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에서 교수로, 사학과 정재환 교수

  • 402호
  • 기사입력 2018.08.31
  • 취재 구민정 기자
  • 편집 주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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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에 개그맨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아깝고 소중한 청춘 속 십년이라는 긴 시간을 무명 속에 살았고, 스물아홉에 드디어 누구나 알 법한 방송인이 되었다.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드라마도 출연하며 바라던 방송인으로서의 탄탄대로를 달리던 와중, 자연스레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방송인으로서 국어를 보다 정확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과 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마흔의 젊지 않은 나이에 우리학교에 입학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몸소 증명해내며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현재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오늘은 끊임없는 자기발전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정재환 교수(사학00)를 만나보았다.


◈ 방송인에서 교수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사람이 그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스타 반열에 오른 개그맨이 어떻게 공부에, 그것도 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방송을 하면서 한글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관심이 체계적인 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졌고요. 방송하는 사람으로서 공부하면 나 자신도 성숙해짐은 물론이고 대중들에게 정보나 지식, 혹은 웃음을 전해주는데 더 발전된 면모를 보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왜 하필 사학이냐 묻는다면, 제가 일 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가 크게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국어, 다른 하나는 역사였어요.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독서를 할 때도 주로 국어책과 역사책을 읽고는 했어요. 대학에 입학 한 후, 한글 문제를 역사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부터 공부를 깊이 있게 오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대학원 진학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부에 투자했어요. 학부생 때는 계절학기 수업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했죠. 전 날마다 출근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방송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공부를 한다면, 공부와 일 두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병행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어쩌면 과신이고 자만이었을 수 도 있죠. 학부 졸업 때까지 제 생각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대학원 공부를 하다 보니 방송일은 자연스레 줄어들고 공부하는 시간이 삶에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어요. 학교를 너무 열심히 다니다 보니 방송국 관계자 분들께서 제가 일이 간절하지 않고, 방송에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품은 것 같기도 해요. 박사 학위를 밟는 과정에서는 점점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기 버거워졌어요. 그러다 보니 방송계에서는 두드러지는 활동 없이 서서히 잊힌 것 같아요.


이후에 교수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분명하게 세운 건 아니었어요. 학교에서 강의를 해 줄 수 있겠냐는 제의가 들어오고 나서 고민해보니, 무언가를 배운 뒤에 나만 그 지식과 내용을 알고 있기 보다는 남과 나누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강의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변화는 일으킬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학교 후배들에게는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흔쾌히 강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스갯소리로 “난 평생 비정규직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니곤 해요. 방송인은 당연히 일정한 일이 없는 비정규직이고, 그렇다고 제가 전임교수도 아니잖아요. 이런 삶을 살다보면 직업적인 안정감이 떨어진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유가 있어 좋아요. 어떻게 보면 제가 비정규직이라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내 공부도 할 수 있고, 여행과 답사도 다니고, 책 쓸 시간도 생기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가끔 어딘가에 전임으로 취직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 안나요.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뒷받침만 된다면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 같아요.”



◈ 정재환 교수의 한국사개설


한국사개설은 교양과목으로 한국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한 학기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한국사 전체를 다루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이때문에 정재환 교수는 자신이 가장 잘 전달할 수 있겠다 싶은 내용을 위주로 가르친다. 주로 해방 이후 내용을 다루고, 정치사나 제도사 보다는 관계사에 대한 주제를 선정할 때가 많다. 정재환 교수가 특히 흥미를 갖고 공부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나 조선어학회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활동에 대한 내용도 강의에 포함된다. 정재환 교수는 지난 3~4년 동안 한국사개설 강의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배운다.’라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강의를 하면서 예전에 공부할 때는 잘 모르고 지나갔던 내용들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배움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역사 공부


정재환 교수의 방송인으로서의 경험이 그가 강의를 하는 데 어떤 시너지를 일으키는지, 그가 생각하는 역사 공부는 무엇인지. 그의 생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사실 수업 시간에 제가 개그맨이었다는 얘기를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아요. 간혹 고학년 학생들 중에는 저를 어렴풋이 알아보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 친구들도 있어요(웃음). 방송에서 제가 늘 해 온 일이 대중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거예요. 그 무엇인가가 정보나 지식이 될 때도, 혹은 웃음이 될 때도 있었죠. 그와 일맥상통하는 논리로 강의 역시 내가 배운 내용과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거잖아요. 능숙하고 노련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는 방송인으로서의 경험이 강의에 도움이 돼요.


수업 중에 방송처럼 농담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재밌게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기도 해요. 가끔 재미있는 옛날 얘기나 야사를 기대하고 역사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런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실망할 가능성이 커요. 역사 수업에서는 가벼운 농담조차 용납할 수 없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주제들을 다룰 때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라던가 한국전쟁 같은 우울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전할 때는 수업이 저절로 딱딱해지고 엄숙해질 때가 많아요.


역사 공부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도 텔레비전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자극적이고 오락적으로 가공되어 있는 역사 영상과 같은 수업만 기대하기 보다는,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교수와 방송인으로서 앞으로의 목표


“앞으로의 목표를 말하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방송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책도 꾸준히 쓰고 싶어요. 책을 몇 권 쓰기는 했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과 역사 지식을 폭넓게 나눌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써 보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글 기행’이라는 테마로 한글에 관련된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한글의 역사를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방송 쪽에는 큰 욕심이 없어요. 흔히 쓰는 말로 ‘제2의 전성기’를 도모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제가 공부한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방송이 있다면 흔쾌히 출연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글 운동을 계속 하고 싶어요. 한글 운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예를 들면 국어를 정확하게 쓰기, 한자나 영어 같은 외래어 대신 한글 쓰기, 어려운 말 때문에 불평등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도록 쉬운 한글 쓰기와 같은 운동들이 있어요. 지금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한글문화연대에서 진행하는 이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 수업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학생들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수업시간에 좀 더 집중해주고 질문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항상 10분 정도 질문받는 시간을 갖는데, 학생들이 질문이 없어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때도 많아요. 제 경험상 사전에 예습을 하거나 교재를 미리 읽어보면 질문할거리가 많이 생기는데, 아무래도 그런 사전학습이 좀 결여되어 있는 듯해요. 또, 책 보고 공부만 하는 게 대학생활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폭 넓게 경험하고,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꼭 발견해서 즐겁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