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와 수제비

  • 429호
  • 기사입력 2019.10.11
  • 편집 연윤서 기자

글 : 유정애 사학과 교수


우리 동네는 ‘응답하라 1970’하면 딱 생각날 만한 동네였다. 두 해 전만해도, 아직도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을까싶을 정도로 정겨운 청취가 묻어나고 나른한 늦은 봄날에는 골목에 사시는 할머니들이 양지 좋은 우리 집 창밖에 옹기종기 모여서 가스버너에 부침개를 부쳐 드시며 웃음꽃 만개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은 아옹다옹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나팔꽃 대신 호박이 지붕을 타고 오르고 검푸른빛을 띤 플라스틱 화분엔 가지, 상추, 고추와 같은 채소를 심는 우리 동네에 지난 몇 년간 일상 환경에 변화가 왔다. 어느 날부터 웽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탁소가 옷가게로 바뀌고 철물점이 카페로 바뀌었다. 또 한 해가 지나니 옷가게가 파스타집으로 카페가 디저트 가게로 변했다. 가족이 살던 앞집은 저녁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맥주와 음료수를 파는 곳으로 전환하면서 호박과 가지를 키우던 화단이 없어지고 호박 넝쿨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앞집 카페가 들어선 이후로 할머니들도 더는 햇볕 좋은 창밖에 모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호탕한 웃음소리도 아옹다옹 논쟁도 더는 들을 수 없는 골목으로 변했다.


그래도 아직 집 대문을 나서면 이십 보만 가도 입맛 돋우는 칼칼한 해물칼국수를 즐길 수 있는 국수집이 있고 맞은편 몇 집 건너서는 몇 십 년 전에나 볼 수 있을 듯한 양은냄비에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 내는 손바닥만한 분식집이 있다. 그러나 왼쪽 모퉁이를 살짝 돌면 큰길이 나오는데 새로 들어선 파스타집과 수제빵집이 50미터 사이로 서너 집은 보인다. 사이사이에 중국집과 만두집에 이어 일본식 라멘집까지. 몇 년 사이에 휘몰아쳐온 젠트리피케이션 (더 정확히는 상업화 되는 주거지역) 바람에 의해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동네에서 그 흔하던 백반집을 찾기가 인파 속에서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왈도(월리)를 찾는 것만큼 어려워 졌다. 관광객은 늘어나고 주택은 슬그머니 사라지는 우리 골목에 그나마 남아있는 백반집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는 노파심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 집이 파스타집으로 바뀌면 이제 내가 좋아하는 밥은 어디서 먹나? 황태국과 두부조림은?

언제부터였을까? 오랜 세월 우리네 주식이었던 쌀이 외래 곡식인 밀에 밀려서 밥상에서 존재감을 잃기 시작한 것은? 가끔 주위 친구들과 어렸을 적 자주 먹었던 음식에 대한 추억을 나누곤 할 때면 단골 주제는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칼국수와 수제비다. 칼국수와 수제비 이야기를 할 때 무슨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요리인양 서로 앞뒤를 다투며 각자의 집에서 만들었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에 대한 향수를 나눈다. 반죽은 어떻게 하며 반죽의 두께와 애호박이냐 감자냐의 갑론을박 등 나름 집안에서 요리하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집단기억 속에 전통 서민음식으로 생각하는 칼국수와 수제비는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서는 새로운 음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새로운 음식은 시대의 상황과 국제관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칼국수와 수제비가 밀을 중심으로 우리 식생활 문화에 안착되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1945-‘48) 이후 부터였고 특히 산업화 시대(1960-’80)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당시 미국이 원조로 보낸 밀가루는 싼값에 유통되었고, 밀가루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조리법은 ’혼분식 장려운동‘이라는 정부정책에 힘을 입어 각계각층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밀가루를 손쉽게 얻는다 해서 조리법을 저절로 습득하는 것은 아니며, 더 더욱이 요리를 할 수 있다고 생소한 음식을 처음부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기호개발을 위해 이동 주방트럭을 전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마을까지 다니며 밀가루 음식에 대한 영양과 조리법을 전파하고 영양에 대한 지식은 현대인이 당연히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지인의 어머님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한 섬에서 사셨는데 하루는 도너츠 조리법을 배우시고 귀가하신 후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해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미국과 현대성이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현대화는 ’잘살아보세‘라는 구어로 표현될 때 도너츠와 케이크는 부유함과 풍족함을 뜻했다. 그러나 도너츠와 케이크가 밀가루 음식의 한 축을 이뤘으면 칼국수와 수제비는 다른 한 축을 차지했다. 밀가루를 이용해 우리입맛에 가깝게 만들어 낼 수 있고 빠르게 취식할 수 있었던 요리인 칼국수와 수제비는 서민들에게 쉽게 다가 갈 수 있었다. 뜨거운 국물에 채소를 곁들인 칼국수나 수제비는 밀가루 냄새를 희석시킬 수 있었고 빈속을 채울 수 있었다. 한 끼 식사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지 ’여원‘ 1961년 7월호를 보면 칼국수와 수제비 만드는 조리법을 반죽서부터 끓이는 것까지 일루스트레션까지 곁들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칼국수와 수제비는 밀가루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음식이라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배워야했고, 입맛 또한 후천적으로 획득해야 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은 라면이다. 이제는 우리에게 기호음식으로 자리매김을 한 라면이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의 식사였다. 라면 한 그릇은 작업장에서 손쉽고 간단하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어서 백반 대용으로 먹을 수 있었다. 따끈한 국물과 진한 라면 맛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던 것이고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라면을 생필품항목에 포함시켜 관리해 왔던 것이다.

산업화 시대 이후 1980년대에는 라면산업이 발달하며 여러 종류의 라면이 생산되었다. 입맛에 맞는 얼큰함과 다양성이 추후 라면이 노동자의 음식에서 일반인들의 기호식품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 (WINA)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 연간 1인당 라면소비는 74.6개로 세계 1위이다. 2위가 베트남으로 1인당 53.9개이며 3위가 네팔로 53개임을 감안할 때 1위와 2위 차이는 20개로 2위와 3위 차이보다 훨씬 많다. 한 끼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음식에서 대한민국 전체의 기호식품으로서 라면이 성대에서도 인기가 꽤 높다. 점심시간 학생식당의 라면카운터의 줄은 꽤 길다. 나 역시 간간히 그 줄에 서서 달걀라면을 시킨다. 라면에 대한 식욕은 식후의 더부룩함을 견뎌야 할 덕목으로 만든다.


우리 동네는 변했고 변하고 있다. 변하는 것 자체에 대해 좋고 나쁨을 논할 수는 없다. 인간사회는 늘 움직이고 이는 우리의 삶을 생동적으로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동네의 변화에 따라 동네 사람들의 관계망이 좁혀지고 인구이동이 시작됐다. 삶의 질이 저하되고 나는 내일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이는 백반집이 없어지고 칼국수집과 수제비집이 파스타와 디저트가게로 전환하는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같은 밀가루 음식이라도 파스타는 두 배, 아님 세배는 더 비싸다. 디저트는 몸무게와 직결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 우리는 보이는 변화와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 얼마나 의식하며 그들의 역학관계와 역사에 대해 사유를 할까?


또한 겉으로 드러난 실물이 얼마나 많은 진실과 사실을 덮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전통음식‘이 된 칼국수와 수제비, 한국인 최고의 기호식품인 라면은 사실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전통‘이다. 미국의 밀가루 과다생산을 처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대량의 밀가루 ’원조‘가 공여되며 시작된 전통이었다. 국제 정치경제적 필요에 의해 한국의 ’전통음식‘ 수제비가 만들어지고 라면이 대량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밀가루를 소비하는 방식이 파스타와 디저트로 옮겨가고 있는 과정이다. 이렇게 한국인의 ’입맛‘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한국의 주요 식량이 쌀에서 밀로 전환되고 있다. 밀은 거의 100% 수입하는 ’비전통적‘ 곡물이므로 이제 한국인의 생존 자체가 국제경제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 동네의 변화는 이러한 거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강의를 하는 과정에 가끔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특정한 사건을 사유할 때 사건을 나무로 비유하자면 숲을 보지 않고는 나무에 대해서 말 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역사적 틀 안에서 커다란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 민감해져야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작은 변화에 놀라지 말고 커다란 움직임을 인식하며 큰 틀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