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도 인정한 궁궐, 창덕궁

  • 447호
  • 기사입력 2020.07.15
  • 취재 고병무 기자
  • 편집 김유진 기자
  • 조회수 5865

지난 창경궁과 경복궁에 이어서 이번 <킹고복덕방>에서는 조선의 법궁인 창덕궁을 다녀왔다. 조선의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궁궐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서울시 공공자전거를 타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출발하면 대략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접근성도 좋고 산책하기에 좋은 거리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조선의 동궐, 창덕궁으로 떠나보자.

*창덕궁의 역사와 상세 내용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를 참고하였습니다.

*본 기사 사진의 출처는 문화재청과 창덕궁관리소에 있습니다.


동궐도


 

창덕궁은 현재 남아있는 궁궐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궁궐이다. 창덕궁의 모습을 그려낸 <동궐도>를 보면 조선후기의 창덕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아쉽게도 그림에 나타나 있는 모습 중 터만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바로 환경전과 경복전인데, 환경전의 경우 순조 30년에 불탔고, 경복전 역시 불타서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20.07.13 기준)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들이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6월 15일부터 휴관을 하고 있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다녀오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창덕궁의 원래 개장 시간은 오전 9시이며, 폐장 시간은 월마다 17시~18시 30분으로 상이하다. 또한 만 25세까지는 무료입장이 가능하니까 상황이 나아지면 나들이 겸 한번씩 들러 보는 것도 좋다.



  • 돈화문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켜라”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역시 초입에 정문이 자리잡고 있다. 이름은 돈화문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돈화문은 왕이 행차를 하거나 행사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되었으며, 상징적인 의미의 문이기 때문에 일반 신하들은 돈화문이 아닌 좌우 담장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지만, 광해군이 즉위하고 재건되었다. 구조상의 특징으로는 다른 궁궐들과 달리 다섯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궐을 지을 당시의 관습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창덕궁을 지을 당시에는 황제국인 중국만 정문을 5칸으로, 이외의 나라들은 3칸으로 짓게 되어있었는데, 다른 궁궐에는 이 같은 관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돈화문의 경우 5칸으로 짓되, 양쪽의 칸들을 막아 놓아서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칸은 3칸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궁궐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문으로 뽑힌다.



  • 인정문과 인정전

<인정문>

돈화문을 통해 창덕궁 내부로 들어왔다면, 본격적으로 창덕궁을 관람해보자. 돈화문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문이 바로 인정문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향하는 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다른 궁궐과의 차이점은 궁궐의 정문과 정전의 정문이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개의 궁궐들과는 달리, 창덕궁의 경우에는 자연의 모습을 살려 굽이져있다.


<인정전>

인정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 나타난다. 인정전은 주로 중요한 국가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2단의 월대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높이가 낮고 난간도 없기 때문에 경복궁 근정전에 비하면 작은 모습이다. 다만, 통층 건물이라 천장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정문 내부>

인정전의 내부는 독특하게 서양식 액세서리가 장식되어 있다. 유리창과 전구, 커튼 등 구한말 이후에 다양한 외래 문물이 전파된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이 아닌 마루인데, 이는 1907년에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 바뀐 부분이다.



  • 선정전


다음으로 가볼 곳은 선정전이다. ‘널리 정치와 교육을 펼쳐라’라는 뜻을 가진 공간으로 임금이 집무를 보는 곳으로 쓰였다. 주로 고위직에 있던 신하와 함께 일상 업무를 보았으며, 조정회의나 업무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열렸다. 선정전의 기와 모습이 독특한데, 궁궐에서는 보기 드문 청기와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선정전이라는 명칭은 세조 7년에 바뀐 것으로, 이전까지는 조계청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 선정전은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  대조전


4번째로 가볼 곳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인 대조전이다. 대조전은 침전의 역할을 하면서 왕비의 생활공간이기도 했는데, 1917년 불타서 없어진 뒤 그 터에다가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 다만, 경복궁과 창덕궁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재구성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조전을 중심으로 해서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한 부분을 알 수 있다.이 곳은 조선 말기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대조전 주변에 있는 여러 부속건물 중 하나인 흥복헌에서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고, 1926년 4월에는 순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시기를 거친 대조전으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가 되어있으며, 왕실의 마지막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독특한 느낌을 준다.



  • 희정당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인 희정당이다. 이 곳은 왕이 가장 많이 사용했고, 머물렀던 곳이다. 물론 창덕궁의 상징적인 전각은 인정전이지만, 희정당은 실질적으로 오랜 시간 머물렀던 곳인 것이다. 원래는 숭문당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연산군 2년에 지금의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특이하게도 원래는 침전이었으나 편전이었던 선정전이 가진 불편함 때문에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희정당도 앞서 말했던 대조전과 같이 1917년 있었던 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1920년 복구되었고, 이때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창덕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과는 매우 다르며 카펫과 유리창문 등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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