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농화원』 200년의 전설 <br> 그것을 밝힌 김채식 연구원

『석농화원』 200년의 전설
그것을 밝힌 김채식 연구원

  • 333호
  • 기사입력 2015.10.11
  • 취재 노혜진 기자
  • 편집 유정수 기자
  • 조회수 9899

얼마 전, 200년 만에 김광국의 『석농화원』 해설서가 발간되어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공동저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와 우리 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김채식 책임연구원이다. 이번 인물포커스에서는 그 저자 중 한 명인 대동문화연구원 김채식(한문교육, 86) 책임연구원을 만나보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채식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농사짓는 아버지를 도우며 살았었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땀 뻘뻘 흘리며 농사짓는 것을 평생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삶을 살 것인지 고민 많이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께서 제 몸에 맞는 지게와 도끼를 맞춰 주셨어요. 그걸 받고 처음엔 기뻐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가다간 평생 지게 메고 도끼 들고 농사지으며 살겠더라고요. 이 생활에서 벗어날 방법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죠. 시골에서 계속 살다보니 영어와 수학이 다른 학생들보다 잘 안되더라고요. 영어랑 수학을 제외하고 대학에 갈 방법이 무엇이 있나 찾아보니 한문이 있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평소 교과서에도 한문이 많았고 그걸 계속 노트에 따라 쓰다 보니 한문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고 제 적성에도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학교 한문 교육과에 오게 되었어요. 그때부턴 아주 즐겁게 살았어요. 제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은 거죠. 학부 4년을 마치고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곳에서 공부하고 아주 늦게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햇수로는 한문에 종사한 지 꽤 오래됐네요.”

☞ 대동문화연구원은 어떤 곳인가요?

“대동문화연구원은 우리 학교에서도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연구원입니다. 그 역사에 걸맞게 그동안 많은 책을 번역했고 많은 프로젝트를 받아서 활발하게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한마디로 옛날 문집의 번역입니다. 지난 2010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조선 문집을 신속히 번역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한문 번역을 할 수 있는 역량 있는 대학 10곳을 선정해서 번역사업을 의뢰했어요. 그 이름을 따서 거점번역연구소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 학교도 거점번역연구소에 선정돼서 그 사업팀을 대동문화연구원에 두고 현재 조선 문집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무명자 ’윤기’의 ‘무명자집’ 16책 등을 번역했고 요즘은 환재 ‘박규수’의 ‘환재집’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 최근 번역하신 석농화원은 무엇인가요

“『석농화원』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 화첩이 발굴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죠. 2년 전쯤 화봉 갤러리에서 열린 경매에 책 한 권이 나왔는데 그게 바로 『석농화원』이었어요. 『석농화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원래부터 여러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형태의 화첩이 있고 이번에 새로 발굴된 글씨로만 필사해놓은 육필본이 있어요. 이 두 가지 작품은 모두 같은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석농 ‘김광국’이에요. 그는 조선 후기 의관이었는데 중국과 약재 무역 등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추측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서화를 수집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동시대나 그보다 조금 이전 시대의 그림들을 수집합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그림만 수집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에 대한 평을 남겼다는 거에요. 그림의 유래나 가치, 자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에 대한 화평을 남겨요. 김광국 이전에도 손꼽히는 수장가들은 있었으나 자세히 평을 남기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자세히 평을 남김으로써 그림에 이야기를 만든 셈이죠. 그 그림 수가 약 270점가량, 화첩으로는 10첩이 돼요. 그렇게 평생 모은 것을 노년이 되면서 큰 책의 형태로 만듭니다. 흩어져 있던 것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첩으로 만든 거죠. 그가 죽기 전에 그림에 남겼던 화평을 모아서 아들로 하여금 하나로 필사해요. 그가 지식인이었기에 책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책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2년 전 경매에 나오게 된 거죠.

그것을 유홍준 선생이 가치를 알아보고 관여해서 저에게 같이 번역해보지 않겠냐고 문의를 하셨죠. 유홍준 선생과 인연은 상당히 오래됐어요. 옛날에 제가 서당에서 공부할 때부터 인연을 맺어 그 이후에도 제가 연구를 할 때도 계속 교류했고요. 그 인연으로 이번 번역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기에 흔쾌히 동의했죠.

우리나라에는 조선 시대의 그림이 많이 남아있지만 막상 그 그림에 대해 연구를 하려면 논리가 없어요. 형식비평밖에 안 돼요. 그런데 『석농화원』이 등장함으로써 화론을 제기할 수 있게 됐어요. 요약하자면 이 책으로 풍부한 화론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지요.”

“번역하는 것이 한문이다 보니 쉬운 책은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이쪽에 매달려 있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가지고 있어요. 실제 번역을 계속하다 보면 어려운 점보다 보람이 더 컸다고 말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석농화원』에는 김광국이라는 사람이 서화들을 수집하면서 당대의 예술인들과 어울린 아름다운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요. 이것을 번역하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 서화 한 점을 수집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한 점의 서화를 얻어서 그에 따른 기쁨을 누리는 그의 모습 등은 이를 번역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었고요. 어떤 것에 몰입하는 데에서 오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주로 하는 일은 문집 번역이지만 가끔 시간을 쪼개서 번역서를 내는데 미술사 자료를 번역할 때가 가장 즐거워요. 한문은 머릿속에서 심상을 구상해서 보는 자료지만 미술사 자료는 영상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도 그렇고 대중들도 그렇고 진입 장벽이 조금 더 낮죠. 그런 자료는 번역할 때 더 신이 나요. 고간찰이라는 옛날 편지가 있는데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정말 소수예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기에 얼마나 값진 기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할 때 더욱 보람을 느낍니다. 미술전공 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종종 도움을 요청하곤 해요. 그런 걸 알아듣기 쉽게 보내드리면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는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 이 작업 후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으신지요

" 제가 하는 일이 거점 번역 사업이니 그것에 충실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남태응’의 ‘청죽화사’를 책으로 간행하고 싶어요. ‘청죽화사’가 학회지 뒷면에 실린 적이 있으나 전문가 몇 명을 제외하곤 읽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요. 이번 『석농화원』과 같이 그것도 책으로 낸다면 조선 시대의 2대 중요 화론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이기에 훨씬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연구 외에도 우리 학교 한문 교육과에서 강의하고 있어요. 그런데 점점 학생들이 패기가 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취업이 힘드니까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요. 하지만 김광국이 서화 수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에 많은 희열을 느꼈던 것처럼 학생들도 적극적인 자기계발에 힘썼으면 합니다. 취업에 매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좋은 직장이라는 보상을 받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삶이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젊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열정으로 가슴 뛰는 삶을 살았으면 해요. 강의실에서 조금 더 도발적인 눈빛이랄까, 삶을 추구하는 도전적인 눈빛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