가 되는 학생들이 많은 셈이죠.

이러한 점을 개선하고자 몇 년 전부터 의대에서 의료윤리, 인문학 분야가 중요시 되고 있어요. 현재 저는 도덕추론, 의료윤리, 비판적사고와 글쓰기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암기하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닌, 자기가 직접 부딪히는 상황에 대한 분석들과 도덕 추론을 가르치죠. 자신의 행동이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고 어떤 도덕 이론과 충돌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가 돼요. 보건 의료체계 시스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의료적인 상황에 있어 일반인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잘 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비판적사고와 글쓰기 같은 수업을 하는 것이고요. 아마 현재 우리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학술적 글쓰기와 조금 다른 버전의 학술적 글쓰기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대학에서는 폭넓은 사회적 이슈와 다양한 견해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면, 의대에서는 세부적으로 의대생들이 접할 수 있고 고민해야하는 의료적 윤리 문제에 특화시켜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모든 사람이 전문적으로 철학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 자신의 시간을 올곧이 철학에 투자하고 싶은 사람들만이 전문적인 철학 공부를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철학을 하지 않더라도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것은 중요해요. 제가 생각하는 철학적 사유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해 의문점을 갖는 거예요. ‘왜 그럴까?’ 라는 의문점을 끊임없이 던져볼 수 있는 자세를 지니는 거죠. 우리는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에게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해요. ‘저게 정말 맞을까? 저 생각이 맞나? 저렇게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되나? 올바르게 생각하는 건가?’ 한 번쯤은 진지하게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사유의 시작은 의심하는 거예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곱씹어서 생각하기. 철학을 한다는 것을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을 과목들을 고등학교 때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던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변과 순수학문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같습니다. 그 자체가 기초학문이기 때문이죠. 학문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에요. 제가 학기 초 첫 수업에서 항상 하는 얘기가 있어요. 대학은 자기가 전공한 학문 분야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는 것이죠. 대학에는 여러 가지 과가 있고 어떠한 과에서 배우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요. 각각의 과들은 다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죠. 요즈음 추세를 보면 대학을 취업 동아리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대학의 목적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공을 배우는 것이 그들을 전문 기술자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생각은 옳지 못해요. 순수학문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이에요.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학문만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 학문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학문을 다루고 있는 과에 대한 지원을 없애거나 줄이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 단면적인 예로 현재 철학과가 있는 대학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많은 대학들이 취업률이 낮다고 해서 철학과를 없애고 있는 추세죠. 이러한 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대학은 다양한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에요. 그런 곳에서 순수학문의 일부를 없애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눈 중 하나를 잃어버린 채 세상으로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기초학문이 존립해 있어야 학생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대학 본연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에게 주어지는 수업 시간은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자 하나의 약속이에요. 학생들은 저를 알든 모르든 제 수업을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얻어 가겠다는 마음이 있겠죠.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그 시간에 무엇을 얘기해 주겠다는 제 나름의 목표가 있어요. 그 목표를 해내는 것이 저의 의무이자 학생들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죠. 학기 중에는 제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수업으로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저는 학생과 선생이 차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업 시간에 질의응답을 하면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저 또한 그런 학생들에게 많이 배웁니다. 저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수업을 듣는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배우고 생각해 보게 되죠. 저는 매 수업 시간을 학생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자세로 임해요. 함께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학생들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죠.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없을 거예요. 학생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게 바로 이름 부르기였어요. 학기가 시작하면 제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제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거예요.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누구나 저 사람이 나를 존중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또 저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라는 인상을 받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업에 집중하게 되고요. 저는 다양한 학생들의 의견을 바로 꺾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려고 해요. 항상 제 생각을 알려주기 전에 학생들한테 먼저 물어보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가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을 교정해나가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학술적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언어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업이라는 것이에요. 때문에 학생들이 다양한 의사소통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길 바라요. 제가 항상 당부하는 것이 말을 많이 하고 열심히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틀리는 것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비판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세요. 겉보기에 똑똑해 보이는 답변이 허점투성이인 경우가 있고 조심스럽고 어눌해 보이는 답변이 정곡을 찌를 때도 있어요. 예컨대 부모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오히려 초등학생인 자식이 해결하는 경우도 있죠. 많이 아는 것만이 쟁점이 되는 핵심문제를 간파하는 건 아니에요. 앞에 있는 교수님들이 원하는 것은 화려한 언변술이 아닌, 다루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얼마나 잘 간파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는 가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소통은 상호간의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밑바탕 되지 않으면 올바른 소통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점에 있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제대로 듣지 않아서 이해를 못한다면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없겠죠. 올바른 방향에서 이야기 하고 원하는 답변을 해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겠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이해한 다음에야 올바른 질문, 올바른 비판,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첫 걸음이에요. 그렇게 존중하는 것이 바로 소통의 첫 걸음이고요.

제가 첫 수업 나갔을 때 그렇게 떨었어요. 신기하고, 떨리고, 긴장되고. 아마 모든 사람들의 처음은 저와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매너리즘(mannerism) 에 빠질 수 있어요. 어쩌면 저도 이 수업이 처음에 제게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잊을 수도 있겠죠. 제 목표는 학교 현장에 있는 동안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제 수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수업에서 학생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초심을 잃지 말자는 거죠. 약간의 기복은 있겠지만 수업을 소중히 생각하는 처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죠.

우리학교 학생들은 굉장히 훌륭한 학생들이고 개인적으로 제가 굉장히 아끼는 후배들이에요. 그렇기에 교수가 아닌, 조금 더 먼저 학창시절을 지낸 선배로서 이야기 하자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빨리 찾았으면 좋겠어요. 아마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고민을 해보지 않고 대학에 온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대학생이 되었고 밖에 나가면 어엿한 성인인데도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는 학생들이 많더라고요. 다들 경험해 보아서 알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면 시간도 잘 가고 재밌죠. 반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시간도 안가고 불만만 쌓이죠. 아마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가 다 원하는 바가 있어서 그 과에 갔을 것이고 그 공부를 해보겠다는 열망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거기에서 한 번 더, 성인으로서 나의 주관을 가지고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찾아야 후회도 없고 능률도 좋고 결과도 좋지 않을까요. 반성이 빠르면 빠를수록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는 많아요. 그런 고민들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어요.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나가는 삶을 살라는 것. 그 말을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