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를 넘다, 키아 展

아방가르드를 넘다, 키아 展

  • 332호
  • 기사입력 2015.09.30
  • 취재 정예원 기자
  • 편집 김예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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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 누군가에게는 그저 감탄사 한 어절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계에서는 이탈리아에서 트랜스아방가르드를 일으킨 예술가의 이름이다. 트랜스아방가르드는 말 그대로 아방가르드를 넘어선 예술 사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란 무엇일까. 이는 프랑스어로 ‘전위’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본대에 앞서 선두를 서서 적의 움직임과 위치를 파악하는 척후병을 일컫는다.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은 과거의 예술개념을 전복하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지칭한다 (전위예술[前衛藝術] -두산백과 참고) 아방가르드는 무의미의 의미를 탐구하는 다다이즘 등 고전적인 회화를 부정하는 특징을 보였다. 1970년대 후반, 산드로 키아는 엔초 쿠키,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등과 함께 당시에 유행하던 전위예술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미술 양식과 테크닉 등을 지지하는 트랜스아방가르드를 시작했다.

키아는 88서울올림픽의 공식 초대 작가로 선정되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아방가르드를 넘다, 키아 환상과 신화 展>은 그의 국내 첫 단독 기획전이다. 전성기 작품을 주로 다루며 드로잉을 포함하여 총 107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회는 이탈리아 트랜스아방가르드, 미술 양식 재건의 시작/색채의 마법/예상하지 못한 포스트 모더니티의 접근/인식 가능한 회화에 대한 고찰/신미술 창조의 주역으로 총 5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섹션은 연도별로 진행하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 면이 크다.

그는 풍부한 예술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여러 예술 사조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작품에서는 야수파, 입체파뿐만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의 사조까지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내가 예술사를 얼마나 아는가에 대한 척도도 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작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손 게임>에서 관람자는 원기둥이 무너지기도 세워지는 것 같기도 한 배경에서 한 남자가 허공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남자의 근육질 몸매는 르네상스 시대에 육체를 그릴 때 사용했던 방식이며 눈동자가 없는 얼굴은 모딜리아니의 표현법과 유사하다. 특히 강렬한 빨간빛의 색채는 야수파인 마티스를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여러 작가를 한 프레임에서 볼 수 있다. 배경은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갈리는데 크게 2가지가 존재한다. 먼저 무너지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는 아방가르드 미술 중 하나인 개념미술의 추락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기둥이 세워지는 것처럼 그가 선도하고 있는 트랜스아방가르드도 확립되어간다는 해석도 있다. 다른 작품 <늑골 사이의 크리스털 권총>에서는 역시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남성이 화려한 배경을 등에 지고 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의 주변에는 초록색, 빨간색의 하트가 놓여 있다. 이 만화 같은 표현은 마치 팝아트를 보는 듯하다. 인물이 들고 있는 권총에서 하트로 이어진 점선은 그의 작품세계가 여러 사조를 다룬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독한 여인>에서는 젊은 여인이 혼자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고등학생 때 미술 시간에 배운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이 작품은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과 유사하다. 키아는 게임과 예술은 닮아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작품이 철학적인 접근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턱시도, 리비도, 토르페도>라는 작품에서는 사람과 돼지가 등장한다. 사람이 턱시도, 리비도, 토르페도라고 말할 때 돼지는 팔라초, 테라초, 파파라초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턱시도는 남성 정장을 리비도는 성욕을, 토르페도는 어뢰를 뜻한다. 돼지가 말하는 팔라초는 건물을 테라초는 테라스를 파파라초는 파파라치를 의미한다. 단어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으며 단지 같은 발음으로 끝날 뿐이다. 사물의 이미지인 ‘기의’와 청각적 표현인 ‘기표’는 자의적 관계를 맺는다는 소쉬르의 이론을 떠올려 보자. 즉 사람은 도도도, 돼지는 초초초라고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실질적인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키아는 신화와 역사, 고전 등을 주관적으로 인용하였으며 개인적인 경험 또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거인을 통해 희망과 고통을 지닌 인간존재를 표현하였다. 그는 풍부한 상상력과 과감한 색채 표현을 통해 이성과 논리가 아닌,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산드로 키아-두산백과 참고)

신화를 소재로 삼은 작품은 <레다의 백조>가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인 레다를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하여 유혹한다. 그 후 레다는 알 두 개를 낳았으며 그 알에서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 헬레네가 태어났다. 이러한 레다와 백조 전설은 르네상스 시대에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섞인 도발적인 배경과 하이힐을 신은 듯한 레다의 모습을 통해 키아는 이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였다.

개인적 경험을 담은 그림으로는 <교훈>과 <나를 구조해줘요>를 들 수 있다. <교훈>에서는 성인남성과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키아의 대부분 그림에서 성인남성은 키아 자신을, 남자아이는 그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의 사진과 비교하면 묘하게 닮았음을 알게 된다. 거인으로 표현된 그가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성모자화를 발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나를 구조해줘요>에서는 거센 파도에서 금방이라도 잠길 듯한 뗏목에 앉아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며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키아가 그의 고향인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물은 부정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으며 검푸른 색은 그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전시회에서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의 연작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키아 자신의 기억 단편을 캔버스로 옮긴 작품이다.

이 전시회의 포스터를 장식한 <키스> 연작은 키아 환상과 신화 展에서 아시아권 최대로 전시되고 있다. 남녀가 키스하는 순간을 담은 이 그림은 두 사람이 마치 하트표를 그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발개진 볼과 꼭 감은 두 눈은 키아가 말하는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해 보게 된다.

20세기 말 주류를 이루던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거부하고 붓 터치와 색감의 세계로 넘어선 살아있는 거장 키아. 그림 속에 에너지와 행복을 담으려고 노력했던 그의 그림은 현대의 우리 곁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세상은 한계와 경계가 없는 자유의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