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시작을 알린 신성호 교수

  • 388호
  • 기사입력 2018.01.26
  • 취재 구민정 기자
  • 편집 주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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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누가 들어도 황당한 경찰의 비상식적인 발표로 더 잘 알려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비극이다. 무고한 서울대생의 억울한 죽음은 세상을 분노케 했다. 영원히 은폐될 뻔 했던 이 억울한 죽음을 세상 밖으로 꺼낸 사람이 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짧은 2단짜리 기사로 역사를 바꿔놓은 사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당시 중앙일보 법조기자 신성호 교수이다. 신성호 교수는 한국 민주화의 물꼬를 튼 보도를 한 영광스러운 기자 생활을 거쳐 현재 우리 학교 교수로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할까. 또, 교수로서의 그는 어떤 모습일까. 이번 인물포커스에서는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최초 보도의 주인공, 신성호 교수를 만나보았다.



6월 항쟁과 민주화 운동을 그린 영화 ‘1987’의 큰 흥행 덕분에 신성호 교수를 찾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당시 취재 과정과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취재진들과 함께 신성호 교수는 바쁜 방학을 보내고 있다. 그는 ‘1987’을 두 번 관람하였다. 첫 관람은 12월 13일 시사회 때였다. 영화에서 다뤄진 실존 인물들 중 한 명인 그는 시사회에 초대받아 출연 배우들과 감독, 제작사 대표와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이때 그는 당시 사건을 최초 보도하고 뒤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모두 취재한 기자로서 영화가 실제 상황을 얼마나 잘 묘사했는지 분석하는 입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두 번째 관람은 우리 학교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했다. 이번에는 분석적이기 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감상했고, 그래서 그런지 옛날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사회 묘사나 대학 생활에 대한 표현은 실제와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세부적으로 분석했을 때는 사실과 많이 다르거나 과장된 부분도 있어요. 제 이야기를 다룬 부분 역시 마찬가지에요. 저는 박종철 사건의 첫 보도 장면에 등장하는데, 그 장면은 사실과는 조금 다르게 연출되었어요. 실제로는 박종철 사건 최초 보도를 위해 두 시간 가량을 당시 대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을 오가며 바삐 취재했어요. 그렇게 숨 가쁘게 추적해서 여러 개의 사건을 퍼즐 맞추듯이 조합하여 박종철 군의 죽음을 겨우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영화를 보면 검찰 간부 방에 가서 간부가 흘려준 정보를 덥석 물어서 쉽게 보도한 것처럼 너무 간단하게 묘사가 돼요.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고 억울한 부분입니다.



서울고등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신성호 교수는 신문기자를 꿈꿨다. 그는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저널리스트가 돼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언론인의 꿈을 키운 그는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한다. 대학에 와서도 그의 꿈은 여전히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일편단심으로 키워온 꿈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대학교 4학년 가을, 당시 중앙일보 동양방송 기자시험에 당당히 합격한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중앙일보 동양방송의 TV와 라디오 방송은 강제로 폐지된다. 신군부가 신문사에서 신문하고 방송을 같이 경영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그의 합격은 취소된다. 곧 졸업을 앞둔 그는 하는 수 없이 교수님을 찾아가서 취직 추천을 부탁한다. 이후 대기업 인사팀에 취직한 그는 안정적이지만 지루한 회사 생활을 한다.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매일 경제에서 언론 통폐합 이후 처음으로 기자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발견한다. 그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81년 3월에 매일 경제에 합격했다. 그렇게 경제신문에서 근무하던 중 신성호 교수는 중앙일보 기자 채용 공고 소식을 접하게 되고, 운명처럼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81년 10월, 중앙일보에 다시 취직해 그 이후로 30년간 중앙일보에서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로 활동, 그 중에서도 12년 동안을 법조기자로 활동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는 내 인생에서 기자로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자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어요. 그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할 때 이미 보통 사건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엄청난 사건이라는 걸 기자의 직감으로 느꼈죠. 이 사건 이후에 기자로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나중 일이지만 박사학위 논문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국 민주화 과정에 대한 분석을 한 내용으로 썼고, 특종 1987이란 책도 쓸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여러 의미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죠.

그렇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는 한편으로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이기도 했어요. 하마터면 이 사건 때문에 기자생활을 접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날 저녁에 사회부 전체 기자회의 후 회식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어느 선배가 “오늘 밤에 집에 들어가지 마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에서 널 잡아갈 수도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시절 우리 사회는 매우 억압되고 통제된 사회였을 뿐더러 언론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가끔 기자들 혹은 편집국장들을 정부기관에서 데려다가 조사하는 일들이 왕왕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날 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 근처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웠어요. 여관방에서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1987년이 기자 생활 7년차가 되던 해였는데 당시 부모님도 모시고 살고 자식 두 명과 부인까지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정부의 압박으로 기자 생활을 그만둔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하고 걱정이 됐어요.

그렇게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나서 새벽녘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좋다. 설사 여기서 내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더라도 그 동안 기자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나는 당당하다.’ 훗날 애들이 커서 혹은 나중에 언론사 후배들이 “예전에 신문 기자 하실 때 무얼 하셨습니까?” 라고 물을 때 "박종철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어렵게 취재해서 세상에 알렸다." 라고 말 할 수 있으면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신감이 생겼고, 비로소 어떤 일에도 겁내지 않을 용기가 생겼어요. 그리고 다음날 오후에야 회사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거의 24시간 가까이 잠적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죠. 나중에야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정부 기관에서 실제로 저를 조사하려고 했으나 외신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는 바람에 자칫하면 일이 더 시끄러워 질까 봐 조사를 포기했다고 해요."



신성호 교수는 언론사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도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던 그는 신문사 이외에 다른 직장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은 한 해를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성호 교수는 2007년 고려대학교에서 1년 동안 강의를 하게 된다. 당시 현장감 넘치는 강의를 해줄 현직에 있는 중견 기자를 원한 학교의 요구에 맞추어 중앙일보는 몇 명의 기자를 뽑아 초빙교수로서 파견했는데, 그도 그 기자들 중 한 명으로 선발된 것이다. 1년간 중앙일보 업무를 휴직한 상태로 강의를 하면서 그는 언론사 입사를 꿈꾸는 미래의 언론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상당히 보람찬 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후 중앙일보에 복귀했지만 나중에 신문사를 떠나 후배들을 지도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복귀 당시 갓 50대에 접어들어서 자신의 나이 때문에 교수의 꿈을 갖기를 수도 없이 망설였다. 50을 넘긴 나이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내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확정 짓고 뒤늦게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식 또래하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젊은 학생들 못지않은 열정을 불태웠다. 고등학생 때도 안 쏟아본 코피도 쏟아봤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중앙일보를 퇴직한 이후 우리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 많은 대학의 초빙교수로 강의하며 경험을 쌓은 그는 2014년에 마침내 우리학교 교수가 됐다.



 신성호 교수는 현재 ‘언론실무교육’ 과 ‘언론보도분석’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언론실무교육’은 여러 유형의 기사를 직접 작성해보는 수업이다. 학생들은 사건, 사고, 기획, 범죄 기사 등 다양한 종류의 기사를 실제로 작성해보는 기회를 갖는다. 국어, 영어, 상식 시험만 통과하면 됐던 예전의 언론사 채용 시스템과 달리 요즘은 실제 기사를 작성하는 실무 평가가 이루어진다. 신성호 교수는 신문사나 방송사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이 많은 신문방송학과에서 이러한 실무 평가를 미리 연습해보도록 하는 취지에서 이 수업을 개설했다. ‘언론보도분석’은 ‘언론실무교육’에서 한 단계 심화된 내용을 다루는 수업이다. 이 수업에서는 같은 내용의 사건이 나라별 언론사에서 어떻게 다르게 보도되는지 비교 분석하는 시간을 갖는다.

신성호 교수의 모든 수업에는 신문을 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언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 때문에 사람들이 전자 매체만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신문은 레이아웃 자체만으로 모든 기사에 가치를 부여한다. 톱에 실린 기사는 그 날의 신문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내용을 다룬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인쇄된 신문을 읽는 독자는 아무런 가치부여 없이 나열된 인터넷 기사를 읽는 독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해도를 갖게 된다. 언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문을 무조건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이자 신성호 교수가 수업의 앞머리에 반드시 학생들에게 신문을 읽히고 토론을 시키는 이유이다.

늘 학생들을 배려하고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강의하는 신성호 교수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수이고 싶을까. 그는 학생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선배 언론인으로 평가되고 싶다고 말한다. 신문방송학과라는 특성 상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신문사나 방송사 취업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신성호 교수는 이러한 학생들이 훗날 닮고 싶은 언론인, 본받고 싶은 교수로 기억되고 싶다.



“제가 대학에 와서 강의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요즘 학생들은 예전보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시위에 열중하고, 휴교도 잦았던 우리 때의 대학 생활과는 달리 요즘 학생들은 일찍부터 화려한 스펙도 쌓고, 학점 관리에도 충실하죠. 이렇게 우리 학생들이 열심히 사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예전의 대학생들은 우리 이웃과 사회, 크게는 우리 국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의 대학생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만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주변에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취직이나 스펙 쌓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 처럼요.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사회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 공동체의식을 좀 더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것은 대학 다닐 때 뭐든지 많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책, 영화, 연극도 많이 보고 여행가서 넓은 세상도 보고 오세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대학시절에 무엇이든 많이 봐야 해요. 그러면, 그렇게 보고 경험한 것들이 사회에 나가서 모든 일의 밑바탕이 되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