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희망, 사랑, 삶이 남는다
- 황정은의 『노스체』
- 554호
- 기사입력 2024.12.27
- 취재 이정빈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 조회수 836
“재난이 있는 곳에 노스체가 갑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노스체가 갑니다. 여러분의 아픔, 노스체가 압니다. 여러분의 고통, 노스체가 압니다.”
황정은의 희곡 『노스체』는 원전 폭발 이후, 사람이 살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에 남겨진 사람들과 그에 가닿는 재난 로봇 ‘노스체(Nosce)’에 대한 이야기다. 작중 ‘노스체’는 국가와 기업이 재난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대거 만들기 시작한 재난 로봇으로 인간 대신 험지에 들어와 상황 수습, 사람 구조와 더불어 오랫동안 방치된 피폭된 땅을 점검하는 일을 도맡는다.
노스체(Nosche)는 라틴어로 ‘알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재난의 시대가 도래한 이유가 사람이 모든 것을 안다고 여긴 결과라는 생각에,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지 제목을 통해 질문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 희곡은 연극이 되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극 분야에서 ‘2022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피폭된 땅에서 마주한 사람과 로봇
세상의 종말과도 같았던 사고 발생일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날, ‘옥’과 ‘현’, ‘희’ 세 사람이 살고 있던 D-452번지에 ‘노스체’가 찾아온다.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셋은 어딘가 불편하다. 옥은 갑상샘 수술을 했고, 현은 귀가 들리지 않고, 희는 연신 기침을 한다. 셋은 피폭된 땅을 점검하러 왔다는 노스체를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귀신처럼 알고 그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노스체의 모습에 구역인들의 마음에도 작은 파동이 인다.
피폭된 땅에서 마주한 사람과 로봇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를 닮아 있다. 사람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 한다며 옥에게 건네는 로봇 노스체의 포옹은 그 어떤 사람의 인사보다도 따뜻해 보인다.
“옥, 들어가려다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노스체 어깨 위에 덮어준다.”
|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
“’이곳이 전처럼 좋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무화과가 열릴 수 있는 정도면 그걸로 됐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보통은 다시 완벽해지고 싶어 하는데.”
20년간 잃어버린 아들 현과의 관계 회복의 방법을 묻는 연에게 노스체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냐고 묻는다. ‘원상복구’는 연에게도 노스체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과의 관계 회복이든 사고 현장의 수습이든, 사고 전으로 상황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다. 그저 일어난 일을 해결하는 것일 뿐이다. 『노스체』는 우리에게 다시 완벽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전한다. 그저 사고 후에도 무화과가 열릴 수 있는 정도면 괜찮다고, 삶 속에서 작은 재난이 일어나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 법에 대해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을 전한다.
|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마을에는 멧돼지가 담을 들이받을 만큼 야생동물이 늘었다. 조금씩 무화과도 열리기 시작했다. 고작 셋이지만 사람이 있었기에 죽은 땅에서도 생명은 피어났던 것이다. 이곳은 노스체가 폐기를 앞두고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온 마을이었다. 노스체는 모두가 구역을 나선 후 생을 다하지만, 마을의 여러 생을 살리고 떠났다.
“우리, 떠나는 거 아니야. 떠난다, 떠나지 않는다, 우리한테 선택권이 그거밖에 없어? 우린, 그저 살고 싶은 데로 가는 거야. …간다!”
걸어가면 길이 생겨난다. 구역 안이든, 구역 밖이든 사람이 있는 곳에는 삶이 있다. 세상의 종말 같은 사고가 일어나도 삶은 계속된다.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럼에도 희망, 사랑, 삶이 남는다. 옥과 노스체가 서로에게 옷을 덮어주듯이.
“노스체, 옥에게 겉옷을 덮어준다.”
『노스체』는 SF 장르이지만 먼 꿈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 1986년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있었으며 점점 재난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현실화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천재이든 인재이든, 우리가 현실에서 ‘노스체’들을 마주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재난 속에서 로봇에게도 겉옷을 덮어줄 수 있는 이들에게 이 한권의 책, 『노스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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