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과 경험을 나누다. <br>웹툰작가 정세진

독자들과 경험을 나누다.
웹툰작가 정세진

  • 346호
  • 기사입력 2016.04.27
  • 취재 이수진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 조회수 19638


“안녕하세요. 디자인과 09학번 정세진입니다. 지금은 ‘레진코믹스’라는 만화 채널에서 로맨스툰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연재하고 있어요. 필명은 제 이름의 성을 따서 ‘정’이라고 지어 활동하고 있어요. <비밀스러운 짝사랑>은 2009년 말에 ‘네이버 베스트도전’에 올리기 시작한 만화에요. 학창 시절 누구나 경험해봤음직한 짝사랑을 소재로 했어요. 2015년까지 6년 동안 총 23편을 연재했고요, 같은 내용으로 작년 8월 말부터는 ‘레진코믹스’에서 정식 서비스 하고 있어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웹툰 시장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 웹툰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수요가 늘었어요. 그 과정에서 ‘네이버 베스트도전’처럼 아마추어도 만화를 올릴 수 있는 ‘도전 만화’ 코너가 생기더라고요. 독자도 작가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거였어요. 그 전까지는 만화책 보면 연습장에 한 두컷 따라 그리는 수준이었는데 웹툰 작가에 도전하는 아마추어들이 많아지는 걸 보고 문득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도전 정신이 생겼어요. 그때부터는 주저않고 바로 포털사이트 창작 게시판에 만화를 그려서 올리기 시작했죠. 그 만화가 <비밀스러운 짝사랑>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만화는 그냥 취미였어요. 학부시절에는 만화와 관련된 활동은 따로 한 적이 없어요. 아 딱 하나 있어요. 갓 입학했을 때 나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를 제작하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 때 저는 제 이중성을 소재로 창작 만화를 그려서 제출했는데, 그게 교수님이 원하는 과제의 방향과 많이 달랐나봐요. 교수님이 과제를 받고 많이 당황해 하셨어요. 그런 취지로 내준 과제가 아니었는데 저 혼자 만화에 심취해서 핀트가 나갔던것 같아요. 그 때가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쯤이었어요. 만화에 대한 열정이 넘치다 보니까 그런 일도 생기곤 했죠. 한 번은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내가 그린 웹툰이 웹툰 플랫폼에서 정식으로 서비스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적이 있어요. 먼 훗날의 일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어요. <비밀스러운 짝사랑>으로 정식 연재의 기회를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너무 행복했죠.



저는 주로 직접 겪은 경험에서 에피소드의 영감을 받는 편이에요.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보시면,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알아내는 장면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돼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목걸이 형태로 된 명찰을 매고 다녔는데, 그 명찰 한 가운데에 증명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어요. 매일 매고 다녀야하는 학생증에 증명사진이 웬 말이에요 도대체.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이 평소에는 명찰을 매고 다니지 않았어요. 증명사진이 부끄러웠거든요. 짝사랑 상대 이름을 알아내려고 교무실에 있는 출석부를 몰래 훔쳐보는 친구들도 많았고, 물어물어 이름을 알아내기도 했어요. 그 때 제가 남몰래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명찰을 매고 다니지 않으니까 이름을 알아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죠. 이름을 알고 싶으니까 할 수 없이 교무실에 있던 3학년 출석부를 훔쳐봤던 기억이 나네요. 등장인물들의 연애 이야기는 100퍼센트 판타지지만, 인물들의 소소한 학교 생활 에피소드들은 제 학창 시절의 모습을 담고있어요. 비록 외형은 다를지라도 여자 주인공 ‘한세연’은 제 중고등학교 때 모습과 굉장히 비슷해요. 지금은 제가 많이 차분해 졌는데, 학창시절에는 한 왈가닥 했거든요. 세연이 폭주하는 모습, 땅굴 파는 모습,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장면들을 그릴 때면 예전의 제 모습이 생각나서 즐겁더라고요. 제가 겪었던 경험들이 웹툰에서는 좀 더 재밌게 각색되는 거죠. 그래도 온전히 제 경험만으로는 다수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려워요. 연애 관련 글들도 많이 읽고, 주변 지인들의 사례들도 참고하고 있어요.

일주일 중 4-5일을 웹툰 작업으로 보내고 있어요. 하루에 평균 9시간 정도 작업하고요. <비밀스러운 짝사랑>은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 되는 웹툰이고, 전 보통 목요일에 작업을 시작해요. 스토리의 큰 틀은 이미 잡혀 있어 목요일에는 대사와 간단한 콘티를 짜요. 금요일에는 콘티를 토대로 러프하게 스케치를 하고요. 주말에는 타블렛으로 펜 선을 따고, 월요일과 화요일엔 채색, 배경과 대사 삽입, 편집 등 나머지 작업을 해요. 그림을 그리는 작업과 이야기 내용을 구상하는 것을 동시에 하는 일이 힘들기는 해요. 하지만 힘들다고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작업을 하다보면 주어진 일주일이 빠듯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콘티가 마음에 안 들면 만족에 가까워 질 때까지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하니까요. 다행히 콘티와 대사를 짜거나 마지막 편집 작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순 작업이라서 작업을 하면서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요.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머리로는 다음 에피소드를 구상합니다.

웹툰은 한 화당 60-80컷 정도의 그림이 들어가요. 호흡이 굉장히 짧다고 할 수 있어요. 다음 내용이 궁금하게끔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상 적은 그림 안에 기승전결 구조를 담기 힘들죠. 짧은 호흡때문에 피치못하게 애매한 부분에서 만화를 끊어야 하는 일이 생겨요. 만화 한 편을 보려고 일주일을 꼬박 기다리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제공되는 콘텐츠가 불만족스러울 수 있죠. 최대한 독자들이 만족스럽게 읽을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한 회에 다수의 독자들이 가장 만족스러울 만한 내용을 담는 일이 가장 힘들어요. 아직도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도전 만화 코너에서 만화를 연재할 때에는 길면 1년에 한 번, 짧으면 3개월에 한 번씩 긴 텀을 두고 연재해왔거든요. 매주 한 번씩 마감하는 주간 마감은 정식 작가로 데뷔하고 처음 이예요. 일주일동안 에피소드 구상부터 그림그리기, 편집까지 모든 작업을 진행하려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좀 버겁더라고요. 처음엔 막막하기도 했어요. 설상가상 흑백에서 컬러로 작업스타일을 바꾸면서 준비 기간동안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다행히 지금은 익숙해져서 무리 없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웹툰 작가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땐 창작물에 대한 반응을 보는 순간이죠. 처음 ‘네이버 베스트도전’으로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독자들의 피드백을 바로 받을 수 있던 것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 피드백이 부정이든 긍정이든 제 작품에 대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큰 매력이었어요. 제 경험을 나누면, 독자들이 거기에 대한 응답을 해주는거니까요. ‘레진코믹스’에는 독자 댓글란이 따로 없어서 만화 하단에 제 개인 블로그로 연결되는 링크를 남겨두었어요. 가끔 독자들이 링크를 타고 블로그에 들어와서 짧은 감상이나 전개 방향에 대해서 조언을 남겨주는데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고 있어요. 그런 반응들을 보면 힘이 난다고 할까요. 관심을 가져주는 모든 분께 감사하죠. 한 번은 주인공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학생 한 분이 제 만화를 보고 위로를 많이 얻었다고 메일을 주신 적이 있어요. 만화를 그려줘서 고맙다 말씀하시는데 전 그 메일에 감동을 받았죠. 웹툰을 그리면서 어려움이 많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더 큰 보람이 있으니까 그런 재미에 웹툰을 그리는거 같아요. 한 번 맛본 매력을 그만 둘 수는 없잖아요. 만약 다른 길을 가더라도 웹툰은 꾸준히 그릴 생각이에요.



일단은 지금 연재하는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무사히 마치는 게 당장의 목표입니다. 준비된 상태로 만화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아직 기술적으로나 스토리텔링면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아요.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고 싶은데 역량이 부족한 것 같아서 제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고 있어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요. 언젠가 제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취재든, 공부든 열심히 발로 뛰어야겠죠. 차기작 연재 전에는 다양한 경험을 해볼 생각이에요. 제 바운더리 안에서만 살아와서 그런지 사고의 폭이 한정되어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요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연재가 끝나면 하나하나 그 목록을 지워나갈 생각이에요. 어느 정도 목록이 지워지면 지금보다 폭 넓은 시각으로 만화를 그릴 수 있지않을까 싶어요. 이건 어쩌면 정말 큰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독자에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나중에 제 이름을 들을 때 그 작가 만화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시면 성공한 거 아닐까요?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요.

차기작을 연재하면 어떤 작품이 될까 생각해 봤어요. 학부시절, 심리학을 복수 전공 했는데 전공 수업 중에 ‘성격심리학’을 흥미롭게 공부했어요. 외향성 강한 사람과 내향성 강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를 그려 보고 싶어요. 다른 성향을 가진 두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만화에 설득력 있게 녹여내는 거죠. 물론, 몇 가지 기준에 의해 성격 유형을 분류하는 것 자체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도 계시고, 자칫하면 해당 유형을 일반화할 수 있는 소재라 조심스럽기도 해요. 어쩌면 이런 성격은 이렇다는 편견을 심어주는 만화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직은 막연하게 구상만 하고 있는 단계라서 실제로 그리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진지한 작품도 그리고 싶은데 제 성격상 못할 것 같아요. 쓸데없는 개그 욕심이 좀 많거든요. 전반적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만화를 계속 그릴 것 같아요. 그게 제 스타일에도 맞는 것 같고요. 로맨스 코미디에 특화된 작가가 되고 싶어요.

항상 조언 받는 입장에 있다가 조언 하는 입장이 되니 굉장히 어색해요. 일단 웹툰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는 제가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사람으로서 말씀 드릴게요. UCC게시판도 좋고, 커뮤니티도 좋아요. 본인의 만화를 평가받을 수 있는 곳에 만화를 올려보세요. ‘아직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대중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면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받을 기회를 놓치게 돼요. 저도 정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화를 올리기 시작했고요. 독자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수용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개선하고 노력해서 데뷔의 기회가 찾아왔던 것 같아요. 여러분도 그렇게 연재를 하다 운이 좋으면 정식 연재 기회를 얻을 수 있잖아요. 웹툰 플랫폼에 직접 만화를 투고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마추어 작가들은 창작 게시판에서 스카우트 되는 일이 많거든요. 뭐가 됐든 일단 한 번 올려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급적이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세요. 책이나 각종 매체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본인이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디테일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많거든요. 지금 경험하는 순간순간이 먼 훗날 자산이 될 겁니다.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학부시절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과제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교양 과제로 나에 대해 서술하는 보고서를 30장 가까이 쓴 적이 있어요. ‘타인이 보는 나’, ‘내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MBTI를 비롯한 각종 성격유형검사결과에 근거한 나’ 등 나 자신에 대한 것들은 모두 적었어요. 일주일 동안 온전히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저는 그동안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았어요. 외향적인 사람, 리더십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리해서 달려왔더군요.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왜 힘든지, 왜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드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활동적이지 못할까, 나는 왜 이럴까 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적도 많고요. 다른 사람처럼 되지 못하는 제 모습이 불만스러워서 자존감이 땅 끝까지 추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다른 제 모습이 싫어서요. 하지만 그 해답을 제가 쓴 보고서에서 찾았어요. 알고보니 저는 리더보다는 조력자로 있는게 더 편한 타입이고, 액티브한 활동을 선호하기 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어요. 보고서 말미에 소감을 쓰는 부분이 있었는데 순간 드는 생각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데 다른 사람 처럼 바꿀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을 좇아 무리해서 바꾸지 않아도 돼.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나쁘지 않아. 왜냐면 지금 내가 이렇게 있고 싶으니까.’였어요.

어떤 상태로 있을 때 편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제대로 알고 나니까 타인이 원하는 기준에 제 자신을 끼워 넣지 않게 되더라고요. 내 인생의 주체는 나 자신인데 남에게 굳이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주관이 생기면서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이렇게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아요. 나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