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데워주는 난로, 시집 추천

  • 575호
  • 기사입력 2025.11.11
  • 취재 윤정민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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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시려오는 계절이 찾아오면, 우리는 문득 문학을 찾는다. 찬 바람 사이로 스며드는 그리움과 허전함을, 누군가의 문장이 대신 어루만져주길 바라며 책장을 연다. 가장 겨울과 맞닿아 있는 문학의 장르가 있다면, 아마도 시일 것이다. 짧은 문장 속 고요함과 여백은 마치 눈 내린 들판처럼 마음을 덮어준다. 시 한 편은 짧지만, 때로는 그 어떤 말보다 오래 남아 우리의 일상에 잔잔한 울림과 온기를 남긴다. 이번 ‘이 한권의 책’에서는 찬 겨울날 마음을 녹여줄, 무겁지 않은 세 권의 시집을 소개한다.


◈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의 시는 언제나 현실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삶의 고단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다. 『너의 하늘을 보아』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절망에서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묵묵히 견디며, 마침내 그 끝에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청춘에게 그는 달콤한 위로 대신 뜨거운 믿음을 건넨다.


그의 시는 쉽다. 시구 하나하나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 필요 없이 그저 읽는 순간 바로 가슴에 와닿는다. 특별한 기교와 수식이 없기에 단순하지만, 강하고 리듬감 있는 언어는 독자를 단숨에 시의 한가운데로 데려가 시인의 생경한 뜻을 체험하게 한다. 별도의 해석이 필요 없는 그의 시는, 각자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언어로 다시 읽혀 각자에게 저마다 위로가 된다. 희망은 거창한 사람들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의 얼굴 속에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中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고선경의 시는 ‘일상의 언어’로 쓰였다. 그녀는 우리가 매일 입에 올리는 평범한 단어들로 감정을 길어 올린다. 일상적인 언어들은 시인의 손끝을 거치며 어느새 다른 의미의 문장으로 변한다. 샤워젤과 소다수, 청바지, 티백과 같은 익숙한 사물들이 그녀의 시 속에서 마음의 은유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의 시는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해 우리의 경쾌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은근히 깨달음을 전달한다. 때로는 귀여운 발상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 웃음 끝에서는 묘한 공허함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시인의 고뇌의 결과가 남는다. 향기로운 그녀의 언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중학생 때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절반쯤 기억나지 않고 또 절반쯤 여전히 멋지다

무한궤도 서태지 패닉

뒤늦은 사랑이라는 말은 말이 되지만

뒤늦은 그리움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되지

그리움에는 제철이 없어서

고선경 <세기말을 떠나온 신인류는 종말을 아꼈다> 中


◈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는 언제나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작고 평범한 순간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이번 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에서도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얻은 삶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조용한 진심을 담아 청춘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의 시는 다정하면서도 단단하다. 세상의 빠른 속도에 지쳐 숨 고를 틈조차 잃은 이들에게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그마한 성공도 분명 성공이라고 다정히 일러준다. 나태주의 시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한다. 삶 속에 작게 피어나는 기쁨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 완벽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최선’을 바라본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다그치며 빠르게만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마음의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게 너무 많이 안 예뻐도 된다. 그렇게 꼭 잘 하려고만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모습 그대로 너는 충분히 예쁘고, 가끔은 실수하고 서툴러도 너는 사랑스런 사람이란다.

지금 그대로 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라.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도 너는 가득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나태주 <어린 벗에게> 中


시인은 각자의 언어로 우리 삶의 결을 어루만진다.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싸워내는 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잠시 멈춰 숨 고를 여유가 필요하다. 그럴 때 시는 조용히 다가와 말없이 곁에 앉는다. 올겨울,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따스한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