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다 <br> 류덕희 회장

나눔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다
류덕희 회장

  • 370호
  • 기사입력 2017.04.30
  • 취재 윤정은 기자
  • 편집 정재원 기자
  • 조회수 6653

올해 3월, 대부분의 학생들은 개강 후 달라진 교내 카페의 모습과 리뉴얼된 식당메뉴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나날이 풍요로워지는 학교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누가 우리의 학교생활을 지원해주는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학교의 변화는 성균관대학교 선배들의 기부금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척 많은 졸업생들이 학교의 발전과 후배들의 보다 풍족한 생활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학교발전기금, 글로벌센터건립기금, 학과발전 기금 등 총합 약 90억을 학교에 기부한 경동제약 류덕희 회장(화학과 56)을 만나보았다.

류덕희 회장의 발자취

류덕희 회장은 1938년 5월 20일에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때 그는 굉장히 지적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화학시간에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선생님을 골리기 위해 화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화학시험에서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그의 화학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화학에 대한 관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는 결국 1956년에 우리 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7남매의 넉넉하지 않은 가정의 아들이었던지라 대학시절 가정교사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집안사정이 정말 여의치 않을 때는 휴학 후 1년 동안 서울전기라는 회사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벌기도 했다. 그는 교내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3학년 2학기 때에는 학생회장을 역임했다. 학생회장으로서 4.19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했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사업을 하다가 1975년 경동제약을 설립했다.

◎ 류덕희 회장님의 동반자, 경동제약의 이모저모

경동제약이 걸어온 길

경동제약은 의약품 제조업체이다. 1975년 9월에 유일상사라는 회사명으로 시작해 1976년 경동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경동제약 설립 초반에 아스피린과 달리 위에 부담을 덜 주는 위장약과 비타민 등을 제조하고 팔았다. 더 나아가, 1980년대에는 류덕희 회장의 주도로 수입약품을 국산화하는 작업과 의약품 원료를 개발하는 작업도 행했다. 이 때 개발한 의약품 원료에 대해 특허를 신청해 수익을 얻었다. 현재 생산하는 의약품은 소화기관용제, 항생제, 항균제, 항바이러스제 등이며 이 외 다양한 의약품을 제조한다. 1990년대부터는 해외시장에 진출해 현재는 동남아시아와 중남미에도 원료의약품과 완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실로 경동제약은 1985년, 1995년, 1998년에 걸쳐 유망중소기업 및 우량중소기업으로 선정된 바 있다. 1999년에는 중소기업 수출기업화사업 대상기업에 선정되었다. 이후 수출에 박차를 가해 2001년에는 ‘백만불 수출의 탑’, 2007년에는 ‘삼백만불 수출의 탑’, 2013년에는 ‘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류덕희 회장은 ‘국제인증 규격화 작업 등을 통해 수출을 더욱 늘려갈 계획’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경동제약 들여다보기

경동제약의 상호명은 서울의 동쪽에서 시작했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류덕희 회장은 ‘경동제약’의 어감이 부드럽고 편안하여 그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경동제약의 사훈은 ‘진실되고 근면하게 창조하고 개발하여 성심으로 봉사함으로써 인류의 건강과 행복의 길잡이가 되겠다.’이다. 이 사훈에는 류덕희 회장이 강조하는 가치가 모두 들어가 있다. 류덕희 회장은 경동제약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직원들의 공’과 ‘자신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은 것’을 꼽았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던 이유는 직원들 덕분이지요. 모두가 자신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해 주었으며 더 좋은 의약품을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나를 믿고 따라와준 우리 직원들에게 회사성공의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성공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제가 저의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다는 점을 꼽고 싶네요.(웃음)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회사의 수익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좋은 약품을 싸게 제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을 사람들이 알아주었기 때문에 경동제약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경동제약이 항상 성공가도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류덕희 회장이 회사를 처음 설립할 때 은행에서 자금을 빌렸는데 이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꽤 컸다고 한다. 은행에 담보도 잡혀있는 상황이었고 막 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큰 매출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류덕희 회장의 통찰력으로 인해 해결될 수 있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경동제약은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순환기내과와 비뇨기과 계통의 질병이 많아진다는 점을 포착했다. 또한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장기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그는 순환기와 소화기계통의 의약품에 주력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사람들이 미용에 신경쓴다는 점을 고려해 피부과계통의 의약품도 개발했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 그에 걸맞은 의약품을 개발한 것은 경동제약이 초반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탈피하게 도왔다.

◎ 류덕희 회장의 따뜻한 세상 만들기

류덕희 회장에게 ‘봉사’란?

“사훈에서 알 수 있듯이 저는 봉사가 인류의 건강과 행복의 길잡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의약품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가 없어요. 봉사는 내가 남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을 위해서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는 것이 봉사의 첫걸음이에요.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그 행복을 키워주거나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봉사 아닐까요?”

나눔을 실천하는 삶

류덕희 회장은 큰 액수의 돈을 사회복지시설과 모교에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행동이 ‘기부’라가보다는 ‘나눔’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복지시설 중에서 사랑의 공동 모금회와 바보나눔 재단에 나눔을 실천한다. 사회복지시설은 장애인들을 데리고 있는 시설, 미혼모들이 생활하는 시설 등이 있다. 장애인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치료받고 생활할 수 있도록, 미혼모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류덕희 회장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복지시설에 나누어 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아원과 정신지체자 치료센터도 건립하게 도왔다. 정신지체자 치료센터는 류덕희 회장의 호인 ‘솔샘’을 따 ‘솔샘 나와 우리의 센터’라고 지었다. 이 센터에 있는 장애우들은 쿠키를 만들고 파는 양에 비해 월급을 받는다. 류덕희 회장은 장애우들이 만든 쿠키를 구입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다. 노인들이 있는 시설에 그는 경동제약에서 제조한 약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사회를 내가 개조할 수는 없어도 사회를 조금 더 좋고 따뜻한 곳으로 만들 수는 있지 않습니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거에요.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에 나 하나의 힘으로는 벅차지만 나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나다보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사회시설 외에도 모교인 우리 성균관대학교에 학교발전기금, 글로벌센터 건립기금, 송천의학 연구기금, 송천재단 장학기금, 학과발전기금 등 총 90억을 나누었다. 이 금액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힌다. “하다보니까 이렇게 많은 금액을 나누었네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장학금과 보조금을 받아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어요. 저를 도와주었던 학교를 다시 돕고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그 돈이 쓰인다고 생각하면 흐뭇합니다.

우리 학교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한 것이 경동제약을 만드는 데 초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가 점점 발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즈음 성균관대학교가 세계 대학 순위에서 점점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합니다. 나의 보탬이 모교를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모교가 나를 키워주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금액을 모교에 베풀 수 있었습니다.” 모교와 사회복지시설 외에 류덕희 회장은 직원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다. 실로 회사 간부 중 두 분이 각각 1985년에 간암으로, 88년에 심장마비로 명을 다했다. 류덕희 회장은 그 둘의 상주를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 월급을 계속 지급하고 자식들의 학비와 등록금까지 모두 지원했다. “사실 그 둘을 도와주는 데 반대의견이 꽤 있었어요. 그러나 회사는 ‘우리’라는 개념이 있는 곳입니다. 그 사람들은 직원이기에 앞서 우리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들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더욱 좋은 것은, 직원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저의 모습을 보며 우리 회사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정도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것이 조금 더 끈끈하고 애정이 넘치는 회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류덕희 회장의 모교에 대한 사랑

류덕희 회장은 우리 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에서부터 2008년까지, 그리고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총동창회장의 자리를 지켰다. 경동제약과 총동창회장의 자리를 겸임하면서 글로벌센터를 건립하는 자금을 모았다. 글로벌센터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총동창회 건물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을 건립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 학교 동문을 동해 123억을 거두었다. “총동창회 건물이 변변치 않아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나름 근사한 건물을 지어 흐뭇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학교 동문들이 만날 장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하니 매우 기분이 좋아요. 이 건물의 설립은 성균관대학교가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에게 한 마디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를 바라요. 자기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여러분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세요. 또한 무엇이든 열심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땀과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젊은 시절을 보내세요. 앞으로 성균관대학교를 더욱 빛내줄 인재가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