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리얼리스트’를 꿈꾸는<br> 역사학 교수 하원수

‘꿈꾸는 리얼리스트’를 꿈꾸는
역사학 교수 하원수

  • 356호
  • 기사입력 2016.09.28
  • 취재 이수진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 조회수 11017

“안녕하세요. 저는 역사를 가르치는 50대 후반의 역사 선생 하원수입니다.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중국 당송(唐宋)시대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지식인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에서는 중국의 원(元)대까지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1’이라는 수업과 중국사 사료를 직접 읽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는 ‘동양사 사료강독’이라는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원래 꿈이 교수였던 것은 아니에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교수가 되어 있었어요. 중학교를 다닐 때 세계사를 배우면서 중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 역사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라서 처음에 동양사학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법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진로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많이 말렸어요. 그 때 아버지께서 제게 나이 들어서도 역사 공부하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삶이 아니겠냐고 하신 말씀을 듣고 사학과 진학에 대한 마음을 굳혔습니다. 지금까지 제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어서 아직은 행복하고 또 성공한 삶이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대학생들이 사회 참여를 많이 하던 시기였어요. 당시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는데 전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해서 데모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함께하기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더 진지하게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몸이 불편한 만큼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까 장점이 된 셈이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길이라 더 열심히 더 많이 공부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중이에요. 아버지께서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셔서 공부가 재미없어지는 순간이 와도 항상 재밌게 공부하려고 합니다.

교수는 연구자, 교육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사회에 봉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구자로서 보람을 말하자면 하고 있는 연구가 술술 잘 풀릴 때의 즐거움이죠. 언제나 연구가 제 맘대로 잘 되는 것은 아니에요. 대부분 마음대로 안 돼서 슬프고, 제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나의 무능함에 좌절할 때도 있지요. 그런 것과 비교해서 즐거움과 보람은 교육자일 때 더 자주 만날 수 있어요. 학생들과 만나면서 오는 즐거움이 굉장히 크거든요. 젊은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며 공감할 수 있을 때 큰 즐거움을 느끼고, 특히 제자들에게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새로운 것들을 배울 때 가장 즐거워요. 스승의 날에 제 생각이 난다며 저를 찾아오는 제자가 있을 때는 부끄러움과 함께 더할나위 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 학교는 특히 대계열제라 2학년이 돼서야 전공 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던 2학년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논리적인 의견도 펼치면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사회 봉사에 대한 측면에서는 제가 더 좋은 선생님이 되고 더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교수로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봉사활동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할 때는 교수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로서 보람도 많지만 어려운 점과 고민들도 많아요.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가 가장 힘들죠. 읽어오라는 책을 읽지 않거나 수업에 필요한 교재를 가져 오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제가 학생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을 많이 해요. 학생들이 너무 말을 안 들을 때는 수업을 그 자리에서 그만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학생들이 미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상해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학생들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에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자꾸 쓴 소리를 하는 것 같아요.

연구자로서 어려운 점을 꼽자면 연구가 잘 풀리지 않을 때입니다. 저는 주로 중국사에 대해 공부하니까 어떻게 보면 외국학을 하는 셈이요. 같은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이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입니다. 주로 봐야 하는 사료들도 외국어인 한문으로 되어 있어 그런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중국인들과 공부를 같이 할 때면 사료 읽는 속도부터 차이 나니까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이런 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요. 하지만 서양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은 중국학에 있어 그래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사회과학과 같은 경우에는 시작이 서양인 데 반해 중국학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에서 시작된 것이라 문화 등 비슷한 면이 많아요. 역사학이라는 것이 과거의 일을 공부하는 것이라 과거의 일을 정확하게 알아내기 힘들어요. 사료에도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공백들을 채울 제 상상력도 부족함을 느끼면서 역시 삶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구가 제 생각대로 술술 잘 풀리면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고도 생각해요.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에서 인생이 그토록 어려운데 시가 쉽게 쓰여지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저도 공부는 쉬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글을 써오라고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묻고 답해야 하는 문제 같습니다. 역사란 사실 ‘history’라는 서양 언어의 번역어이고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술로서의 역사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어요. history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기술의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아요. 제 생각에 대해 자신도 없고 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없지만, 사실로서의 역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삶의 현실적인 조건으로서의 ‘사실’이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생각의 출발은 그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의 여러 외재적인 것들이 문화라는 것을 매개로 구성원들을 그 조건 안에서 변화시켜요. 막스 베버의 비유처럼 거미가 거미줄을 치지만 그 거미줄을 벗어날 수 없는 거미와 같은 것이지요.

그 당시의 삶의 조건을 정확하게 해명하는 것이 중요해요. 역사학은 정확한 사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 문제지만요. 과거에 대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이 굉장히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사학과 학생들에게 사료를 해석하는 방법이나 어떤 역사서 혹은 문헌의 장점과 한계 등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1000년 정도의 시간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고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마셨고 무엇을 입었나 등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이해해야만 당시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과거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 사람들을 현대 시대로 호출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 시대로 들어가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 그 당시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되기 쉽기 때문이에요.

기술로서의 역사는 역사학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진정한 의미의 역사학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의문과 그 의미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정 시점에서 그 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흔히 과거제와 현대 사회의 행정고시를 비교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두 가지의 비슷한 점을 들며 현재적 의미를 찾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 둘의 차이점에 집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각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이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제가 보수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의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해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져 온 것이라 매우 엄중하고 단단한 것이지요.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어도 오랜 뿌리가 있어 쉽게 깨질 수 없어요. 인간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라면 황당할지라도 그 속에 분명 의미가 존재하고 있어요. 물론 한계도 있지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있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제도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과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인간 삶의 견고함과 가변성 양면을 동시에 모두 생각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고 이런 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현실에 적응만 하는 것은 부족해요. 꿈도 가져야 하죠. 나의 현실이든 우리의 현실이든 변화시켜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어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꿈은 잃지 않는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은 한 쪽 면만 봐서는 안 돼요. 개개인의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정확한 인식과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역사의식이에요.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전부인 것 같지만 다른 삶의 조건 하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본분이고요. 저는 ‘역사학자’지만,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역사가’라고 생각해요. 내 삶의 현실적 뿌리는 무엇이며 이 안에 살며 나만의 꽃을 어떻게 피울지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나 역사가가 될 수 있지요. 역사학자는 사람들이 역사가가 될 수 있게 좀 더 넓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자료들을 제공하는 1차산업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모든 사람들이 더 현명한 판단과 더 정확한 현실 인식 그 대처를 위해 자신만의 역사의식을 가진 ‘역사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당면한 문제에 대해 더 현명한 판단을 하게 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인간은 모두 더불어 가는 존재이고 혼자서는 그 누구든 잘 살아갈 수 없으니 역사를 공부해야 하죠. 오래 살수록 나 혼자만 잘 산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또 다른 ‘나’인 다른 사람을 연대하지 않을 수 없고 이때 바로 ‘공감’이 필요해요. 경제적인 인센티브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꼭 경제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은 것처럼 인간은 연민과 공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측은지심과 같은 것이 분명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이 있어 점점 역사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역사의식을 가져야 개인도 현명해 질 수 있고 그 사회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역사 교육은 이런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는 현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가’이기 때문에 역사 교육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개선 방안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들어 줘야해요. 각자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만요. 최근 국정 교과서에 관한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이런 것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집필 거부 선언을 한 것이고요. 역사 교육은 절대 획일적으로 이뤄져서는 안됩니다. 국가가 역사 교과서의 집필을 주도한다면 그 역사서 안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될 수 있어요. 가능한 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제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이 ‘꼰대’라는 말이에요. 아버지로서 선생으로서 지금 대학생들이 고민도 많고 힘든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많이 힘들지, 힘들거야 하면서 위로해주는 건 누구나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은 더 원칙을 강조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현실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파악함과 동시에 꿈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화가 나는 건 젊은이들에게 동물적인 경쟁을 강조하며 그 안에서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겁박을 하는 오늘날의 현실이에요. 6,000원밖에 안 되는 시급을 주면서 인생 경험이니 뭐니 겉만 번지르르 한 말로 청춘의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이 답답합니다. 학비가 없어서 공부 하지 못할 상황이거나 생활비가 없어 생활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면 카페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기 보다는 그 시간에 꿈을 꾸었으면 좋겠어요.

대신 그 꿈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는 꿈이면 좋겠지요. 교과서에만 나오는 식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혼자만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소중해요. 지금 제 시간보다 더 중요하죠. 이런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고 꿈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며 잘 썼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젊음의 시간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정신없는 사람들 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꿈은 꼭 가지기, 그리고 젊음의 시간에 대한 의미를 더 크게 하기. 이 두 가지는 꼭 기억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