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음악 속에서 삶을 찾다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학우

  • 502호
  • 기사입력 2022.11.01
  • 취재 박창준 기자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5055

한 가지 일에 몰두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으며 음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나볼 학우는 국악음반수집에 온 정신을 쏟아냈던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학우(동아시아학과 석사 4기)다. 많은 이들에게 국악 음반이라는 것은 본 적이 거의 없거나 생소한 것일 수 있다. 국악은 우리 고유의 음악이자 소리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소리를 보전할 필요성을 잊고 살곤 한다. 국악음반은 그러한 우리의 음악을 지켜내는 데 아주 소중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 그가 어떠한 계기로 국악 음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 어떤 활동을 통해 우리 음악을 보전하려는 것인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아시아학과 석사과정 4기 노재명입니다. 주로 동아시아 문화예술,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판소리를 연구하고 있어요. 사회에서는 판소리 설치미술가, 한국 고음반연구회 대표, 국악 강연, 다큐 감독, 공연 연출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현재 국악음반박물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국악음반 박물관은 어떤 곳인가요.


제가 1986년부터 지금까지 63,000여점의 국악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이들이 대한민국, 더 나아가 지구의 문화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고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설립했습니다. 2000년에 국악음반박물관 홈페이지(hearkorea.com)를 개설했고 2001년에 국악음반박물관 건물을 완공해 개관했어요. 근래에 용답동의 국악음반박물관 서울연구소가 서울시청으로부터 음악 명소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주로 국악 음반을 수집, 연구하고 이를 많은 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출판물로 제작하거나 유튜브 채널, 홈페이지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어요. 박물관 운영 재정은 박물관의 자체 연구 성과물 수익금 등 거의 자력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국악 음반’은 현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다른 음악 분야와는 달리 접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국악에 매료되신 그 시작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배재고교 2학년 때 국악에 입문했습니다. 외국 음악 빽판(복제음반)을 사러 다니던 청계천 음반상점의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임방울 명창의 춘향가 <쑥대머리> LP음반을 우연히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음악을 무척 좋아해 여러 음악을 많이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고2 때까지 학교나 사회에서 국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왜 우리 고유의 음악은 안 듣고 있었나 반성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사회 반발 심리로 젊은 혈기에 영어 공부하듯이 하루 종일 국악만 들었고 고교 졸업 땐 임방울 명창 수궁가 녹음을 완창할 수 있을 정도로 외워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릎 장단을 맞춰 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조상현, 김수연 명창을 찾아가 판소리를 배웠고 사회 생활하면서 소리북, 단소, 거문고를 익혔어요.


▲ 왼쪽부터 노재명 학우를 국악의 길로 인도한 임방울 명창 <쑥대머리> LP음반, 1906년에 송만갑 명창이 녹음한 <농부가> SP음반으로 최초의 판소리 음반이자 국악음반박물관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희귀 자료. 1929년에 박록주 명창이 녹음한 <대관강산> SP음반.



♠ 국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신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1980년대에는 인간문화재 명인명창들이 대거 작고하던 때라 그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저는 하루에 10가지씩 국악과 관련된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언젠가는 국가의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하며 음반 구매, 방송 녹음, 공연 관람, 신문 스크랩, 명인 인터뷰 등 매일 10가지를 채우려 노력했고 그렇게 모은 자료로 후에 박물관까지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하여 틈틈이 논문, 저서를 발표하고 고음원 복각 음반을 제작하고 KBS, 국악방송 등에서 국악 희귀 녹음을 소개하는 MC로 활동했어요.


▲ 노재명 학우가 1993년 판소리 인간문화재 한승호 명창을 처음 인터뷰했을 때와 2009년 마지막 만났을 때 모습. 

노재명 학우는 800여명의 국악 명인들을 면담 기록했다.



♠ 현재 성균관대 대학원 동아시아학과 석사과정에 재학중이신데 무슨 연구를 하시는지.


그동안은 주로 국악 자료 수집과 현장 조사 작업에 매진했고 국악 원로 명인들을 800여명 면담하여 구술 기록 작업을 했습니다. 1~2세대 국악 인간문화재 명인명창들은 거의 다 별세하셨고, 그간 모으고 조사 연구한 성과들을 학문적으로 정립하여 후세에 보탬이 됐으면 했어요. 국악과 더불어 신중현 작곡가의 대중음악, 실크로드음악 현지 조사도 병행하였으며 그 관련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싶어서 동아시아학과 석사과정을 밟게 되었고, 최근 박사과정 입학에도 지원했습니다.


▲ 2014년 노재명 학우가 아르메니아 민속 가무악을 현지 조사 기록화 작업할 당시 모습.

아르메니아 전통춤 원로 수렌 기얀드 주미얀 명인 일행 무용단과 노재명 학우.



♠ ‘국악 음반 세계 최다 보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십니다. 혹시 국악음반 수집에 대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송만갑 명창의 <농부가>가 워낙 유명하고 좋아서 시대별로 총 5종의 SP음반, 이동백 명창의 <새타령>은 총 5종의 SP음반이 발매되었어요. 그 음반들은 정말 희귀한 것들이라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제가 그 10종을 모두 구한 유일한 사람이고 이렇게 구할 확률은 로또 복권 여러 번 당첨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루 종일 계속 음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다 보니 이루어진 것 같아요.


♠ 보유 중인 국악 음반 중에서 가장 아끼는 음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록주 명창의 <대관강산> SP음반입니다. 박록주 명창의 스승 박기홍 명창은 ‘가신’(歌神), ‘가선’(歌仙)이라는 한국 음악 역사상 최고의 극찬을 받은 대가지만 박기홍 명창은 녹음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제자 박록주 명창의 <대관강산> 음반이 박기홍 명창의 소리제로 확인된 유일한 녹음이라 박록주 명창의 대관강산을 가장 아낍니다. 이 음반은 아주 높은 경지의 예술성이 담겨있습니다. 만약 수 백년 후 다른 행성으로 탈출할 일이 있다면 이 음반을 꼭 가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1인당 1개만 우주선에 소지하고 탈 수 있다면 이 음반만은 꼭 가지고 가서 지구에 이렇게 훌륭한 음악이 존재했다는 것을 실증자료로 보존해 주었으면 하네요.


♠ 국악음반박물관을 운영하는데 어떤 어려운 점이 있나요


골동품상점 등에서 옛 문화예술 자료들을 수집한 연세 지긋한 분들과 자주 교류했습니다. 주로 수집에 몰두하다가 노년에 박물관을 건립하거나, 타계와 함께 자료가 다시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저는 좀 일찍 박물관을 설립해서 후세에 잘 전해주고 싶었어요. 건물 짓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수해를 입어 고생도 했습니다. 순탄한 길이 아니었기에 후회한 적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이사를 한 적도 있어요. 아주 귀중한 음반이 고가에 나와서 아파트를 처분해서 구입한 적도 있고 부모님 목돈 드리려고 저축했던 통장을 허물어 음반을 산 적도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다 영원하진 못하고 수명이 있기에 이러한 자료도 언젠가는 소멸되겠지만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계속 자료를 모으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요.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와 노재명 학우가 고증하여 적은 기록.

한국국악협회 주최 ‘제4회 한국국악대상 시상식’(수상:안비취) 기념 1985년 사진.



♠ 국악만이 가지는 매력 혹은 자랑거리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국악 중에서도 판소리를 예로 들면 판소리가 수 백년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제 때 식민지교육과 정책으로 국악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생겨서 대중과 멀어졌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면 관객이 별로 없지만 선입견이 없는 상태의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판소리 공연을 하면 전석 매진이 될 정도로 인기있어요.


판소리는 단지 재미와 흥미만을 위해서 연행된 것이 아니고 그 정신 철학, 예술성이 정말 위대합니다. 판소리는 왜 유독 고음으로 소리를 크게 지르는가, 감미롭게 발라드로 할 수도 있는 걸 굳이 왜 그럴까 이런 의구심을 가질 수가 있지요. 판소리를 왜 그렇게 큰 통성, 목소리를 높여서 불렀는가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판소리의 핵심 정신과 만나게 돼요. 판소리에 ‘호령조’, ‘호통조’라는 용어가 있는데 왜 그리 꾸짖어 가면서 호령을 하면서 부를까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선조들이 판소리를 했던 이유, 판소리의 매력, 판소리의 본질과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서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세금을 내고 나면 먹을 게 없거나 심지어는 빚으로 세금을 내고 굶어야 되는 이들이 많았어요. 그렇게 가난하고 억울한 약자 계층을 대변해서 천대받았던 명창들이 목숨을 걸고 나서서 산속에 들어가 수련하여 스스로 앰프, 증폭기가 돼 전국을 유랑하면서 관리, 정치인들 귀에 들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온몸을 진동시켜 세상을 향해서 꾸짖는 창법이 나온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춘향가에선 권력자의 부정부패, 심청가에선 시각 장애·인신 매매, 적벽가에선 전쟁의 희생양 민중, 수궁가에선 약자를 속여서 빼앗으려는 신체 장기, 흥보가에선 맷값 금전 거래·서민의 가난. 이런 것들을 온몸으로 절규하듯 표현했기에 호령조, 호통조 통성이라는 발성법이 나온 거죠. 그래서 판소리는 단지 듣기 좋은 소리만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그 안에 단군 시대부터 내려온 홍익인간 정신이 담겨있어요. 이런 점이 가장 멋지고 두드러지게 훌륭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 ‘나’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때 ‘방학생활’이라는 숙제 책자가 있었어요. 방학 동안 답변을 성의껏 적기 위해 종이를 덧붙여 가며 열심히 써서 제출했더니 담임선생님께서 무척 칭찬해 주셔서 매사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중학교 2학년 때는 수업시간에 물리 선생님께서 "너희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셨고 아무도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때 제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선생님께서 칭찬하며 "그래 바꿀 수 있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 덕분인지 저 또한 소외된 국악 문화 흐름을 바꿔 보고 싶었어요. 명절 때 흔히 어른들이 어린 조카에게 “커서 뭐 되고 싶니, 어떤 사람 닮고 싶니?” 묻는 경우가 있고 주변을 보면 자녀들에게 진로를 강요하는 상황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제 부모님은 특정 직업이나 학업 강압 없이 방목 상태처럼 믿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자유를 주셨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장래에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스스로 고뇌하고 적성에 맞는 살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 제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 노재명 학우의 최신 저서 ‘동편제 심청가 흔적을 찾아서’ 책(동편제 심청가 걸작집 CD 내장).

노재명 학우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국악 음반과 서적을 400종 기획 제작했고 주요 국악 논문 46편과 국악 저서 49권을 발표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인가요?


국악과 세계민속음악의 비교 연구를 지속하고 국악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그간 태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조지아, 아르메니아, 네팔 등을 현지 조사하면서 한국 국악과 관련이 있는 외국 민속음악을 비교 고찰하였고 앞으로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현장조사 기록 작업을 더 진행할 계획입니다.


♠ 학우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외국인들은 퓨전 국악보다는 오리지널 국악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외국인들은 정통 국악을 진부하다거나 고리타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선하고 전위적이고 이국적인 신비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드라마, 케이팝, 한국 영화, 한식, 한국 웹툰 등에 이어 국악 한류 붐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어요. 탄력이 붙으면 그 어떤 한국 문화보다도 강렬한 파급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일제 억압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국악에 대한 안 좋은 관념도 없고 세계적으로 국악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폭되고 있으니 이제 국악 분야도 얼마든지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