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노장사상(2)

  • 494호
  • 기사입력 2022.07.01
  • 편집 이수경 기자

글 :  조민환(동아시아학과 교수)


1.

함석헌이 『노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오산학교 시절 당시 32세였던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에게 배웠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함석헌은 『노자』를 포함한 동양고전에 대한 기본입장은 변한 시대에 맞게 항상 재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래 발언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노자는 “옛날부터 있는 길(곧 진리)을 붙잡아 가지고 이제 ‘있는 있음(有)’을 부린다〔 『노자』14장, “執古之道, 以御今之有.”〕”라고 했다. 마치 고삐를 잘 잡아야 사나운 말을 잘 부려서 차를 몰아갈 수 있듯이 이제 있는 이 천지만물과 인생 역사를 올바르게 이끌어 가려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뚫려 있어 변함이 없는 그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고금에 통하는 진리인식과 관련해 함석헌은 노장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였을까? 일단 『장자』「재유」에 대한 함석헌의 이해를 통해 알아보자. 함석헌은 (『莊子』「在宥」에서) “천하지만 맡기지 않아서는 아니되는 것이 몬이요, 낮지만 따르지 않아서는 아니되는 것이 씨알이다〔“賤而不可不任者物也. 卑而不可不因者民也.〕”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서 노장이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말한다.


사람은 존재는 개체로 존재하고 생각도 개체로 하지만 생활은 처음부터 같이 사는 공동체 살림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살림에는 질서가 없을 수 없다. 그 의미에서 정치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개인의 지혜가 깸에 따라 소박한 원시공동체 살림이 한 번 깨지고 전쟁 영웅이 일어나 재주와 폭력으로 인간사회를 휘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치는 타락 일로로 내달았다. 문물은 발달하는 반면 인심은 점점 각박해졌고 제도와 법이 까다로워지는 대신 나라의 주체인 민중은 손발을 둘 곳이 없어졌다. 노자 장자는 춘추전국시대에 나서 이러한 경향과 싸우며 세상을 건지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다.


함석헌은 영웅사관이나 성인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민중이 고통받는다는 장자의 사유를 받아들인다. 함석헌은 노자와 장자는 나라의 주체이면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한 사람이란 점을 들어 노장사상은 민중을 위한 철학임을 강조하면서 노장에 관한 이런 이해를 오늘날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이에 함석헌이 이해한 노장철학은 과거 춘추전국시대의 사유가 아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의미있는 철학으로 다가온다. 함석헌은 물론 민중을 위한 사상을 노장에만 적용하지 않고 공자와 맹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공맹은 일반 실천도덕을 강조했던 분이고 노장은 춘추전국시대, 그 난세에 생의 깊이가 무엇이냐, 사람들을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는 방법은 무엇이냐를 생각했던 분들이지요. 그분들 다 당대 현실을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을까를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함석헌의 노장과 공맹(孔孟)에 대한 인식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흔히 공맹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철학으로 이해하고 노장은 현실 문제를 등한시한 철학 – 이른바 상달처(上達處)를 추구하는 것 - 으로 이해하는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어려운 당대 현실에서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고 세상을 건져보려고 애썼던 점은 노장이나 공맹 모두 같은데, 공자는 유위(有爲)의 방법 즉 정치의 길로써 했고, 노자는 무위(無爲)의 방법으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노자가 그러한 유위의 방법으로 안될 것을 처음부터 밝게 안 점에서는 우리는 공자보다도 노자에게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 함석헌이 『노자』를 더욱 주목했는지 하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2.

함석헌은 자신이 노자와 장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애당초 정치하잔 생각은 없이 이상론을 한 것이니 크게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주 근본의 깊은 데를 파고 들어간 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점 때문에 생명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노자』 오천자 속에는 무한 영원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여긴다. 함석헌은 이처럼 무한 영원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다고 여긴 노장사상을 통하여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과 문제점을 공감하면서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이었고, 그것은 시대의 부조리와 압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나타났다. 왜 그는 저항하였는가?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의 밑바닥에 기독교사상 이외에 노장철학이 진하게 깔려 있는데, 함석헌은 아울러 노장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현실을 버티고 살아왔다고 피력하기도 한다.


이 몇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 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라고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莫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서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莊子』「逍遙遊」 참조) 이 약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노장은 함석헌에게는 저항의 몸짓을 할 수 있는 철학을 제공한 점도 있지만 아울러 어려운 삶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수와도 같았다. 생명수와 같은 노장을 그는 혼자서 맛보지 않았다. 그 생명수는 항상 씨알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었다. 즉 함석헌의 기본적인 관심은 씨알이었고 민중이었다. 결국 노장철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기본적으로 이 씨알을 위한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노장철학에는 절대평등, 개성해방을 추구하고, 불변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 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변화에 바탕한 변혁의 철학,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 ‘노(no)’라고 하면서 길들어지지 않고자 하는 정신, 다원론적 입장에서 바라보기에 다양하고 창조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 함석헌이 말하는 씨알을 진정으로 위하는 무위정치 등과 같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함석헌은 이런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에게 노장철학은 죽은 철학이 아니라 살아있는 노장철학이 될 수 있었다.  


함석헌은 누구보다도 현실에 대한 인식을 기반하지 않는 철학이 현실에 대해 발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진리에 대해 함석헌은 기본적으로 진리다원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이같은 입장에 서 있었기에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와 노장이 함석헌의 사유에서는 한데 어우러질 수 있었고 그만의 독특한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가 주장하는 유儒[유교]·불佛[불교]·도道[도가]·기基[기독교] 일치적 사유를 한국사상사적 위치에서 가름해볼 필요가 있다. 원효元曉의 화쟁和諍사상 및 통불교通佛敎 사상,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지묘理氣之妙의 묘합妙合 사상의 큰 맥 속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은 문명의 충돌을 거론하지만 어느 때보다 동서 간의 화합, 종교 간의 화합, 민족 간의 화합, 타자와의 공존을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때에 함석헌의 진리다원론적, 회통적, 묘합적인 사유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 元代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老子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