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탑

공양탑

  • 351호
  • 기사입력 2016.07.13
  • 편집 송예균 기자
  • 조회수 4399

글 : 김관희 (불문 15)


어머니 제 고국에서 후손 한 명이 왔습니다.
 이젠 한국인이라고 불리더라구요.
 이젠 여권에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적힌 걸 봤읍니다.
 이젠 대한민국 만세라구요.

여행 계획 짜기 :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中


나는 무한도전을 자주 보지 않는다. 왜냐고? 그냥 무한도전에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사람들이 인정할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뽑아본다면, 단연컨대 “배달의 무도, ‘하시마 섬과, 다카시마 공양탑’”부분을 뽑을 것이다. 이 방송의 영향력은 이로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방송 하나로 다카시마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하시마섬이라는 곳에서 선조들이 ‘메이지 시대의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에 강제로 희생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배달의 무도를 보게 된 것은 일본 여행을 계획하기 전이었다. 나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된 곳이 있고, 그 위치는 나가사키 현(長崎??)의 한 섬이구나 정도로 이 곳을 인식했다. 그러다가, 나가사키에서의 여행 계획을 짤 때 갑작스럽게 생각났다.

“음, 한번 다카시마(高島)나 가볼까?”

다카시마도 갈 겸, 하시마섬까지 가자는 생각을 했다. 예전보다 많이 알려졌으니 그래도 ‘가기는 편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이 곳을 그저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관광지’정도로 생각했다. 그냥 편하게 갈 생각을 했다. 정말로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정말로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다.

일본의 ‘사가(佐賀)’라는 도시에서 출발하여 2시간 반 정도 전철을 타고 난 뒤에야 나는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고 나서 이 도시에 대해 내가 느낀 점은 ‘나가사키는 조용한 동네’라는 것과, ‘바다에 접해있는 도시’라는 것이었다. 또한 항만 산업이 발달해 있는 곳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주변에는 옛 1900년대에서 볼 수 있는 노면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옛 서양식 건물들도 여기저기 볼 수 있었다. 산업화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그러고 보면 도시 이곳저곳에 근대화의 상징을 자랑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으며, 세계문화유산이 된 군함도를 칭찬하기 바빴다. ‘20세기 아시아 산업화의 대표주자는 일본이다!’를 자랑하는 듯 했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짐을 풀고 난 뒤에 어디에 갈까 생각했다. 여러 여행지가 있었지만 내 눈에 뜨인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다카시마(高島)였다. 원래는 하시마섬을 갈려고 했으나 가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가는 법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는 다카시마로 정했다.

다카시마로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나가사키 터미널로 간다. 그 다음 자동 발권기로 향한다. 왕복표를 산다. 가격은 2040엔, 대략 21000원정도. 그 다음 시간표를 보고 출발시각 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본 하늘은 정말 맑았다. 아니, 그냥 구름 한 점 없었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배를 타고나서 다카시마 까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그 사이 나는 선반에 올라가 바람을 쐬며 경치를 즐겼다. ‘아 진짜 바다 예쁘다.’ 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가게 될 곳이 어떤 상황인지, 그 곳이 나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충격으로 받아들이다 : 정글 속에 숨겨진 공양탑

30분정도 지나고 배는 다카시마에 도착했다. 처음 다카시마를 보고 느낀 것은, ‘작다’였다. 크지는 않은 섬이었다. 高島(높을 고, 섬 도)라고 해서 나는 섬의 크기가 크거나 아니면 산이 높거나 할 줄 알았는데, 산은커녕 그냥 평평한 곳이었다. 가는 길은 처음엔 어렵지 않았다. 100엔 정도 하는 버스에 타서 내릴 곳을 알려준 다음에, 내리면 끝이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니, 충격 그 자체였다.


위의 사진이 무엇인지 맞춰보길 바란다. 과연 무엇일까?

위의 사진 모두 공양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찍은 사진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로 공양탑으로 가는 길이다. 인디아나 존스가 정글에서 수풀을 가로질러 보물을 찾아가듯, 나도 수풀을 계속해서 가로질러 갔다. 심지어 길은 중간에 끊겨 있었다. 내가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야하는 상황. 길은 풀과 나무, 그리고 대나무에 가려져 도저히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예전에 서경덕 교수와 그 팀이 가는 길을 정비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정비를 해도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공양탑은 그런 곳에 있다.

정글 같은 길을 걷다보면 그 유명한 ‘폐쇄 안내문’을 볼 수 있다. 괘씸하더라. 더 괘씸한 것이 무언지 아시는가? 저 설명 표지판을 한국어로 또렷이 적어두었다는 것이다. 이건 경고라기 보단, 약 올리는 듯 했다. ‘여기 없어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놀리는 듯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하겠나? 그냥 무시하고 갔다. 노란 선으로 이 길을 폐쇄했음을 알리고 있었으나,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가파른 길을 떨어지듯이 내려가며 계속 걸어갔다. 중간 중간 나무에 걸리기도 하고,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기도 했다. 길을 가면서 점점 화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곳에 공양탑을 설치해 둔 것일까? 이건 일부러 안보이게 감춰 두려고 세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길을 걸으면서 욕이 저절로 나온다. 분함에 젖은 욕이 나온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이윽고 내가 본 것은…….


나라 잃은 설움 : 공양탑

이 공양탑을 찾고서 처음 든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슬픔?’ 아니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이 아니다, 초라한 모습을 보고서 느낀 ‘아쉬움?’, 그것도 아니다. ‘분함’을 느꼈다.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눈물과 함께 괴성이 솟아오른다. ‘개X끼들아.’ ‘와, 이 씹X끼들.’ 이렇게 욕을 하는 것이 과장되어 보일 것이다. 근데, 과장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곳을 찾아 가는 길, 그 길 끝에 보인 것은 ‘홀로 서있는 공양탑.’ 겨우 걸려있는 태극기는 공양탑에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 그리고 이 모습을 방관하듯이, 우리를 비웃는 듯한 ‘진입 금지 표지판’까지. ‘나라 잃은 설움’, 이 설움이 뭔지 드디어 이해가 갔다. 배달의 무도에서 하하가 그렇게 울분을 터뜨린 것이 이해가 갔다. 그 누구도 여기에 오면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민족의 설움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이 곳에, 쓸쓸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저 조용히, 집에 가지 못한 채, 태극기 하나 두르고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선조님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여기에 왔습니다.’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나서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변을 정리하고 태극기를 다시 펴서 거는 거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우거져 있던 풀을 제거한다. 석탑에 쌓여있던 낙엽을 치운다. 낙엽을 치우니 벌레들이 튀어 나온다. 태극기를 핀다. 태극기를 턴다. 벌레가 붙어 있다. 벌레를 떼어낸다. 다시 펴서 조심스레 탑에 올린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낸다. 눈물에 젖어가는 지폐를 올려둔다.

묵념

아마, 한동안 저 공양탑을 찾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섬을 찾아온다 해도 표지판을 보고 다시 돌아설 것이다. 한동안 저렇게 혼자 계실 것이다. 태극기 한 장 두른 채 홀로 고향 생각하시고 계시겠지. 돌아갈 곳이 있는 그들을 가둔, 오늘 따라 이 섬을 가둔, 바다가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