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 김정희 득의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1]
- 565호
- 기사입력 2025.06.16
- 편집 성유진 기자
- 조회수 267
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만약 나에게 한국회화 역사상 최고 수준에 오른 작품 3개만 꼽으라고 한다면, 안견의 〈(夢遊桃源圖)〉,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꼽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국보인 〈금강전도〉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李瑢]의 꿈 이야기를 그렸다는 스토리도 있고 아울러 곽희(郭熙)의 삼원법(三遠法)을 운용하여 도원경의 전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미가 있다.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겨울 산인 이른바 ‘개골산(皆骨山)’의 전경을 부감법(俯瞰法)을 운용하여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화제의 의미를 풀이할 때 『주역(周易)』의 ‘선천역(先天易)’ 사유를 응용해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철학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국보인 〈세한도〉를 잘 알고 있는 점과 비교할 때 〈불이선란도〉는 상대적으로 회화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잘 모른다. 그런데 회화미학 차원에서 본다면 그 평가는 달라진다. 동양 문인화론의 핵심인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을 통한 회화창작, 그 회화창작 전모를 말해주는 화제에 담긴 예술창작과 관련된 철학성, 그려진 난(蘭)의 형상이 갖는 동양회화사적 차원의 ‘파격과 창신성’ 등이 〈불이선란도〉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밖에 서체(書體) 측면에서 볼 때 불이선란도의 화제 서체는 〈세한도〉 제발 서체에 비해 이른바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주며, 더불어 추사 서화작품에 약방의 감초격으로 하나씩 들어가 있는 문자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세한도〉와 차별화된다. 다만 〈세한도〉에 비할 때 관련된 스토리보다는 덜 유명하다는 점뿐이다.
▲ 동양문인화에서 추구하는 모든 예술창작 정신이 담겨 있는 추사의 〈不二禪蘭圖〉.
추사가 강조하는 ‘文字香과 書卷氣’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2.
동양철학사와 문예사를 보면 자(字)와 호(號)같은 별칭을 통해 스스로를 높인 경우가 있다. 명대 양명좌파(陽明左派)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이지(李贄)가 자신을 ‘탁월한 나[卓吾]’라고 한 것이나 당대 시인을 대표하는 이백(李白)이 자신을 ‘초나라 광인[楚狂]’이라 하면서 스스로를 광자(狂者)로 자임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이전에 없었던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이른바 동양철학에서의 광자적 기질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 예술사에서 이지와 이백 못지 않게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산 인물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꼽을 수 있다. 추사의 이런 점에 대해서는 ‘가을과 사관’이란 의미가 융합된 ‘추사’라는 호에 시비 분별을 엄격하게 따진다는 의미가 있는 등 많은 예를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추사의 ‘화란(畵蘭)’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해배(解配)된 다음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만에 ‘우연히 난을 치고 싶은 흥취[偶然欲畵]’가 일어나 난을 친 이른바 〈불이선란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초예와 기자의 법으로 난초를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이 글에 담긴 서화사적 의미는 이후 자세히 말하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사 자신이 〈불이선란도〉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창작 정신과 그 표현기법 및 의도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또 이렇게 표현한 것이 일반적으로 미적인 것과 다른 낯선 점이 있는 것을 또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하는 타인을 무시하는 말투와 그 말투 속에 담긴 서화미학에 대한 자신만만함이다.
이러한 추사의 자신만만함은 다 근거가 있다. 이같은 근거를 다양한 관점에서 규명해 보기로 한다. 추사 김정희 서화작품 중 최고의 득의작은? 이런 질문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시리(詩理), 화리(畫理), 선리(禪理)”의 일체화, “서법(書法)은 시품(詩品), 화수(畫髓)와 더불어 묘경(妙境)은 동일하다”, 서화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표현해야 한다”와 같이 추사가 강조한 예술창작과 관련된 대표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추사하면 떠오르는 국보인 〈세한도〉를 거론할 수 있지만, 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나는 〈불이선란도[혹은 不作蘭圖]〉가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본다.
한국 회화사에서 화제 작성의 형식을 좌에서 우로 쓴 것과 우에서 좌로 쓴 것을 혼합해 쓴 것도 〈불이선란도〉가 최초인데, 이처럼 〈불이선란도〉를 통해 표현한 것에는 이전 회화창작물에 없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점을 중국 회화사에 적용해도 아주 수준 높고 독창적인 것에 속하는데, 이런 점들은 추사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에 속한다.
▲ 灘隱 李霆 〈風竹圖〉. 濃墨과 淡墨을 사용하여 꺾인 대나무와 꼿꼿하게 서 있는 대나무 형상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3.
일단 추사 〈불이선란도〉를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는, 불어오는 북서풍에 구부러지고 휘는 난잎들의 형상과 그것과 대비적으로 줄기를 꼿꼿하게 세운 채 꽃을 피우고 있는 난의 전반적인 형상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아는 것이다.
동양은 전통적으로 군자상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표출한다. 공자가 말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군자는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되 무리가 추구하는 사리 등에 휩쓸리지 않는다[和而不同]”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된다. 소인은 반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화이부동’과 유사한 말로 영조가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를 활용하여 탕평책을 논한 것이다. 즉 “타인과의 관계를 두루 원만히 하면서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두루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것도 유명하다. ‘화이부동’과 ‘주이불비’의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난세 때의 처세는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자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는 난세일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은 “군자는 진실로 궁하다[君子固窮]”라는 것이다. 사실 군자가 군자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난세의 궁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킬 때다. 공자의 ‘군자고궁’ 사유는 이후 도연명(陶淵明)의 “진실로 궁할 때 절개를 지킨다[고궁절(固窮節)]”라는 용어로 구체화된다. 많은 문인화가들은 이같은 고궁절의 군자삶과 군자상을 다양한 소재와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북서풍에 휘면서 맞서는, 이른바 〈풍죽도(風竹圖)〉다.
그 〈풍죽도〉의 형상이 고통과 시련을 상징하는 경우에는 줄기가 꺾인 대나무 즉 〈절죽도(折竹圖)〉로 표현되기도 한다. 줄기가 꺾였다고 해서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니다. 퇴계 이황이 읊은 ‘절죽(折竹)’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꺾여진 대[折竹]」
强項誤遭挫 : 굳센 목은 어쩌다가 꺾이게 되었지만
貞心非所破 : 곧은 그 마음이야 깨어질 바 아니다.
凜然立不撓 : 꼿꼿이 서 있으면서 흔들리지 않으니
猶堪激頹懦 : 쓰러지고 나약한 자 격려할 만하다.
꺾인 것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비록 거센 바람에 의해 줄기는 꺾였지만 꼿꼿이 서 있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형상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있는 군자의 다른 모습이다.
〈풍죽도〉를 그릴 때는 이정(李霆)의 〈풍죽도〉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농묵(濃墨)으로 휘는 죽의 형상을 담묵(淡墨)으로 꼿꼿한 죽의 형상을 동시에 그린다. 왜 그렇게 그리는지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 적이 있다.
* 풍죽(風竹) 두 그루 가운데 한 그루는 움직이고 한 그루는 움직이지 않게 그리다.
큰 바람 부는 것을 모든 물건이 함께 받는데, 어찌 같은 대로서 하나는 흔들리고 하나는 흔들리지 않음이 있는가. 한 그루는 바람에 시달려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한 그루는 태연히 곧게 섰구나. 흡사 두 사람이 한가지로 선(禪)을 배우는데, 한 사람은 도를 깨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착잡한 생각이 마구 일어나는 것 같다. 듣는 것을 돌이켜 제 본성을 듣게 되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이에 모두 그치게 된다.
이규보는 선을 배우는 두 가지 정황을 대나무의 움직이지 않음과 움직임의 다른 양상에 적용하여 풀이하는데, 큰 바람이 북서풍과 같은 숙살의 기운을 품은 것일 때는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즉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대나무 형상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형상을 상징한다.
물론 대나무에 바람이 부는 것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을에 부는 숙살(肅殺)의 기운을 담은 북서풍이 아닌 청풍(淸風)인 경우의 〈풍죽도〉는 문인들의 고아한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풍죽도〉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이든 동양회화에서 군자적 삶과 관련된 이같은 예술적 형상 창작은 서양회화에서는 주목하지 못한 것이란 점에 의의가 있다.
1) 李奎報, 『東國李相國後集』 卷第十一 「松廣社主大禪師夢如, 遣侍者二人求得丁而安墨竹二幹. 仍邀予爲贊云」 참조.
▲ 좌우로 손을 펼친 듯, 모은 듯한 균형이 있는 난 잎을 통해 온 천지에 향기를 풍기고 있는 난 형상을 “언제나 고개 숙여 희황에게 묻노니.
그대는 어드메 있다가 여기 왔는고. 아직 그리기 전에 코를 벌리니. 옛날 그 향기 온누리에 가득하구려”라는 화제로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乾隆, 嘉慶, 宣統 등 청대 황제들이 감상했다는 증거로서 찍은 많은 인장들이
감상자로 하여금 향기를 맡지 못하게 하는 등 작품을 망치고 있다.
4.
고통과 시련을 계절에 적용하면 ‘설상(雪霜)’이란 용어가 상징하는 것은 가을과 겨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강력하고 매서운 숙살의 기운을 품고 있는 북서풍이 불어오면서 모든 만물이 조락하는 가을에 관한 철학 및 미학에 대해 자세한 것은 「추성부」에 관한 글[성균웹진 2025년도 3월달 동양철학산책 559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추운 겨울의 세 친구’[歲寒三友圖:소나무, 대나무, 매화] 형상도 군자적 삶을 잘 보여주지만 〈풍죽도〉의 대나무 형상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풍죽도〉에서 표현된 북서풍에 의해 줄기가 ‘휜’, ‘꺾인’, ‘잘린’ 형상은 감상자로 하여금 군자의 ‘고궁절’에 대해 더 많은 공감대를 주기 때문이다. 더 많이 ‘휘고’, ‘꺾이고’, ‘잘릴’ 수록 더 많은 감동을 주는 것은 ‘형상적으로 추한 것이 도리어 미적인 것’으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점도 서양회화에서는 주목하지 못한 것에 해당한다.
동양회화사에서 군자의 고통과 시련의 상징은 〈풍죽도〉로 전형화되는데, 〈풍죽도〉와 달리 전통적으로 군자의 고통과 시련 이외에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과 좌절’을 형상화한 대상은 난(蘭)이었다. 이른바 자신의 생존의 근거가 되는 ‘땅[나라]’을 잃어버렸기에 ‘난[군자]’의 뿌리가 겉으로 드러난, 이른바 ‘뿌리가 드러난 난[露根蘭]’ 그림이다. 이런 시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흔히 도교의 단학(丹學)에 매우 밝았던 학자이면서 송말원초 유민(遺民)이었던 정사초(鄭思肖.1241~1318)다.
정사초는 국화 그림의 화제를 “꽃을 피웠지만 꽃무리에 함께 있지 않고, 홀로 성근 울타리 밑에 피었지만 그 자태 다함이 없네. 차라리 가지 끝에 향기 품고 시들지언정, 어찌 불어오는 북풍 속에 떨어지겠는가[花開不幷萬花叢, 獨立疏籬趣未窮. 寧可枝頭抱香死, 何曾吹落北風中.]”라고 써 ‘북풍[元(몽골족)]’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적이 있다. 정사초가 노근란을 그리자 어떤 이가 “흙도 뿌리도 그리지 않고 잎과 꽃만 그렸으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정사초는 “아니, 어떤 놈이 흙을 다 훔쳐 갔다는 것을 그대는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노근란을 그린 이유는 ‘어떤 놈[원:몽고족]’이 ‘흙[남송:한족]’을 다 훔쳐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사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노근란도〉는 우리나라 회화사에서도 접할 수 있다. 민영익(閔泳翊)이 그린 〈노근란도〉가 그것이다.
▲ 八大山人, 〈露根枯梅圖〉.
나라[명]을 잃은 슬픔과 좌절을 뿌리가 드러난 고매도 형식으로 그린, ‘露根蘭’ 양식을 깬 매우 창의적인 작품이다.
5.
추사의 〈불이선란도〉 형상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자 하면서 이렇게 〈풍죽도〉와 〈노근란도〉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추사가 기존 고통과 시련을 표현하는 소재를 난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소재를 난으로 바꾼 것이 동양미학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추사의 예술적 창의성이 극대화된 것에 해당한다. 어떤 점에서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가는 〈불이선란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에 속한다.
추사의 〈불이선란도〉는 제주도 유배 등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시련을 죽이 아닌 난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러한 난의 형상에는 〈풍죽도〉에서 보이는 형상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추사가 처했던 힘든 정황이 난의 어떤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아울러 그런 형상을 표현한 것에 담긴 미학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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