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우리의 역사를 전하다 <br>한국고전번역원 이기찬 실장

묵묵히 우리의 역사를 전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기찬 실장

  • 328호
  • 기사입력 2015.07.29
  • 취재 최혜지 기자
  • 편집 유정수 기자
  • 조회수 10268

역사를 번역하는 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하고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일이다. 과거의 사료들을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은 필수적이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고 드러나는 작업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 번역의 중요성과 감사함을 잊고 있는 동안 소신으로 고전번역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50주년을 맞아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을 맡고 있는 이기찬(국문 82) 동문을 만나보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은 1965년 고전번역에 뜻있는 원로들이 모여 민간 차원에서 만든 ‘민족문화추진회’로 시작했으며 2007년 교육부 산하 학술연구기관이 되었다. 고전 문헌을 수집, 연구하고 번역, 보급하며 이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한다. 한국학연구의 기반을 만들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번역원의 핵심인 번역사업본부는 역대 주요인물의 문집을 번역하는 문집번역실, 관찬사료를 번역하는 역사문헌번역실, 과학, 예술 등의 전문분야 관련 사료를 번역하는 특수고전번역실, 고전문헌을 수집, 정리하는 원전정리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역사문헌번역실에서는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기찬 동문은 역사문헌번역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하고 있는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재번역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비변사등록’이 조선시대 4대 관찬사료이다.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는 핵심 자료이다. 이 중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오백 년 역사 연구가 가능한 유일한 자료이고 승정원일기는 분량 면에서 단일서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매년 83권 정도의 역사문헌을 번역원 내 출판부를 통해 직접 출판한다. 또한, 지역별로 활성화되어 있는 여러 거점 연구소들의 고전 번역 등을 심사, 관리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가들은 교육원에서 총 5~7년의 과정을 거쳐 번역가가 되는데, 이 과정을 거쳐도 번역가로서는 초보고, 번역하는 데 필요한 여러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법 등을 다 알아야 하죠. 시대 상황, 정치 상황을 제대로 학습하고 전문가로서 번역하려면 거기에 5년 정도 더 공부해야 번역가로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번역가의 과정은 길고 끊임없는 자료조사와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죠. 작가와 번역가를 비교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작가는 미리 구상하고 준비를 한다면 며칠 만에도 책 한 권을 써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번역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번역은 성실함과 끈기로 이뤄집니다. 아주 꾸준하고 절대적 시간을 투입해서 성실하게 한 자 한 자 완성해나가는 작업이에요. 모든 자료를 다 찾아보고 이해하고 성실히 공부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런데 지금 원전자료가 엄청나게 쌓여있어요. 현재까지 번역된 양은 규장각 내 자료 중 거의 10~15%밖에 안 되는 양입니다. 승정원일기의 경우에는 모두 번역하면 번역서로 2500권 정도가 나오는데, 번역을 끝내는데 5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해요.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전 왕조를 다루기 때문에 왕조별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고 압축된 글이라서 번역가 중에서도 선발해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든 작업이에요. 이것들도 국가적으로 학문적으로 중요한 자료들만 먼저 번역하고 있는 것인데, 모든 자료를 번역하려면 아마 후대 몇 대에 걸쳐 번역해야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죠.”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밤새 시를 썼었고 대학도 국문학과로 들어왔죠. 그런데 대학 다닐 당시였던 80년대 시대상이 암울하고 고뇌가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깊은 사색에서 나오지 않는, 울분을 토하는 시로는 저 스스로 만족이 되지 않고 헛헛했어요. 꿈은 시인이었지만 실제로 타인의 감성에 다가가는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있을까라는 회의도 생겼고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동양철학에 관심이 가게 되었고 동양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그것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한문공부를 시작했어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한문 자체의 매력을 느꼈어요. 한문을 해독해가는 매력 자체가 좋았어요. 그러던 중 한국고전번역원의 이야기를 들었고 전문과정을 수료하고 번역원에 왔죠. 꾸준히 번역 작업을 하다 보니 벌써 20년째 번역을 하고 있네요. 이 일은 할수록 점차 느낌과 깊이가 달라요. 한번 들어오면 빠져들게 되어 있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문집번역실에서 일했을 때 성호 이익의 시 일부를 번역했던 것이 최근 책(<성호전집2>)으로 나왔어요. 이 한시들이 엄청나게 많은 고사를 담고 있어요. 각 구절이 담고 있는 고사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죠. 번역하고 고사들을 찾고 나아가 성호의 문학체계와 사상을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선현들의 사고와 내가 하나 되지 않으면 번역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옛 학자들의 생각의 깊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에요. 대학자들의 철학과 깊이 있는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옛날 분들은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모든 인접분야를 통섭하고 있어요. 사고 체계가 넓어 우리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르는 분야가 나오면 또 그 분야 관련 책들을 읽고 공부해서 번역을 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매일 고뇌하고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지만 한 구절 한 구절 그분의 숨결에 다가가기 위해 매 순간 노력을 했죠. 책으로 나오고 나니 말할 수 없는 성취감과 이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 등 만감이 교차합니다.”
아무리 번역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번역가는 작가 자신이 아니다. 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번역 오류의 가능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물었다.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한문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공부해요. 책을 놓는 순간 오류가 양산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스터디하고 공동 번역하는 것이 기본적인 생활이에요. 또한 정보력이 떨어지면 바로 번역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중국 일본 관련 서적들까지 모두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해요. 나 혼자 되는 작업이 아닌 거죠. 이런 것들이 모두 직결되었을 때 오류가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한문이라는 표기수단으로 생각과 의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말과 표기수단이 달랐죠. 선현들의 글이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는 그분들의 세계를 알 수 없어요. 옛날에는 한문이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한문을 배우는 사람들이 소수에요. 우리의 고유한 정신문화 유산들을 제대로 계승해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우리말로 옮겨놓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또한 세계화의 기반이 한국적인 것을 아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전통적인 문화가 제대로 계승되고 있는 나라는 사람들이 모이죠. 현재에도 세계화되고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들은 고전 자료를 기반으로 구축된 것들이 많아요.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대장금(중종실록)>, <별그대(광해군일기)> 등의 드리마가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잖아요. 앞으로는 더많은 사람들이 우리 전통문화의 무진장한 보고인 고전자료들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다양한 문화컨텐츠들을 만들어 세계에 보급할 것입니다. 그런 일에 우리가 초석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구석지고 외로운 작업이지만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대학생들이 교양으로라도 동양 혹은 한국학의 세계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인터뷰에 응한 까닭은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들과 가치를 알리고, 그래서 이 분야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가능하면 우수한 인재들이 이 분야에 매력을 느끼고 도전 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희소성 있는 직업이고 전문성을 살려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직업이에요. 아직은 부족한 면이 있지만 번역가들이 번역만으로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는 정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실제로 과거보다 대우가 많이 좋아졌죠. 젊은 학도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세계에서 한발 물러나 고전을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가치 있는 삶이라고 제안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