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나도 네 꿈을 꿔.

  • 470호
  • 기사입력 2021.06.25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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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천예원 (통계학과 20)


0.

작년 어느 날, 서울에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우리 엄마는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경상도 지방에서 일곱 살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해 살고 있다. 우리 엄마는, 지난 며칠간의 눈은 태어나서 본 눈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이 이번 눈이 그만큼 많이 내렸다는 의미인지, 아름다웠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떠오르는 궁금증을 뒤로한 채 우리는 아파트 공동현관으로 나가 눈을 맞았다. 니트 장갑이 다 젖어 축축해질 때까지 눈을 맞으면서, 문득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 날 <윤희에게>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올해 겨울에 또 다시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윤희에게>를 다시 보게 된다면, 나는 이번 겨울의 어떤 추억을 떠올리게 될까?


1. tracklist#9. 겨울의 오타루

<윤희에게>는 ‘윤희’와 그녀의 딸 ‘새봄’이 사는 한국과, ‘쥰’이 사는 일본의 오타루 지방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혼한 전 남편이 살고 있으며, 생계 걱정에 잠 이루지 못하는 현실적인 한국과 반대로(대부분의 관객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에 팍팍한 한국의 현실적인 모습에 아마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윤희의 첫사랑 쥰이 살고 있는 일본의 오타루 지역은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끊임없이 치이는 윤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20년 전 첫사랑 쥰이 사는 오타루는 꿈같은 이상적 공간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겨울이 되면 오타루 지역을 뒤덮는 흰 눈은 회색 빛의 한국과 대비되어 오타루라는 공간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든다. 꿈결같은 설원의 오타루를 거닐며 윤희는 쥰의 향기 앞에서 머뭇거린다.



2. tracklist#12. 윤희와 새봄

새봄은 엄마에게서 받은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람 외의 풍경과 사물들을 찍곤 한다. 인물사진을 왜 찍지 않냐는 삼촌의 질문에는 “저는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언젠가 내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의 모습을 남기기보다는, 나를 배신할 일이 없는 사물과 풍경을 남기는 게 안정적이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단호하게 ‘아름다운’ 사물과 풍경만을 찍는다고 말했던 새봄은, 오타루에서 윤희(엄마)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 남자친구와 오타루 마을을 산책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찍어달라고 되려 부탁하기도 한다.


새봄이 오타루에 도착한 이후 사람을 피사체로 남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 일본의 마을까지 찾아온 윤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생계를 포기하고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오타루까지 찾아오는 엄마의 모습은, 새봄에게 사랑이 가진 힘을 신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괜히 남자친구를 살갑게 대하거나 한 번 안아보기도 하면서,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내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은 시사회에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용감한 일.”이라고 말했는데, 감독의 이러한 제작 의도는 새봄이 ‘사랑’에 가지는 태도의 변화를 뒷받침한다.


새봄이가 최신 휴대전화 카메라 대신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데에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윤희에게>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는 바로 ‘그리움’이다. <윤희에게>는 서로를 20년이 넘게 그리워한 윤희와 쥰이 만나기 위한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필름카메라는 이러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게다가, 필름카메라는 바로 사진을 찍어 파일로 저장하는 인스턴트식의 휴대전화 사진과 다르게 사진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 필름카메라의 주요 특징인 ‘기다림’은 <윤희에게>를 관통하는 ‘그리움’의 정서와 연관 지어져 애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 tracklist#10. 너의 꿈을 꾸는 날이면

오타루 마을에 내린 눈을 치우는 쥰과 쥰의 고모가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눈이 와서 치우면 / 또 눈이 오고 / 치우면 또 눈이 오고...... / 자연 앞에선 무력해지는 수밖에 없다니까.” <윤희에게>에서 눈은 시간을 상징한다. 무한히 내리는 눈처럼, 시간은 멈춤을 모른다는 듯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흐른다. 정신을 차려보면 잔뜩 쌓여있고는 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시간이 아름답게 쌓이는 모습을 보고 우린 그걸 추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윤희에게>의 눈은 ‘기억’이다. 쥰과 쥰의 고모가 눈을 치우면서 자연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것처럼, 기억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잊히지 않으며, 때로는 원치 않을 때 사무치기도 한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기억은 내내 쌓여 나를 뒤덮는다. <윤희에게>는 이런 추억과 기억의 눈밭에 문득 발자국을 남겨보는 영화이다.



4. tracklist#24. 나도 네 꿈을 꿔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20년이 넘는 까마득한 시간 동안 엇갈릴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마음이 제 길을 찾아가는 것만큼이나 벅차 오르는 일은 없다.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 윤희와 쥰의 만남을 보니,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떠오른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