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正道)를 걷는 삶 –
박영수(상학과 58) 동문

  • 492호
  • 기사입력 2022.05.30
  • 취재 송명진 기자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5041

우리는 도리를 다하는 삶을 정도(正道)의 삶이라 부른다. 공부할 땐 학생의 도리를, 회사를 이끌 땐 경영자의 도리를, 후배들에게는 선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곧 정도(正道) 위에 서는 것이다. 이번 호 <인물포커스>의 주인공은 정도를 닦고 그 위에 설 줄 아는 개척자, 박영수 회장이다. 그는 성균관대학에 입학하던 1958년부터 지금까지 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럼 이제, 굳은 신념으로 성공을 쟁취한 인생 선배의 이야기에 포커스인(focus-in) 해보자.


Q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상학과 58학번 박영수입니다. 효성물산, 선경 등을 거쳐 96년까지 진로그룹의 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2019년까지 본사가 스위스에 있는 은행에서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하여 영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일년에 한번씩 모교를 찾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Q2. 요즘 어떨 때 가장 행복하신가요? 회장님의 취미가 궁금해요.

정도를 걸으며 사회에서 큰 몫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 흐뭇합니다. 그 친구들에게 선배님 소리를 들으며 근황을 나눌 때 행복하지요. 글쎄요 취미는 별 게 없는 것 같네요. 독서와 명상을 즐기고, 책은 주로 역사책을 많이 읽습니다.


Q3.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해마다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시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4·19 혁명 이후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시멘트 회사인 대한양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장학재단인 삼일장학재단을 만들었고, 전국 대학을 상대로 많은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한달에 30만원. 등록금 내고,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는 큰돈이었지요. 서울대학교에는 모든 단과대학에 이 장학금이 주어졌고, 타 대학에는 3개에서 5개정도 배당되었고, 우리 성균관대학교에는 딱 두 명에게 이 장학금이 배당되었습니다. 문과에서 한 명, 이과에서 한 명 총 두명의 학생이 이 삼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운이 좋게 그 혜택을 내가 문과 대표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말부터는 특대생 혜택을 반납하고, 이 삼일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습니다. 삼일 장학 재단에서 학부 졸업 후에도 2년 더 나를 지원해준 덕에 대학원까지 장학금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요. 총 6년간 장학금을 받아 졸업까지 하고 나니, 언젠가 내가 받은 것을 반드시 모교와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짐을 지금도 찬찬히 이뤄나가는 중입니다. 나는 성균관대학의 덕을 참 많이 봤으니까요.


Q4. 대학 재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학부 3학년 때, 4.19 혁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학에서도 학생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지요. 그런데 정부에 협조하는 운영위원회 녀석들이 학생들에게 공포심을 주면서 교문을 막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는 돈 많고 힘이 세면 학생회장 시켜주던 때니까요. 그 광경을 보고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때 대의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학생회가 행정부라면 대의원회는 입법부의 역할을 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학점 평점이 B학점 이상인 자만이 학생회장에 출마할 수 있다’ 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인데, 적어도 그런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학생 대표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 법때문에 몇명이 사퇴를 했는지 모릅니다. 숙소에 찾아와 나를 때려죽이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시 4개 단과대학의 장들이 모두 사퇴하고 단 한 명의 운영위원장이 남았어요. 그게 바로 지금 총동문회장을 하고 있는 류덕희에요(웃음). 내가 학교를 떠나고 나서는 이 법이 어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배를 위해 학교를 위해 이거 하나는 만들고 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Q5.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나왔을 때 회장님은 무엇을 목표하고 계셨나요?

나는 원래 법대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근데 내 형님께서 대학 원서를 쓰기 직전에 강력하게 상과 진학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나도 그런 형님의 말에 동의했고, 결국 상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배경이 있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회에 나와서는 은행에 잠시 있었습니다. 그때는 은행이 가장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던 시대여서 내 뜻보다는 주변의 뜻으로 은행에 입사를 했어요. 하지만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두 달 가량을 다니다 은행에 사표를 내고 효성물산에 입사시험을 봤습니다. 그때가 효성이 막 삼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첫번쨰 공개채용을 하던 때입니다. 61년에 졸업해 군대를 다녀왔고 63년 가을에 시험을 본 뒤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Q6. 뉴욕에서 일을 하셨고, 지금은 영국에 살고 계세요. 한국을 떠나 사는 것은 어떠신가요? 지금의 삶을 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해외에 나가게 된 것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랍니다. 뉴욕과 영국 모두 일 때문에 부름을 받아 간 것이지, 계획된 바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뉴욕에는 초대 뉴욕지사장으로 파견되어 5년간 근무하고 1976년 귀국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유공인수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회사로부터 영국에 직접 가서 유공 원유 공급을 원활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민이 무척 되었지만, 십 몇 년을 근무한 회사에서 도움이 간절하다고 하니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갖춰진 환경에서 아이들 교육에 신경 써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고심 끝에 1981년 2월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러나 저러나 영국에 정착해 아들 둘을 잘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에 가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어린 우리 아이들이었는데, 형제 둘이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 중등학교인 이튼 스쿨에 입학해주었어요. 작은 아들은 수석 입학, 큰 아들은 수석 졸업을 했지요. 생각해보면 아직도 기특하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Q7. 우리에게 친숙한 맥주, '카스' 를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제품 개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처음에 진로에서 맥주 합작 추진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로에는 오직 소주와 고량주 뿐이라 진로그룹의 수뇌부에서 사세 확장을 위해 나를 찾은 것 입니다. 후발 메이커인 진로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유럽의 맥주보다 질이 좋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는 브랜드와의 합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확실한 품질의 ‘쿠어스’ 맥주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처음엔 쿠어스를 설득하기 위해 직원을 보내 봤습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어요. 한국의 작은 소주 회사인 진로를 그들이 알리가 없으니 말이지요. 마침 위스키 브랜드 조니 워커의 회장이 내 옥스포드 경영학부 동창이에요. 그래서 주류 업계 거물인 그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내가 직접 찾아가 쿠어스와 함께 일하고 싶은 이유를 솔직하게 전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실제로 쿠어스에 찾아가 쿠어스가 제일 좋은 맥주라고 생각한 이유를 직접 전했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긍정적인 답변이라 함은, ‘좋은 물을 찾아라. 일단 좋은 물을 찾아오면 다음은 생각해보겠다’ 였습니다. 한번은 대차게 거절을 당했으니 이만하면 긍정적인 답변이지요. 미션을 받았으니, 그때부터는 질 좋은 물을 양껏 확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런데 질 좋은 물을 양껏 확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어요. 물의 양은 알 수 있다 해도 물의 질을 판단하는 기술력이 당시 한국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조니 워커 회장에게 전화를 했지요. 상황을 설명하니 그 친구가 그럴 줄 알았다며 내게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가 밝힌 비책은, 바로 소련의 과학자들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소련으로 향했고, 그들에게 수원지 탐색을 부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곳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카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카스Cass 라는 네이밍도 내가 직접 한 것이에요. C는 쿠어스의 C이고, 뒤에 오는 글자는 맥주를 개발한 사람의 이니셜을 따줬습니다.


Q8. 오랫동안 리더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직접 그 자리에서 경험하며 깨달은 리더의 자질은 무엇인가요?

리더의 자질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실하고, 자신감은 충만하되, 상식이 통하는 인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단 출발은 저자세에서 겸손해야 하지요. 그래야 성실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자신감을 기반에 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드는 때에 밀어 부칠 수 있는 사람만이 리더입니다. 또한 상식이 통한다는 것은 곧 정도를 걷는다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길에 미혹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리더가 아니지요. 정리하자면 평소에는 저자세를 유지하되, 결단의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하며,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Q9. 마지막으로 학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제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일찍 귀국하여 국가를 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 것입니다. 비이성적인 판단이 난무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감정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바로잡고 희망찬 정도(正道)의 미래로 나라와 국민을 인도할 후배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박영수 동문 약력

      ○ 학  력
       - ‘57 경북고 졸업
       - ‘61 성균관대 경상대학 상학과 졸업
       - ‘64 성균관대학원 무역 석사
       - ‘84 영국 옥스펴드대 경영학 수료

     ○ 경  력
       - ‘64 효성물산
       - ‘86 선경 사장
       - ‘90 진로그룹 기획조정실 실장
       - ‘91 진로그룹 제조부문담당 부회장 겸 연합전선 회장
       - ‘93 진로그룹 기획조정실 실장
       - ‘95~’96 진로그룹 부회장 겸 유통부문총괄 회장
       - '97년 국회 정보통신 자문위원장
       - ‘05 넷피아닷컴 경영부문 총괄 회장

     ○ 상  훈
       - ‘84 국무총리표창(수출특수지역개발)
       - '97 국민 훈장(노무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