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지명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지명 이야기

  • 377호
  • 기사입력 2017.08.16
  • 취재 신도현 기자
  • 편집 노한비 기자
  • 조회수 6481

길을 걷다보면 문득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유래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는 명륜동에 있다. 명륜동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시대 성균관의 명륜당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캠퍼스로 넘어가보자. ‘율전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문화읽기에서는 평소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지명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율전’이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밤나무 율(栗)과 밭 전(田)으로 이루어진 단어다. 단어 그대로 읽어보면 ‘밤나무 밭’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수원시 율전동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율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직까지 율전동에는 밤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마을 내에서도 밤꽃마을, 밤밭노인복지관 등 밤과 관련된 단어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인접한 구역 중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율천동 역시 밤나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율전동은 밤나무가 많다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율천동은 행정동으로서 관할구역인 율전동과 천천동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와 이름을 정했다는 차이가 있다.


정확한 행정구역 상 명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이다. 신촌이라는 말은 ‘새터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찾던 시기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당시 신하들은 신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태조가 직접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부터 신촌동 일대를 새터, 새터마을, 새터말 등 다양하게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새터라는 단어는 보통 새내기 배움터를 지칭할 때 주로 쓰이지만 순우리말로 새터는 새로운 터의 의미가 있다. 새터를 한자로 표기한 결과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신촌(新村)이 됐다.

그러나 정작 도읍은 당시 신촌이 아니라 지금의 경복궁 위치에 지어졌다. 신촌을 서대문구 신촌동만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신촌뿐만 아니라 넓게는 홍익대학교 인근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근처까지 포괄한다. 홍익대학교는 마포구 상수동이고 이화여자대학교는 서대문구 대현동에 있다. 지금에야 홍익대학교는 홍대앞, 이화여자대학교는 이대라는 상권을 형성하여 신촌동과는 조금 다른 문화와 상업적 특성을 나타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촌이라는 명칭은 그 일대 대학가까지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곤 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신촌동은 연세대학교 일대와 경의 중앙선의 신촌역까지만 포함하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하철 2호선을 나오면 만나는 ‘신촌’은 창천동에 속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 이태원의 경리단길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경리단길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이태원동의 이름에 대해 알아보자.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 속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 효종 때 이태원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로 배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주장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모여 살면서 이태원이 됐다는 설이다. 두 주장은 고문서에서 이태원의 한자 표기 차이에 따라 발생한다. 전자는 이태원의 한자 표기를 배나무 이(梨), 클 태(泰, 우리가 보통 아는 太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담 원(院)이다. 후자는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 담 원(院)이다. 무엇이 정확한 주장인지는 당시 사람들만이 알겠지만 옛날에 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경리단길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태원의 유래에 비하면 경리단길은 정말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경리단길 초입부에는 국군재정관리단이 있다. 이전에는 국군재정관리단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육군중앙경리단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경리단길은 인근에 위치한 미군부대와 이태원의 영향으로 외국 느낌이 나는 식당과 술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경리단길에서 연예인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순식간에 명소로 자리 잡았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면서 망원동 유명 거리를 망리단길, 한성대입구역 근처의 거리를 ‘한리단길’이라고 지칭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서울의 왕십리는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은 지역이다. 지하철 2호선과 5호선, 경의·중앙선이 지나가고 있으며 지하철 분당선의 종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왕십리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십리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을까. 왕십리는 앞서 말한 신촌처럼 도읍을 정할 때 지명이 정해졌다. 왕십리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무학대사에 대해 알아보자. 무학대사는 고려말부터 활동한 승려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다. 자신이 지지한 이성계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으며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왕의 고문역할)가 되어 회암사에서 지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능해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무학대사는 경복궁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다.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면 나라에 큰 화가 닥쳐 궁궐이 불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말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탔다.

왕십리 지명은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왔을 때 유래됐다. 앞서 이성계가 신촌에 도읍을 정하려 했던 것처럼 무학대사 역시 왕십리에 도읍을 지을 것을 추천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도선대사(신라 말기의 승려로 풍수지리의 대가)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10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늙은 농부가 아니라 학의 울음소리가 왕십리와 비슷해 무학대사가 기이하게 여겨 10리를 더 가서 지금의 도읍 위치를 발견했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실제로 왕십리 일대는 조선이 건국된 도읍 자리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지명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기자는 극히 일부만을 소개했을 뿐이다. 학우 여러분들이 길을 걸을 때 앞으로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한번쯤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산책로가 세상에서 제일 큰 이야기책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