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근(체교·80)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장

  • 515호
  • 기사입력 2023.05.16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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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뉴델리 아시안게임 육상 단거리 100m 은메달과 200m 금메달을 석권한데 이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200m도 금메달을 획득한 아시아 육상의 전설이 있다. 바로 체육교육과 80학번 장재근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장재근 동문은 육상 단거리 부분에서 한국최초의 타이틀을 모두 갱신한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자였다. 장동문은 은퇴 후, 육상 국가대표 단거리 감독,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서울시청 감독을 역임하며 선수양성과 관리에 대한 역량까지 인정받았다. 올해 3월2일, 제26대 국가대표선수촌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장재근 동문을 만나보았다.


Q1. 육상 단거리 스타로 당시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82년, 86년 아시안 게임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82년도 당시는 成大 3학년이었어요. 사실 얼떨결에 국가대표로 선발돼서 기대도 안 했는데 금메달을 딴 거죠. 우리학교 최초로 그리고 아시아대회에서 더군다나 육상 단거리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플랭카드도 걸리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때 아시아에서 1등 하던 도요다라는 일본선수가 있었는데 ‘일본은 꼭 이기고 싶다.’ ‘이 선수를 어떻게든 꼭 이겨야 되겠다.’ 이런 마음만 있었던 것 같아요.

86년도 서울 아시안게임은 成大를 졸업하고 나서 출전했습니다. 우리나라 안방인데다 금메달 후보여서 금메달을 따야만 본전이라 죽기 살기로 뛰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100m에서는 못 땄지만 200m에서 아시안게임 연속 2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Q2. 1990년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했는데, 당시 기억과 느낌은?

당시에는 훈련을 하면 계속 부상이 생겨서 ‘이제 조금 힘들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한번은 200m 예선을 뛰는데 1등으로 가다가 마지막에 잡혀서 2등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딱 느낌이 안 되겠구나 했어요. 국내대회에서 계속 선수생활을 하면 1등은 할 수 있었지만, 굳이 아시아에서 1등 했던 선수가 국내에서 1등하기 위해서 또 선수생명을 연장한다는 건 자존심도 상했고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그만두는 게 좋은 것 같다.’라는 생각에 어떻게 보면 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7등 한 것을 빌미 삼아 그 자리에서 은퇴 해버린 거죠.


Q3. 선수시절 힘든 훈련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때는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누구라도 선수들은 새벽, 오전, 오후 계속 이렇게 다 하니까 ‘그냥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저는 시골에서 올라왔고 서울도 잘 모르고 82년도까지는 통행금지도 있었습니다. 어디 갈 데도 별로 없었고 지금처럼 힘들면 좀 쉬었다 하고 이런 개념이 아니라 그때는 그냥 반강압적으로 무조건 스케줄이 잡히면 해야 되는 것이었죠. 그때 유일한 바람이 빨리 토요일 오후가 돼서 외박 나가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의 꿈이었죠. 딱 한 번 그 꿈을 위해서 운동했어요.


Q4. 은퇴이후에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은퇴 후 98년 국가대표 코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코치를 거쳐 2019년 서울시청 육상감독을 했습니다. 그 전에 잠깐 에어로빅으로 방송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직장인 한전에서는 월급을 약50만 원 받았는데 에어로빅은 하루에 10만 원 준다니까 큰돈이었죠. 당시 계획은 1년 모아서 ‘평생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골프 유학을 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으로 에어로빅을 시작했습니다. 에어로빅이 인기가 높아지고 SBS에서 모음집으로 비디오도 출시하고 자연스럽게 홈쇼핑이 도입되면서 급성장할 때 홈쇼핑도 하면서 시청자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더 이상 이쪽으로 빠지면 다시는 못 돌아가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98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죠. 집에서는 수입이 변변치 않으니 싫어했지만, 저는 육상에 다시 돌아가는 순간 돈을 떠나서 너무 행복하니까 이건 꼭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Q5. 한국실업육상연맹 전국실업육상경기 조직위원장 당시 주안점은?

2년 전에 했는데 실업팀이 지금 약 90여 개 있습니다. 저는 이 ‘90개 팀을 통합해서 시리즈로 만들어서 최종 챔피언을 한 번 만들어보자’라는 시나리오로 실업연맹에서 처음 시도하는 1대 조직위원장을 하게 됐죠. 지금도 매년 1차, 2차, 3차 리그 후에 4차 최종 이런 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Q6.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는데, 계획은?



제가 올해 3월 2일 자로 선수촌장에 취임했는데요. 우리가 지난 팔렘방 아시안게임과 도쿄올림픽 때 엘리트 체육이 무너지면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올해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과 내년 7월 파리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은 서로 상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종목과 선수를 만들어내는 게 제 책임이고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아시안게임이고 올림픽이라는 거죠. 박태환의 금메달로 수영 인구가 늘고 배드민턴 안세영이 1996년 방수현 이후 27년만에 금메달을 따니 배드민턴 인구가 늘고 그렇게 국민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모티브를 만들 엘리트 체육을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Q7.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나, 존경하는 인물을 소개해주신다면?

제 인생의 전환점은 IMF때로 생각됩니다. 당시 방송을 하면서 먹고 살만한 시기에 갑자기 IMF가 오면서 집도 은행에 맡기고 굉장히 힘들어졌어요. 그때 저는 인생을 재정립하고 다시 육상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어려움과 아픔이 저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었고 지금의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끔 만들어준 것 같아요.


존경하는 인물은 돌아가신 김성집 촌장님(재임기간: 1976~1994년)입니다.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역도종목 동메달을 따신 분입니다. 그 분이 호랑이 촌장이실 때 제가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태능선수촌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몸소 새벽에 나와 선수들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외길을 갈수 있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게 하셨습니다. 새삼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니가 뭐 대단한 선수라고” 하면서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겸손하도록 꾸짖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Q8. 성균관대에서의 추억과 기억나는 동문은?

제가 成大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다 했지만, 매번 외국에 전지훈련 나가고 이러다 보니까 대학생활에 추억이 많지는 않아요. 성대의 인물로서 모교를 빛내기 위해 기여한 부분도 별로 없는 것 같고요. 먹고살기 힘들었고 국가대표 육상선수로서 항상 훈련에만 매진하는 선수로만 살아왔던 거죠. 금메달 2개로 모교 명성을 조금 빛낸 것이 추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기억나는 동문은 같은 육상 쪽에 한기권이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국가대표고 그 선수는 국가대표가 아니어서 대학을 다니면서 거의 만날 일이 없었어요. 대신 김승철 교수님이 늘 생각납니다. 담당교수님이셔서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인사 드립니다.


Q9. 앞으로 계획은?

계획은 선수촌장으로서 소임을 다해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성공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멋지게 은퇴하는 게 제 꿈입니다. 그러면 제 고향인 육상으로 다시 갈 수도 있고 체육분야에 평생 있겠죠. 아니면 교육자로서 후학들에게 또 운동선수들에게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좋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