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독립운동가 김창숙선생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 490호
  • 기사입력 2022.05.10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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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영록(영어영문학과) 동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을 아시는가? 탤런트 김창숙씨는 알아도 위대한 독립운동가 김창숙선생을 모르는 분들이 많으리라. 하지만 몰라도 되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위인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그중의 한 분으로 나는 언제나 심산을 든다. 반식민 독립운동-해방후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한 ‘마지막 선비’ 심산은,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렸는데, 그의 꿋꿋한 정신과 기개는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다. 『김창숙 문존金昌淑文存』이나 자서전『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 『심산유고心山遺稿』(국사편찬위원회, 1973) 등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선생의 평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는다). 이 책들을 구해 읽기는 어려울 터이니,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아, 이런 분이 계셨구나’ 알아주기만 해도 좋겠다.


심산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조선조 유일한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을 해방이후 부흥하고 모교인 성균관대학을 세워 총장을 지내셨기 때문이 아니고, 대학 입학 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선생의 자서전을 구해 읽었기 때문이다.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어제 인사동의 한 전각예술인이 자신의 작품인 심산선생의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족자를 보여줘 깜짝 놀랐다. 하여, 이 새벽 <반귀거래사> 공부를 하며, 다시 한번 심산 선생께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반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명문장 <귀거래사>를, 요즘말로 패러디한 것인데, 이를 '차운次韻'이라 한다. 고교시절 한문선생님이 눈 지긋이 감고 <귀거래사>를 낭송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시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어지간히 외울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을 잘 만난 덕분이다. 물론 심산선생의 차운시 일부는 알고 있었지만, 이 족자로 인하여 전문을 들여다볼 수 있어, 지금 행복한 시간이다. 전문과 해석을 전재하는 까닭이다.


▲ 족자글씨의 가운데 큰 글자는 시 구절중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三八之斷腰'에서 따온 것이다.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1956년 10월 <심산 유고>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전원이 이미 황폐하니, 어디로 돌아가리? 田園已蕪將安歸

         조국의 광복에 몸을 바치매 余旣獻身兮光復役

         뼈가 가루된들 슬플까마는 縱粉骨而奚悲

         모친상 당하고도 모른 이 몸은 有母喪而不知

         되돌리지 못하는 불효에 울뿐! 痛不孝之莫追

         이역만리 갖은 풍상 다 겪으면서 飽風霜於異域

         나날이 그르쳐가는 대업 탄식하다가 嗟志業之日非

         문득 크나큰 모욕을 받아 身旋陷於大僇

         죄수의 붉은 옷 몸에 걸쳐도 穿虜犴之赤衣

         고생을 달게 받아 후회는 없고 忍苦辣而不悔

         행여 도심道心 쇠해질까 걱정했노라 懼道心之或微

         눈앞에 고향을 바로 두고도 鄕山在望

         쇠사슬에 묶기어 가지 못 했네 繫械莫奔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癈疾而躄, 始出牢門

         쑥밭된 집안에는 남은 것 없고 室廬蕩殘, 舊物無存

         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 不農奚餐

         빚을 수도 없으니 그 무슨 술 마시리 不釀奚酒

         친척들도 모두들 굶주려 하니 親戚亦其窮餓,

         솟구치는 눈물이 얼굴을 가리네 釀危涕而被顏

         아내도 집도 없어진 지금 旣靡室而靡家

         어느 겨를 일신의 안정 꾀하리 寧遑謀於奠安

         음험하기 짝 없는 사람들 있어 紛鬼蜮之恠物

         내 고향의 날뜀을 봐야 했어라 任跳梁於鄕關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 哀三八之斷腰

         그 더욱 슬픈 것은 동족의 무덤 最傷心於京觀

         모략 받아 죽은 이들 너무나 안타까와 歎明夷之入地

         하늘 우러러 하소연한들 그 누구 돌아오리 仰皓天而不還

         아! 거의 다 죽어가는 병든 이몸엔 噫垂死之病夫

         아무리 둘러봐도 어정댈 한 치 땅도 없도다 顧無所於盤桓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돌아가 세상과의 연을 끊으리 從此息交而絕遊

         세상 우습게 알아 감은 아니어도 非傲世而長往

         부귀영화 내 뜻이 아님이어라 寔榮貴之無求

         그러나 늙고도 창창한 마음 髮雖短而心長

         나라 일만 걱정되고 안타까웁고 惟天下之是憂

         노복을 불러 봐도 안 나타나니 呼長鬚而不見

         서쪽 밭에 밭갈 일 누구와 상의하리 孰問耕於西疇

         물결에 몰아치는 바람 사나워 湖海颶急

         외로운 배 노마저 꺾이었나니 棹折孤舟

         저기 저 치솟은 건 무슨 산이뇨 直峻何山

         머리 두고 내가 죽을 고향 쪽 언덕 是吾首邱

         고향 쪽 바라보며 차마 못가니 望岡臺而迍邅

         세월은 물같이 빨리 흐르고 歲華忽其如流

         안타까와 맑은 샘물 손에 떠들고 목 늘려 어정이느니 挹晴川而延竚

         늘그막에 편히 좀 쉬었으면 싶어도 庶嚮晦而宴休

         비웃고 조롱하는 나쁜 무리들 奈捓揄之惡倀

         나로 하여 고향에 머물게도 하지 않아 不俾我而淹留

         그 어찌 마음 조여 갈 곳 몰라 함이리 胡爲乎跼蹐迷所之

         남북을 몰아치는 흑풍 사나워 南北黑風惡

         화평을 이룩할 기약 없으니 和平未易期

         저기 저 사이비 정인군자를 彼叢莠之亂苗

         죽는 대로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竭蹶而耘耔矢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死道路兮亦何恨

         가만히 외어보는 위후의 억시 誦衛候之抑詩

         해처럼 밝디 밝은 나의 마음은 皦白日之此心

         귀신에게 물어봐도 떳떳하도다 質諸鬼神可無疑




어떠하신가? 참으로 도저到底하지 않은가? 숙연해지지 않은가. 어려운 한자들을 굳이 찾거나 출처를 아실 필요는 없겠다. 그저 우리말로도 읽어보는 게 어디인가.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죽는 대로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구절을 읊다보니, 문득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앞 동상에 새겨져 있는 <평화는 어느 때나/실현되려는가/통일은 어느 때에/이루어지려는가/밝은 하늘 정녕/다시 안 오면/차라리 죽음이여/빨리 오려무나>라는 시구詩句이 떠오른다. 이게 어찌 시인가? 선생 일평생의 마지막 절규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이제껏 <반귀거래사>도 모르고 이제사 지인의 족자작품을 통해 눈동냥 귀동냥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싶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흥얼거리며 한량閑良으로 살아온, 한량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반성한다. 족자글씨의 가운데 큰 글자를 읽으실 수 있는가? 시구절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哀三八之斷腰'에서 따온 것이다. 이 <반귀거래사> 족자작품을 만든 전각예술인 후배(둔석遯石 양성주梁聖柱)도 경의롭고 자랑스럽다. 고맙기까지 하다.


▲ 새벽 졸문을 읽은 전문화재청장을 지낸 언론인이 귀한 사진을 보내 이 사진을 실게 되었습니다. 감사천만.


참고로 수년 전에 쓴 졸문 https://cafe.daum.net/jrsix/h8dk/523?q과 어느 후배 언론인이 <심산상>을 병상에서 받은 백기완 선생 관련하여 쓴 칼럼 https://blog.naver.com/kje06/222135360563을 링크한다. <심산상>과 관련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적는다.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심산선생 관련한 책을 구해달라고 해 모두 읽고 감명을 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상금 700만원에 자신이 300만원을 보태 되돌려줬을 뿐 아니라, 수유리의 심산묘소에서 큰절을 두 번 올렸다고 한다. “어떻게 절 하실 생각을 했냐?”는 기자 질문에 “이런 분 앞에서 절을 하니 그럼 누구에게 절을 하겠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추기경님이 절하는 사진이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런 '바보 추기경'님도 그리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