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형태를 입히다,
'아날로그 카메라'

  • 482호
  • 기사입력 2021.12.28
  • 취재 박정원 기자
  • 편집 김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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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은 일생에 단 한 번만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의 지속적인 기록이다. 그것은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끝내 사라졌을 장면으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 조지 이스트먼 (Kodak 창립자)


기억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망각은 우리의 기억을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갉아먹는다. 이를 막기 위해 인간은 순간들을 어딘가에 남기기로 했고, 글자와 그림이 태어났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그렇게 등장했다. 인간에게 있어 사진은 순간을 기록하는 도구 이상이다. 사진이 기억보다 위대한 것은 우리가 미처 눈에 담지 못한 부분까지도 생생히 간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DSLR과 미러리스 등 디지털 카메라는 고사하고 당장 스마트폰을 열기만 해도 누구든지 선명한 사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꿋꿋이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아날로그 카메라의 위상은 언뜻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번 문화읽기에서는 시대를 아우르는 아날로그 카메라의 매력을 알아보려고 한다.


▶ 단 한 번의 순간, 단 하나의 필름 – 폴라로이드

셔터를 누르면 곧바로 지잉 소리를 내며 작은 필름이 밀려나온다. 즉석 사진기로도 불리는 폴라로이드는 사실 이 제품을 제작한 기업의 이름이다. 대일밴드나 포크레인처럼 기업명이 상품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진 사례다. 셔터음과 동시에 인화가 시작되는 특성 탓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은 한 장마다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시간을 멈추지 않는 이상, 모든 순간을 눈에 담을 기회는 오로지 한 번이기에 폴라로이드의 이러한 점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폴라로이드 하면 떠오르는 영화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2000)>에서는 주인공 역의 가이 피어스가 폴라로이드를 러닝타임 내내 가지고 다닌다. 전향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은 자신이 잊어서는 안 될 인물과 장소, 정보를 찍는다. 눈 깜빡하는 순간 단 몇 분 사이의 일도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는 그에게 폴라로이드는 기억 그 자체다. 그는 늘 인화된 필름을 팔랑이며 삶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채워 나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흔드는 행위가 현상 속도를 높이는 데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도리어 필름을 흔들면 사진의 선명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만약 사진에 담긴 모습을 더 빠르게 만나보고 싶다면 인화된 필름을 주머니에 넣어 온도를 높이도록 하자.


▶ 팬 문화 속 폴라로이드

한 분야의 마니아층을 혹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다름아닌 희소성이다. 팬 문화에서 폴라로이드가 갖는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나름 팬덤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포토카드는 아무리 희귀하더라도 대량으로 유통된다. 그에 비해 세상에 단 한 장뿐인 폴라로이드의 희소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곧 애정을 가진 대상의 특정한 순간을 독점적으로 소장하는 느낌을 준다.


▲ (좌) 1theK 공식 트위터 / (우)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공식 트위터


폴라로이드를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K-POP과 공연계다. 아이돌 그룹의 앨범 판매 사이트를 살펴보면 몇 장의 폴라로이드가 앨범에 무작위로 포함되어 있다는 안내를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아이돌이 출연한 콘텐츠를 홍보하기 위해 SNS 이벤트 경품으로 내거는 경우도 숱하다. 공연계에서는 같은 극을 일정 횟수 관람한 사람 또는 제작사가 사전에 공지한 회차의 관람자 전원에게 배우들의 폴라로이드를 증정한다. 물론 종류는 랜덤이다. 일부 제작사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든 통에 관객이 직접 손을 넣어 뽑도록 하는 소소한 스릴을 선사하기도 한다.


▶ 빛바랜 추억처럼 아련하게 – 일회용 카메라

필름 특유의 물 빠진 색채는 오히려 사진 속 순간을 낭만으로 물들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하게 번지는 기억의 본질을 오롯이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을 찍는 일회용 카메라는 폴라로이드와 더불어 아날로그 카메라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구입하고 필름 카메라라고 부르는 장치의 정확한 명칭은 아마도 일회용 필름 카메라일 것이다. 내장된 필름을 전부 쓰고 나면 재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회용 카메라로 불린다. 가장 대중에게 친숙한 모델은 코닥과 후지필름에서 생산된다. 촬영한 사진은 카메라 내에서 확인할 수 없고 현상소에 맡긴 뒤 기다려야 한다. 현상소에서는 인화가 완료되면 종이로 된 사진을 받을지, 스캔한 사진 파일을 메일로 전송 받을지를 미리 선택한다.


카메라 애플리케이션 ‘구닥’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림을 추구하는 필름 카메라의 감성을 그대로 가져왔다. 촬영 후 72시간이 지나야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유료 앱의 등장은 그 성공요인에 관심이 쏠리기 충분했다. 구닥이 선보인 기다림의 미학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에 열광하게 했고, 실물 일회용 카메라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 코닥 일회용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


▶ Kodak(코닥)이 우리에게 남긴 것

코닥은 버튼만 누르면 나머지는 자신들이 하겠다는(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슬로건을 걸고 카메라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창립자인 조지 이스트먼은 카메라를 연필만큼이나 쓰기 쉽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이전까지 매우 복잡했던 사진 촬영 방식을 놀랍도록 간소화했다. 일반 대중 사이 카메라의 상용화를 이룬 코닥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사진가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 파산을 신청한 데다 여러 특허를 매각하기까지 드라마틱한 위기를 겪게 된다. 이유는 필름 산업의 위축을 우려해 디지털 카메라 생산을 등한시하는가 하면 기술개발과 원가절감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코닥이 오직 기존의 것만을 고집하기보다 시대의 흐름과 동행하기를 선택했다면 찬란히 빛나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재 아날로그 카메라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디지털 카메라와의 차별점 때문이지, 이것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아날로그 카메라 시장이 추구해야 할 방향 역시 그렇다. 빠른 속도의 기술 발전 가운데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 바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아날로그 카메라만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