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꿈꾸는 이들에게 Ⅰ
– ‘경동제약’ 류덕희(화학과 56) 명예회장

  • 526호
  • 기사입력 2023.11.01
  • 취재 윤지민 기자
  • 편집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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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실현해 내고, 하나의 기업을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눈부신 성공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과 웃음이 가득하다. 이번 커버스토리에서는 CEO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준비했다. 1편에서는 사회에 기여하며 따뜻함을 전하는 경동제약의 류덕희 명예회장(화학과 56)의 기사를 싣고 2편에서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이목을 끌고 있는 돈룩업의 심승준 (영상학과 20) 학우의 기사를 싣는다. 선배 CEO들이 CEO를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숨겨진 이야기와 응원의 메시지를 나눴다. 창업을 꿈꾸고 있는 성균인들에게 전하는, 선배들이 풀어내는 담백하고도 진솔한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무슨 일이든지 시작부터 하라”


류덕희 동문은 진통제 그날엔을 비롯해 많은 치료제를 생산하고 있는, 올해로 48주년에 이른 경동제약의 명예회장이다. 그는 1961년 우리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후, 2006년과 2016년 사이에 4차례 모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경동제약을 1975년 창립한 그는 우리나라 제약 기술의 빛나는 발전을 이끌어내며 경동제약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대표 제약회사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또한 우리 사회와 모교에 꾸준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상생의 따뜻함을 전하고 있다.



성균관대에서 경동제약에 이르기까지


|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CEO가 되어야겠다 목표하셨나요?

1956년 성균관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화학을 바탕으로 제약업에 일생을 바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학년을 마친 후 휴학하여 1년 동안 직장을 다니다가 1958년 2학년으로 복학하여 3학년 말인 1960년 2월(당시 신학기는 4월에 시작)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위원장으로 당선되어, 평생 잊지 못할 역사의 현장과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1,500여 명의 성대 학생들을 데리고 시위에 앞장섰던 경험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겪은 4·19 혁명의 현장에서 배운 민주적 가치를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며, 기업가 이전에 옳고 곧은 시민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향성은 한 회사의 대표로서 수백 명의 직원들을 이끌고 함께 해야 하는 삶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좌: 문리과대학 학생 위원장 시절 / 우: 성대 재학 당시


▲ 오른쪽 맨 끝 류덕희 회장



| 1975년에 설립된 유일상사를 시작으로 경동제약이 나아가게 됐는데요, 설립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약사업에 뛰어든 것은 화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제약사를 해보자는 친구의 제안에서 비롯됐습니다. 1969년, 한올바이오파마의 전신인 선경제약을 설립했습니다. 1970년대 회사 창업 당시에는 수입 의약품이 매우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고, 따라서 다국적기업과 합작하거나 기술제휴를 맺어 약품을 생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6년 만에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각자가 회사를 하고자 경동제약의 전신인 유일상사를 설립, 1975년 9월 9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 사무실을 차리고 기존 제약사를 인수하여 이듬해 경동제약으로 사명을 개명하고 원료를 수입해 국내 자체 생산 방식으로 대체하면서 점차 매출을 늘려나가 소비자의 부담을 줄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수입의약품 대체라는 확고한 방향 설정과 함께 회사 창립 이후 해마다 30%가 넘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경동제약’은 창업의 출발점이 ‘서울’이라는 의미와, 밝은 해는 ‘동녘’에서 떠오른다는 의미를 함께 담은 상호로, 인류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길잡이가 되자는 바람과,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동제약이 앞으로 온 세계를 비추는 밝은 해처럼 솟아오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의 기업을 이끌어가며


| 기업 운영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창업 초기 당시에는 관세가 높아 수입 의약품이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타사처럼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면 경쟁이 더 쉬웠겠지만, 원료를 구하고 제제연구를 통해 직접 생산하여 수입 의약품을 국산화하는 것이 전략이었습니다.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원료를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구해 제품을 생산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한번 출장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유럽과 남미까지 찾아다니며 원료를 구했습니다. 시약 이외는 팔지 않는다는 독일 제약회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원료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주사제를 개발하면 임상시험 대상을 자처해 먼저 맞아 보는 등 연구에 온 힘을 보탰습니다.


1984년 11월 7일 늦은 밤에 부평공장이 불타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 온 적도 있습니다. 부평으로 가는 중에도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고, 공장은 다 타더라도 재건할 수 있으니, 완제품만은 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도, 납품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화재나 제품보다도, 거래처와의 신뢰가 가장 문제였습니다. 경동제약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힘은 언제나 회사 직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한마음으로 뭉쳐 신속하게 공장을 복구한 직원들이 아니었다면 짧은 시간에 회사를 정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공장을 복구하고 재가동하는 데 한 달가량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경동제약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법을 배웠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비자의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길을 지켜보면서도 기업의 손실보다 소비자에 대한 신뢰를 먼저 생각했고, 이를 지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 1984년 11월 화재 후 부평공장


▲ 1984년 화재 이후 복구시킨 부평공장


| 회장님의 기업 운영 철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저의 인생철학이자 경영철학은 ‘인간 존중’입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는 생명과 직결된 약을 만들기 때문에 더욱 성실한 마음가짐과 올곧은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업이 얻은 이윤의 일부를 나눔으로써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에 조금이나마 환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하나의 큰 작품을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실되고 근면하게 창조하고 개발하여 성심으로 봉사함으로써 인류의 건강과 행복의 길잡이가 되자’는 사시를 만들어 모든 직원과 함께 공동체 의식을 다지며 회사를 운영해 왔습니다.



경동제약만의 것


| 경동제약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경동제약을 창립하고 중견 제약사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힘썼던 점은 ‘수입 의약품의 국산화’와 ‘원료의약품의 개발’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외국 제약회사의 앞마당이 될 것인가’하는 것이 창업동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제약회사가 합작이나 기술제휴 방식으로 국내 의약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또 이들은 특허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상당수 제약업체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특허 공세가 무서워 국산화에 대해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국산화에 나설 때마다 어김없이 다국적제약사들은 특허소송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늘 연구개발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서 큰 법적 다툼으로만 해도 16:0으로 모두 승소했습니다. 경동제약은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수입에 의존하던 다수 의약품의 합성법과 새로운 제조 방법 개발로 속속 수입대체 효과를 거뒀습니다. 원료의약품 개발 역시, 주로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의약품을 직접 합성하고 새로운 약물전달기술을 꾸준히 개발했습니다. 그 결과, 진통소염제, 항바이러스제와 같은 원료의약품을 국내 최초로 합성하고 혈압강하제 및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등의 제형을 새롭게 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 경동제약을 대표하는 제품과, 해당 제품의 개발 비화가 궁금합니다.

-디로핀 지속정(1999)

경동제약은 1989년 개발부를 발족하면서 신제품 개발 업무를 본격화했고, 영업력이 강화된 1990년대 후반부터는 경쟁력 있는 제품에 중점을 두어 전략적인 연구개발을 추진했습니다. 창업 이후 다른 제약사와 차별화된 제품 개발에 전력하면서 축적한 저력을 바탕으로 1999년 발매한 디로핀 지속정은 발매 당해년도부터 경동제약 제품 가운데 최고 매출을 기록하다가 발매 5년째인 2004년에는 147억 원 이상의 매출실적을 올리며 경동제약 최고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디로핀 지속정이 개발되기 전인 1998년 당시 시중에는 독일 훽스트(Hoechst)사의 무노발 및 스프렌틸 지속정이 유일하게 상품화되어 있었는데, 제제화 과정이 복잡하여 다른 회사에서는 개발할 시도조차 못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혈압 시장의 성장가능성을 직시하여 펠로디핀 제제를 자체 기술로 제품화하기로 하고, 다양한 연구 끝에 지속성 제제로 개발하는데 성공, 제형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디로핀 지속정은 펠로디핀 제제를 국산화한 국내 최초의 제네릭 제품으로, 발매 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원개발사의 제품인 무노발보다도 높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제네릭으로서는 넘기 힘든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이는 회사의 뛰어난 기술력과 영업력을 입증한 사례로 2000년대 경동제약 제네릭 제품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에이서 정(1998)

1998년 5월에는 아세클로페낙의 제조 방법을 개발해 특허 출원됐으며, 그동안 외국에서 고가로 독점 수입되던 제제로 수급에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아세클로페낙은 곧바로 해열진통소염제 에이서 정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원료개발에 처음으로 성공한 에이서 정은 경동제약의 대표 브랜드로 회사에 기여한 공이 막대했습니다. IMF와 함께 치솟은 환율상승에 따른 원료비용 부담으로 국내의 여러 제약사들이 부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경동제약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저렴한 비용의 원료를 확보할 수 있어 제품의 제조 비용을 절감하면서 회사매출을 신장시켰습니다. 아세클로페낙의 합성과 에이서 정을 통해 IMF 위기를 넘긴 2000년 이후 경동제약의 신제품 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았고, 이후 소화기용제 레바미드 정(2002), 항바이러스제 팜크로바 정(2004)이 모두 국내 최초로 새로운 원료합성법을 개발하여 상품화한 제품으로 제약업계에 퍼스트제네릭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레바미드 정ㆍ팜크로바 정ㆍ유로날 서방정(2002ㆍ2004)

2002년에 발매된 레바미드 정은 국내 유수의 제약사에서도 수탁받아 생산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처음으로 미국에서도 특허를 취득한 제품으로, 2007년에는 원개발국인 일본에서도 특허가 인정되어 전망을 더욱 밝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유럽에도 특허를 출원하면서 경동제약은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선진 국가에도 원료와 완제의약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2004년에 제품화한 팜크로바 정은 다국적 기업에서 제기한 특허침해소송에서 당당히 승소함으로써 원료제조기술의 우수성을 국내외에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방성 제제 기술에 따른 제형변경으로 개발한 퍼스트제네릭 제품 유로날 서방정은 발매 첫해부터 새로운 판매고를 갱신하며 시장에서 선두주자 역할을 해냈습니다.



류덕희 회장의 이야기


| 경동제약을 이끌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1990년대 초부터 신제품 개발 전략과 함께 퍼스트 제네릭 의약품 개발에 앞장서기 위한 생물학적동등성시험을 수행하는 한편, 거대 다국적 제약사를 상대로 16개 품목 30건의 특허소송에 맞서 모두 승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수십억 원의 로열티를 제시하며 특허 양도를 요구하는 기업과 맞서 국내 제약업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켜온 결과 2023년 10월까지 국내외에 등록되어 있던 특허는 총 62건이며 현재 출원 진행 중인 특허는 1건으로, 혁신적인 연구 개발을 통하여 다양한 지식 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 사회와 모교에 꾸준히 기부를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춘궁기가 되면 마을에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보고 오라고 했고 그 집에 곡식을 갖다주곤 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학창 시절 4·19혁명과 두 번의 사업 실패 등을 겪으며 건강을 해치기까지 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회사를 창립했는데, 나눔을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1980년대 초반, 사업 초기 시절에 한 아동보호 시설에서 영양제와 응급약품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꼭 돈이 아니라도 어려운 이웃에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편지를 보내온 곳은 물론 양로원 등에도 방문해 약을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니 손해가 아닌 마음의 위로와 벅찬 감동과 보람이 느껴졌습니다. 고통의 삶에서 남을 생각하며 나눔을 할수록 긍정의 마음이 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고, 수없이 많은 회사가 부도가 나는 등 위기를 겪던 IMF 시절에도 오히려 회사가 점점 성장하는 결과로 돌아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부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인데, 나눔 활동은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고 성장한 후에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비록 넉넉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조금씩이라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의 나눔은 마치 손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 우: 장학금 수여식


▲ 제35회 장학금 수여식


| 수많은 도전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나 자신을 믿는 마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시작부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일단 일을 시작하여 차근차근 작은 성취감을 맛보며 생활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길이 열리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일을 통해 목적을 찾아가는 삶, 자신의 영역에서 발전하려는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분명 인생이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모여 우리네 삶을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게 될 것입니다.



|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경동제약은 나눔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기업의 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만의 기업문화가 여럿 있지만, 그중 특히 나눔과 실천이 경동제약의 전통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보람이며 앞으로 우리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동제약은 이 시대의 전문화·특화 흐름에 맞춰 연구개발에도 매진하고 있으며, 아울러 꾸준히 변화를 모색해 갈 것입니다.



CEO를 꿈꾸는 이들에게


우리 성균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배우고 실천할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은 사랑의 사상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의 측은지심이고, 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즉 수오지심의 사상입니다. 예는 사양지심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도리,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 그다음에 지는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으로,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자세를 키우라는 뜻입니다. 인의예지 중에서도 인의 사상을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을 위해서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 성균인 후배들은 앞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서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남을 위해서도 인의예지를 실천하는 훌륭한 인재로 거듭나기를 당부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슨 일이든지 시작부터 하라’는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더욱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때라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늦게 시작해도,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다. 무작정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도전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중한 고민과 과감한 결단으로 무슨 일이든지 시작함으로써 다양한 경험을 통해 향후 이 사회 곳곳에 꼭 필요한 인재들로 우리 성균인들이 자리해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