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일상을 영원의 필름에 새기다,
문예은 학우(연기예술학과 21)

  • 574호
  • 기사입력 2025.10.27
  • 취재 박명준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 조회수 1341

가까운 사람들을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마저도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오면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질 때가 있다. 연기예술학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문예은 학우는 매일 보는 풍경,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카메라 앵글 안으로 끌어들여 평범함 사이에 숨은 진심을 담아낸다.


문예은 학우는 영화 <쏠롱>, <추모 (CHERISH)>, <찍는다, 찍지 않는다>를 통해 제22회 어퍼컷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하며 올해 President's List에 오르기도 했다. 이제는 졸업을 앞둔 문예은 학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있는 연기예술학과 21학번 문예은입니다. 인터뷰를 요청하기만 해봤지, 이렇게 응하는 건 처음이라 많이 부족하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 ‘어퍼컷 영화제’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시다, 올해는 감독으로 참가하여 수상을 하셨는데요. ‘어퍼컷 영화제’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어퍼컷 영화제’는 작고하신 故 김용태 교수님께서 만드신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만의 영화제입니다. 왜 이름을 ‘어퍼컷’으로 지으셨는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셨다고 들었지만, 교수님의 성향으로 보아 ‘세상에 한 방 먹이는’ 영화들을 기대하고 지으신 게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어퍼컷 영화제는 코로나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2023년에 재개되었습니다. 진빛남 교수님의 지도로, 겨우내 선배님들과 함께 먼지 쌓인 자료를 찾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행사를 다시 살리려 애쓰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집행위원들이 오직 학생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때 아예 영화제를 새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름도 아예 바꾸고, 새로 뭔가를 해보자는 얘기들이 나왔죠. 저도 나름 고민을 하는데, 고민할수록 ‘어퍼컷 영화제’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학과만의 색깔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하고, 시작할 때부터 ‘어퍼컷’으로 이어오던 전통을 없애기에는 너무 아쉬웠습니다.


전통을 고집하는 제 성격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어퍼컷이어야 하는지’를 어필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회의에 ‘싸게, 위대하게’, ‘삶이 그대를 칠지라도’, ‘지더라도, !’이라는, 언어유희를 활용한 섹션명을 들고 갔어요. 저야 워낙 언어유희를 좋아하니까 마음에 들었는데, 다들 유치하다고 할까봐 걱정했죠. 다행히 다들 반응이 좋았어요. 올해에는 감독으로 참여했는데, 고맙게도 아직 제 섹션명이 살아남았더라고요.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제게는 특히 애정이 있는 학과 행사입니다.


| 영화 <쏠롱>, 영화 <추모>, 그리고 내년에 공개될 <찍는다, 찍지 않는다>의 창작 계기를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1학년 때,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하니까 영화 한 편만 찍고 졸업할 거라고 그렇게 투덜거렸거든요. 절대 내가 나서서 영화 찍을 일은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 결국 세 편이나 찍어버렸네요. <쏠롱>과 <추모>는 ‘중급영화제작실습’이라는 수업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연출 전공은 수업 과제로 15분짜리 단편 영화를 제작해야 했는데, 그전까지 제대로 된 연출 경험이 없었고 '귀찮은' 작업은 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15분 동안 보여줄 만한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나온 게 <쏠롱>이었습니다. <쏠롱>은 머지않은 미래에, 한 과학자가 자신의 서른 살 생일 파티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 <쏠롱> 촬영 및 대본 리딩 현장


어쩌다 보니 그 생일 파티가 15분을 넘어 30분이 되어버렸고, 그 밖에도 여러 이유로 <쏠롱>을 수업에서 촬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쏠롱>은 개인 작품으로 방향을 틀고, 수업에 맞는 영화를 새로 만들기로 했어요. ‘<쏠롱>과 병행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하며 수업 끝나고 혜화역에 내려가는 10분 동안 생각해 낸 이야기가 <추모 CHERISH>예요. ‘아파트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이웃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는데, 하필 그 아파트에 유독 살인이 끊이질 않는다’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 <추모 CHERISH> 촬영 현장


<찍는다, 찍지 않는다>(일명 ‘찍찍’)는 사실 앞서 두 영화보다도 먼저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였어요. 한 편만 찍겠다는 영화로 생각하고 있었죠. 1년 정도 휴학하는 동안, 부모님과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어요. 평소에도 ‘우리 부모님만큼 재밌는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고급유머’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툭 던지는 말 같은데, 왠지 자꾸 웃음이 났어요. 연애 시절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요. 저희 부모님만 한 로맨틱 코미디 캐릭터가 없다는 생각에, 둘을 주인공으로 ‘그 시절’ 감성 시나리오를 썼어요.


▲ <찍는다, 찍지 않는다> 촬영 현장


‘찍찍’은 졸업을 하고 백수가 된, 영화감독 지망생 남자가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을 양립시키려고 애쓰는 이야기예요. 원래는 그냥 로맨스로 만들려고 했는데, 역시 제 장르가 아닌 건지 로맨스만으로는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제가 같은 시기에 매일 산책을 다니면서, 한국 우화나 전설을 조금 비튼 괴담을 썼던 게 생각났어요. 이상하게 그 괴담을 어떻게든 그 영화에 넣고 싶었는데, 마침 타셈 싱 감독의 <더 폴>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겉은 로맨스지만 속은 어딘가 이상한, 그런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습니다


 © 네이버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


| 영화 제작, 연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오히려 학교에 들어와서, 영화 수업을 듣고 다른 선배들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그전까지 저는 그냥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이미 많은 영화인들의 인터뷰에 나오는 레퍼토리지만, 저도 어릴 때부터 매주 부모님을 따라 극장에 갔어요. 지금은 부끄럽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영화평에 따라 ‘나중에 OTT로 보자’하지만, 그때는 그냥 평도 보지 않고 개봉한 영화는 다 본 것 같아요. 그래서 종종 ‘어떻게 이렇게 못 만들었을까’하는 영화들도 있었지만, 또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죠.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졌고, 학교를 못 나가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기대했던 학교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곳에 들어간 데다 그런 일까지 터지니, 엄마가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니 영화를 공부해 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영화과 입시는 일반 입시와 달라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3개월 정도 반수를 하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영화를 좋아하는 방법과 저만의 취향, 연출 스타일을 찾은 것 같아 기뻐요.


| 연기예술학과와 영상학과 중 연기예술학과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과냐, 문과냐‘인 것 같아요. 요즘은 문·이과가 통합돼서 맞는 비유일지는 모르겠네요. 영상학과는 ‘어떻게’를 가르치면, 연기예술학과는 ‘’를 가르친다고 느꼈어요. 저는 영상학과의 커리큘럼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얘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재학생들이나 복수전공을 하신 선배님들 경험담에 따르면, 영상학과는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의 제작 과정과 전문적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요.


반면, 연기예술학과는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연기 세 분야로 나뉘어 ‘우리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부터 공부해요. 연출자, 배우와 소통하고, 나의 목소리를 찾고, 무대를 직접 세워보는 작업을 하죠. 연출과 연기를 규정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죠. 어떤 과가 더 뛰어나거나 맞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스타일의 창작자인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지에 따라 선택하는 거죠.


|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이야기, 그것도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시트콤만큼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장르가 없다고 생각해요. 약 20분의 이야기에 기승전결은 물론 주요 캐릭터들의 변화까지도 담고 있잖아요. 그것도 매 회마다, 열 몇 시즌에 걸쳐서까지. 결국 그 변화나 이야기가 ‘얼마나 드라마틱하느냐’보다는 삶 곳곳에서 ‘얼마나 유머를 잘 찾아내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코미디에서 타이밍이 가장 중요한 것도, 우리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적절한 타이밍에 코미디를 넣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을 것 같아요.


| 학우님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자주 받고 제일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 인생이 지금 어떤지에 따라, ‘인생영화’가 달라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제 ‘인생영화‘는 또다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1967)이에요. 말 그대로 졸업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끝나고 나서도 잠을 못 잔 영화는 그 영화가 처음이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관에서 나오면, 두 번 다시 안 돌아보는 사람이었거든요.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게 당연히 더 좋았죠. 그런데 학교에 와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오히려 좋았던 영화만 계속 보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졸업을 하고도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시점에 <졸업>을 본 게 결정적 계기였죠. 솔직하게, 옛날 영화들이 훨씬 더 좋았던 것도 있고요. "영화는 이미 완성되었다. 이제는 그저 계속 오마주될 뿐이다"라고 누가 그러셨는데, 역시 빨리 태어났어야 하나봐요.


 © 네이버 영화 <졸업> 스틸


| 무대 연극, 뮤지컬, 문학에는 없는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게 하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제가 영화를 편애하는 이유는 '진짜인 척'하는 연기를 제일 잘 하기 때문이에요. 어떨 때는 너무 인간적이라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연극이나 뮤지컬 역시 가짜를 통해 진짜를 말하지만, 그 방식은 굉장히 극적(dramatic)이잖아요. 소설은 오직 텍스트 위에 존재하죠. 텍스트는 철저히 독자의 머릿속에서만 ‘진짜’처럼 상상돼요. 하지만 영화는 현실과 훨씬 닮아 있어요. 종종 팀 버튼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처럼 '저세상'급의 예외와 변수도 존재하지만, 어찌 됐든 원칙적으로 영화에서 인물이 말하는 방식이나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가장 현실과 닮아있죠.


예를 들어, 주인공이 라면을 끓일 때, 연극에서는 라면을 끓이는 시늉을 하고, 소설에서는 라면을 끓인다고 상상되지만, 영화에서는 정말로 라면을 끓여요. 그뿐만 아니라 그 라면이 농심인지 오뚜기인지, 달걀을 넣는지 아니면 달걀은 안 넣고 파를 넣는지, 수프 먼저 넣는지 면 먼저 넣는지까지 나와요. 결국 영화도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그 라면이 자기 취향인 ‘척’을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끓인 라면이 진짜로 입에 들어가잖아요. 물론 어딘가에는 진짜로 무대 위에서 라면을 끓이는 연극도 있겠지만, 그 라면이 어떤 핵심적인 장치거나 극사실주의 연극이 아닌 이상 그런 경우는 드물죠. 영화에서는 그냥 배고파서 라면을 끓이는 그 3분 동안, 대사 한마디도 없이 이 인물의 취향이나 과장해서 인생까지도 보여줄 수 있어요. 결국 저는 이 사람이 어떤 라면을 어떻게 먹는지가 궁금한 사람인 거죠. 그런 저에게 영화는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예요.


| 궁극적인 목표나 꿈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궁극적인’ 것은 저도 단언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교수가 되어서 영화를 평생 곁에 두고 싶어요. 일단은 현장에서의 영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미국 대학원의 영화 제작 과정 지원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후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싶어요. 제가 만나고 보았던 교수님들께서 학생들과 영화로 소통하고 오랜 시간 애지중지한 영화 이야기를 하실 때, 여전히 눈이 빛나는 모습이 멋지고 부러웠거든요. 그 궁극적인 꿈을 위한 다음 단계는 미국 대학원에 도전하는 것이고, 열심히 애쓰는 중입니다.


| 마지막으로 성균인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종종 성균웹진에 대해 듣거나 읽어보며 ‘이 선배님 정말 대단하시다. 나도 졸업하고 여기 실릴 일이 있을까?’ 했었는데, 이렇게 이르게, 졸업을 하기 직전에 기회가 올 줄은 몰랐어요. 영광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 세상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아요. 솔직히 졸업을 하고나면 제가 지금처럼 매번 ‘감독님’ 소리를 들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세상에서는 목소리 좀 내려면 힘이 있어야 하지만, 학교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지지해 주죠. 그러니 학교에서 실컷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져 보시길 바라요. 앞으로 인생에 그런 실패와 실수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없으니까요. 어쩔 수가 있을 때를 마음껏 즐기세요. 세상에 나가는 순간, ‘어쩔 수가 없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