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를 통해 세상을 보다 <br> 역사학자 나혜심

독일 역사를 통해 세상을 보다
역사학자 나혜심

  • 365호
  • 기사입력 2017.02.13
  • 취재 정혜인 기자
  • 편집 정재원 기자
  • 조회수 7133

많은 현대인에게 역사는 지루한 과목이다. 어떤 이들은 옛날 사람들의 쓸모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역사를 멀리한다. 하지만 역사 공부는 정말 쓸데없는 일일까? 이번 인물포커스에서는 삶의 이해를 위해 역사를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역사 학자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 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을 밟은 뒤 독일 지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처럼 역사학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온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사범대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어요. 하지만 제 오랜 꿈은 연구하는 사람이었죠. 부모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저는 역사교사가 절충안이라고 생각해 우리 학교 역사교육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존재감이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어요. 다만 최대한 다양한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죠. 지금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소리사랑’이라는 동아리의 멤버였어요. 학교의 강당과 지금은 사라진 금잔디 광장의 조개껍데기에서 동아리 선배가 만든 노래를 불러 대중화시키는 활동을 했답니다. 그 선배가 학교 축제에서 독창을 하게 된 제게 처연한 감정을 담지 못하고 고운 목소리만 내려고 한다며 혼을 냈던 기억이 있네요. 학교 총여학생회에서 기생관광을 주제로 하는 연극에도 참여했답니다. 역사를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답사를 다니며 농민가, 해방가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이렇게 보니 제가 그렇게 조용한 편은 아니었나 보네요. (웃음)

학교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송항용 선생님의 노장철학이라는 교양 수업이 기억에 남아요. 우리의 주관적 시선이 대상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판단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냉정히 생각해볼 수 있었고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온전한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게는 충격을 주었던 수업이죠. 아직도 그 교수님의 느리지만 학생들을 집중시키던 강의의 순간이 기억납니다.

대학 시절에 여행을 많이 못 해본 게 후회 돼요. 학점과 등록금,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요.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나에게 지워지는 짐들과 의무들이 많아 여행을 꿈꾸기 어려운 것 같아요. 학생 때 아무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을 해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지금은 독일에 자주 가더라도 사료보존소나 대학교 도서관에만 있느라 여행을 즐기기는 힘들거든요.

사학과 석사과정에 있을 때 독일 나치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한 논문을 썼어요. 자연히 서양사 중에서 독일사에 관심이 생겨 독일로 유학 가게 되었죠. 독일에서 연구하고 싶었던 것은 독일 부르주아에 관한 것이었어요. 당시 학문적 분위기에 대한 억압의 영향으로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노동운동이나 정치변혁에 대해 연구했는데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노동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부르주아들은 어떤 이들이었는지 연구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찾아보다가 부르주아 사회정책 전문가였던 당시 제 지도교수님과 연결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분이 계시던 지겐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독일로 간 한인 간호여성>을 집필했다. 책에 대한 소개를 부탁했다.

그 책은 1960~70년대에 독일에 갔던 한국인 간호노동자들에 대한 역사서입니다. 제가 독일에 있는 동안 노동이주를 한 많은 교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그 분들은 각기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계셨지만 저는 특히 여성들의 표정에서 거의 예외 없이 동일한 표정을 볼 수 있었어요. 고단한 삶을 악착같이 살아온 흔적과 함께 스스로 삶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당당함과 고집스러움이 담겨 있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습니다. 차가운 듯하지만 그 안에는 뭔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있던 ‘희생자’로서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정의 동일성은 그들의 독일에서의 삶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했고 저는 그것과 관련된 과거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독일 연방문서보존소에 그들의 이주 관련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그분들의 삶은 일명 한강의 기적과 연관되어 평가돼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차관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그들의 독일에서의 취업이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임금이 담보가 되어 차관협상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 개인 기업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국가정책을 위한 담보로 묶어두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야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 성과가 없었던 시기동안 군사정권의 위대성과 그들의 희생성을 알리는 담론은 널리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어 독해가 가능한 서양사 연구자로서 독일의 공적 문서와 당사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연구함으로써 그 담론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책을 썼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차관담보설이나 정권의 신화적 행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책이 한인의 독일 이주역사와 이주자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교수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어떤 주제에 대해 탐구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었어요. 교수활동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아요. 독일에 가기 전부터 저는 이미 강의를 시작했어요.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이후 성대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의를 할 때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한답니다. 지난 학기에 ‘서양의 역사와 문명’ 수업을 했을 때는 학생들이 서양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서양인들이 더 잘 살기 때문이라고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과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와 그 관계를 이해하길 바라면서 수업을 진행했죠. 가끔은 학생들에게 특정한 역사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기도 해요.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즐겁고 기쁜 순간들이 더 많아요. 그 중에서도 저와의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이 함께 다루었던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2015년도에 아주 넓은 강의실에서 했던 ‘역사학입문’ 수업이에요. 학생들과 더 많이 눈을 마주칠 수 있어 넓은 강의실을 좋아해요.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면 내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지, 관심은 더 생기고 있는지 알 수 있거든요. 특히 그때는 오른쪽 끝에서부터 왼쪽 끝까지 학생들과의 교감이 매우 잘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그런 교감이 한 학기동안 지속되면 가슴 벅찬 기쁨이 남는답니다.

물론 힘들 때가 없는 건 아니에요. 이 직업은 정해진 휴식이 없어요. 새로운 연구주제가 생기면 자료를 찾고, 논문을 쓰고 논문집에 게재하기 위해 애쓰지요. 동시에 수업 준비도 하고요. 연구가 마무리되면 또다시 연구 주제를 찾습니다. 이렇게 일이 끊임없이 반복돼요. 그래서 주말이나 명절에도 늘 쫓기는 마음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요. 너무 피곤하거나 쫓기듯 사는 제 자신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 이 길을 택한 것이 후회 되기도 한답니다.

저는 학생들과 소통을 많이 하는 선생이 되고 싶어요.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사실 연구 주제의 주변에 대해 겨우 아는 사람이고 그런 가운데 열심히 준비해서 수업을 진행합니다. 수업시간이든 그 외의 시간이든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학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의 관심이나 궁금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고요. 현재 저는 글로벌 이주시대 여성노동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이주는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역사학의 학문적 특징을 이용한 해석은 미비합니다. 특히 오늘날 여성의 이주는 전체 이주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러한 여성 이주노동이 지난 역사와의 연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연구 외적으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녀 보는 것이 꿈입니다.

너무 성과와 연관해서 생각하고 생활하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사실 대학생 때만큼 다양한 추구의 기회가 있는 때도 없는 것 같아요. 여행도 가고, 사회 내 다양한 기관들에서 활동도 해보길 바랍니다. 우리 학교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학생 지원 프로그램들도 잘 활용하길 바라요. 예전에 제가 동기들과 가던 장소들은 많이 변화하거나 없어졌지만, 여러분들을 위한 지원은 훨씬 늘었으니까요. 수선관 위의 옥류정이나 청룡상 주변에도 가끔 앉아 있어 보세요. 나중에 학교에 대한 기억을 풍성하게 할 장소들이랍니다.

역사는 인간의 삶의 기록입니다. 오늘의 현상은 어제 있었던 일의 결과고요. 이 과정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 공부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미 지난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된 형태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해석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이들에 의해 보다 정답에 가깝게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발 역사를 책상에 앉아 시험 공부하는 것처럼 읽지 마시고, 즐거움으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간 전반에 대한 이해는 한층 깊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