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각(尊經閣)과의 인연 - 2편

  • 418호
  • 기사입력 2019.04.30
  • 편집 이수경 기자

글 : 이현일 한문교육과 부교수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를 제목 그대로 풀이하자면, 훌륭한 인물들[名賢]의 시집에서 각각 열수씩 뽑은 시[十抄詩]에 주석을 끼워 넣은[夾注] 책이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명현십초시는 고려초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현십초시 역시 매우 희귀하지만, 지금 몇몇 도서관에 간본(刊本)이 전한다. 주석을 붙인 사람은 고려 후기의 신인종(神印宗) 승려인 월암산인(月巖山人) 자산(子山)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 간본은 전하지 않고, 지금 전하는 본들은 모두 조선 단종(端宗) 즉위년(1452)에 중간(重刊)된 책들로 추정된다.


협주명현십초시에는 모두 30명에 이르는 시인들의 시가 각각 10편씩, 모두 30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들은 모두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칠언율시는 일곱 글자[七言]로 된 한 줄[句]이 여덟 개 모여서 이루어진 시로, 한시의 여러 시체(詩體)들 중에서 가장 화려하면서 형식적 제약이 가장 엄격한 편에 속한다. 


주로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시기에 활동했던 시인들의 작품이 뽑혀 있는데, 그 중에는 유우석(劉禹錫), 백거이(白居易), 온정균(溫庭筠), 피일휴(皮日休), 가도(賈島) 등 유명한 시인들도 있고, 위섬(韋蟾), 이웅(李雄), 오인벽(吳仁璧) 등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도 섞여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최치원(崔致遠), 박인범(朴仁範), 최승우(崔承祐), 최광유(崔匡裕) 등 신라인들의 작품이 실려 있어서 특히 의미가 깊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엮은이가 중국인과 신라인을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고 같이 묶었다는 사실이다. 30명 중의 4명. 고려초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한문학 유산에서 그 정도 지분은 우리가 주장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초의 김종직(金宗直)은 우리나라 역대 한시 선집인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엮고, 그 서문에서 신라말부터 자신이 활동했던 시기까지 700여년 사이의 한시사를 3단계로 구분했다. 김종직의 구분을 따르자면, 제1기는 신라말부터 고려초로 만당(晩唐)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이며, 제2기는 고려 중엽으로 송(宋)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이며, 이제현(李齊賢) 이후부터 김종직이 활동하던 당대(當代)까지는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시기로 제3기가 된다. 이 협주명현십초시는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반영한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이 책을 이해할 때 꼭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유학(留學)과 한문(漢文)과 과거제(科擧制)이다. 신라 지식인들의 당나라 유학 열풍은 오늘날의 해외 유학 열풍과 비교해도 결코 못하지 않았다. 특히 신분 상승에 제약이 있던 육두품(六頭品) 지식인들의 경우 당나라에 가서 그곳의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최치원, 박인범, 최승우는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을 하였고, 최광유는 끝내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 책에 실린 박인범의 시에는 과거에 합격한 다음 해 시험 보는 시기를 즈음하여 힘겨웠던 지난날을 추억하고, 지금은 안도하는 심정을 표현한 작품이 남아 있고, 먼저 과거에 급제하여 귀국하는 벗을 전송하는 최광유의 시에는 좌절과 선망(羨望)이 뒤섞여 있다.


이들의 활약 이후로 우리나라에는 동아시아의 공동 문어(文語)였던 한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또 고려 광종(光宗) 이후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조선 시대로 들어와 아예 사대부(士大夫) 위주로 나라가 운영되면서, 그 숫자가 더욱더 증가했다.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및 한문 독해와 작문 능력을 평가기준으로 삼은 과거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될 정도로 큰 흔적을 남겼다. 유교적 소양과 박식함을 갖추고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우리 사회에 중요한 문화 자본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문은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와 말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이 협주명현십초시가 엮어지고 널리 읽히게 된 것도 과거제의 시행에 따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 초기에 명현십초시가 엮어진 것도 그렇지만, 특히 협주명현십초시가 단종 즉위년에 중간된 것도 이 해 문과(文科)에 응시하기 위한 자격시험에 사장(詞章)을 시험하는 진사시(進士試)가 부활된 것과 관련이 깊다.


문명의 중심부를 애타게 바라보고 그들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뛰어난 인재들이 끊임없이 유학을 떠나는 상황이나,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하는 것을 선호하고, 특히 고위 공직자가 될 사람을 뽑는 데 국가고시를 중시하는 경향 등은 오늘날에도 우리 삶과 사회 속에 녹아들어 유전자(遺傳子)처럼 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중·일 학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야 우리 옛 시인들이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까지 이 책에 주목한 것은 어떤 까닭이 있을까?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시의 나라[詩國]’으로 일컬을 정도인데 그네들의 시사(詩史)에서 가장 정점(頂點)에 있는 것이 당시(唐詩)이다. 청(淸)나라 때 편찬된 당시 전집인 전당시(全唐詩)에는 대략 2,200명의 시인들의 48,000수가 넘는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협주명현십초시에 실린 시는 단 300수에 불과하지만, 그 중 100수 정도가 전당시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이고, 심지어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작가도 있다. 또 이미 알려진 작품이라도 작품의 본문에 이문(異文)이 많아서 교감(校勘)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이는 처음에 시를 뽑을 때 사용한 시인들의 문집이 지금 전하는 중국의 통행본과 달랐음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주석에 인용된 책들 중에는 본토에서 이른 시기에 실전된 희귀한 문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있을 듯하여, 실례를 하나 들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가령 나업(羅鄴)의 영물시(詠物詩)인 「나비(蛺蝶)」에 나오는 “절개 지킨 아내의 옷이 변한 모습이라 세속에서 전하고(俗說義妻衣化狀)”라는 구는 아무리 한문 해독력이 탁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석이 없으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협주명현십초시에는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운문(韻文)인 양산백축영대전(梁山伯祝英臺傳)을 60구나 싣고 있다. 이 작품은 본토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자료이다.


여주인공 축영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장(男裝)을 한 채 집을 떠나 학교로 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양산백을 만나게 되고, 학교에서 둘은 더욱 우정이 깊어져 의형제까지 맺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축영대는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엇갈린 인연 탓에 양산백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축영대가 양산백의 무덤에 가서 통곡하자, 무덤이 갈라지고 축영대는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녀의 부모가 뒤따라가 옷자락을 붙들고 말렸으나 막지 못하고, 옷만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수많은 나비들로 변했다고 한다. 나업의 위의 시귀는 이 전설을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중국에서 1500년 넘게 연극, 소설, 드라마, 영화로 거듭해서 창작되는 대표적인 민간전설로 자리매김했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각편(各篇, version)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책의 주석에 인용된 양산백축영대전은 이 전설의 초기 원형을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두 사람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중국 전역에 한두 군데가 아니다. 협주명현십초시에는 십도지(十道志) 인용하여 “명주(明州)에 양산백의 무덤이 있다.”라는 주석도 소개하고 있다. 십도지의 본래 명칭은 십도사번지(十道四蕃志)로 측천무후(則天武后) 시절 활동하던 양재언(梁載言)이 지은 인문지리서이며, 역시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잃어버린 책이다. ‘명주’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닝보[寧波]인데, 적어도 당나라 전기부터는 이곳을 양산백·축영대 전설의 무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오늘날 그 유적을 양축문화공원(梁祝文化公園)으로 가꾸어 놓았다.


학자들은 이곳이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송나라에 올 때 경유했던 주요 상륙지 중의 하나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을 지났던 많은 고려인들 중의 누군가가 양산백축영대전을 입수하여 고려로 가지고 간 것이다. (우리나라 남쪽 바다에서 이곳으로 해류가 흘러서 가끔 풍랑을 만난 사람들이 이곳까지 흘러가기도 하는데, 조선 시대 최부(崔溥)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최부는 풍랑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닝보에 상륙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기까지 자신의 견문과 체험을 기록한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는데, 당시 명(明)나라의 여러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아쉬운 점은 존경각본에는 이 대목이 낙장되었다는 것이다. 서문과 발문이 온전하고 다른 곳에도 낙장이 없었다면, 중국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 같은 귀빈이 우리 학교를 방문했을 때 최신 복제 기술로 한지(韓紙)에 인쇄한 뒤 옛 제본 방식을 재현한 정밀 복제본을 만들어 기념품으로 선물할 만할 책이다. 물론 지금 그 대로도 꺼내 놓고 보여 드릴 만한 책 중의 하나이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선본과 같은 상태의 책은 ‘착한 가격’ 뒤에 0을 하나 더 붙이더라도 구하기 어렵다. 이런 선본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신라·고려 시대에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그 결과 중국 본토에서도 이미 사라진 희귀한 서적들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 이처럼 의미 있는 한시 선집이 왜 조선 중기 이후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다. 앞서 이 시선집이 중만당(中晩唐) 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언급한 바 있거니와, 16세기 이후로 조선에서도 성당(盛唐) 시기의 시를 으뜸으로 삼는 명대(明代) 복고파(復古派)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협주명현십초시에 실린 시들을 배워야 할 표준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더 방대하고 체계적인 당시(唐詩) 선집이 중국에서 수입되어 보급되면서 이 책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깊은 서재에서 세월의 풍화작용에서 살아남은 몇 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다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타임캡슐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런 책이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되는 것은 책을 갈무리하는 도서관이라는 기관과 고서에 가치를 매기고 사고파는 시장과 학자들이 소속되어 생계를 유지하고 학문 후속세대를 키울 수 있게 해 주는 대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대학과 도서관뿐만 아니라 ‘시장’을 꼽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물건’들은 ‘시장’을 통해서 ‘가격’이 적당하게 매겨지지 않으면 존속을 장담할 수 없다. 인사동에 가보면 고서점을 돌면서 조선 시대에 워낙 많이 찍어내서 값이 안 나가는 고서만 골라서 사가는 이들이 있다. 책방 주인에게 물어 보니, 질 좋은 새 한지를 사는 것보다도 이런 책들을 사는 것이 싸기 때문에 한지 공예를 하는 분들이 사다가 책을 분해해서 공예품의 재료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재활용’인 셈인데,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몹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잘못하여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책의 가치를 전혀 모를 경우 귀한 책이 횡액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상주본(尙州本)의 경우도 결국 원주인이 책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거의 10년 만에 끝내 투고하지 못한 구고(舊稿)를 꺼내어 읽어 보니, 다시 아쉬워졌다. 이미 글쓴이가 쓰려는 방향으로 다른 분들이 쓴 논문들이 여러 편 나왔다. 하기야 그 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놓친 것이 논문 한 편뿐이겠는가? 이 정도는 가슴아파할 것도 못된다.

[협주명현십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