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중심 <br>영화에 대하여

여성 중심
영화에 대하여

  • 366호
  • 기사입력 2017.03.02
  • 취재 이종윤 기자
  • 편집 최재영 기자
  • 조회수 6993


최근의 몇 년만큼 여성 문제가 자주 대두된 적이 있었던가. 페미니즘은 작년의 가장 큰 이슈였다. 출판계도 시류에 따랐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나쁜 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여성학/젠더 부문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관련 도서의 판매량도 몇 배씩 늘었다. 여성들의 행동은 소비에만 그치지 않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등의 책은 대중이 직접 모금하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판됐다. 지난달 21일에는 워싱턴DC를 중심으로 세계 7대륙 각지에서 여성 행진(Women's March)이 시작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트럼프의 출범과 맞물린 행진은 여성은 물론이고 성정체성, 종교 등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영화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 평론가들의 불균형한 성비를 지적한 바 있다. 미국 박스오피스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의 평론가 및 블로거 중 남성은 760명, 여성은 168명이라 한다. 뉴욕비평가협회도 남성이 37명, 여성이 2명이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불과 4개월 전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 후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담이 열 번 넘게 열리며 현장의 많은 이야기를 담았고 경각심을 주었다. 2016년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윤가은 감독을 비롯해 많은 여자 감독들이 영화계에서 활약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이번 킹고스타일에서는 여성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작품 몇 편을 소개한다.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세 가지 질문이다.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등장하는가,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가, 남자와 관련되지 않은 내용의 대화인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화 내 양성 간의 비중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쓰인다. 아래는 벡델 테스트를 가뿐히 통과한 영화들이다. 두 명 이상의 여자들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각기의 하모니를 보는 재미가 있다.

◈ 서프러제트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 [서프러제트]는 작년 6월 개봉했다. 영화는 여러모로 화제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일어난 지 100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화됐다. 우리나라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한 달 뒤 개봉했고, 해당 영화의 상영관에서 남성 관객이 여성 관객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과거 이야기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를 이끄는 인물이다. 영화는 참정권 운동의 리더인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가상인물 모드 와츠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 아이의 어머니, 한 남자의 아내로 누구보다 시대에 맞춰 살던 와츠가 서프러제트가 돼가는 과정을 그렸다. 대단한 리더나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물에 주목한 영화는 운동에 참여한 이름 모를 수많은 여성들을 상기시켰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도 성공했다.

◈ 안토니아스 라인
[안토니아스 라인]은 2009년 재개봉했다. 그만큼 대표적인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는 새로운 공동체상을 그린다. 네덜란드 농촌에서 살아가는 4대 모계가족의 이야기다. 주인공 안토니아의 농장에는 장애인, 미혼모, 동성애자, 이방인 등의 소외된 사람들이 모인다. 안토니아의 라인에는 가부장제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여자에게 결혼과 모성애가 강요되지 않는다. 안토니아는 홀아비인 바스와 결혼하지 않고 연인이자 친구로 남았으며 딸인 다니엘도 결혼 없이 테레사를 낳는다. 테레사는 딸인 사라를 낳은 후에도 육아 대신 자신의 일과 공부에 집중한다.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척되지 않는다. 마을 담벼락의 낙서 '환영, 우리의 해방군' 은 안토니아의 공동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 고스트 버스터즈
유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고스트 버스터즈]가 돌아왔다. 경쾌한 OST는 그대로다. 다만 주인공들의 성별이 바뀌었다. 2016년 개봉한 [고스트 버스터즈]는 1984년 시작된 [고스트 버스터즈] 시리즈의 리부트 작이다. 남자 세 명 대신 여자 네 명이 모여 유령을 퇴치하고 세상을 구한다. 이 여성들을 금발 백치 미남 케빈이 보조한다. 전형적인 성 역할이 전도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가 영화에 재미를 더했다. 주인공 세 명은 코미디 SNL 출신의 배우다. 우리에게 '토르'로 익숙한 케빈 역의 크리스 햄스워드도 엉뚱한 백치 미남을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원작보다 화려한 시각효과로 영화 내내 눈이 즐겁다. 원작을 보지 못한 사람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다.



패트와 매트, 보니 앤 클라이드, 셜록과 왓슨, 철이와 미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듀오들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여성 듀오가 활약하는 영화는 무엇이 있을까. 두 여성은 때론 우정으로, 때론 사랑으로 서로를 이끈다.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이 돋보이는 작품을 각각 두 편씩 소개한다.


◈ 델마와 루이스
[델마와 루이스]는 25년 된 영화이지만 여성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다. 가정주부인 델마와 웨이트리스인 루이스가 변해가는 여정을 담았다. 그녀들의 자유를 온갖 장애물들이 가로막는다. 가부장적인 델마의 남편, 델마를 강간하려던 남자, 그녀들의 돈을 갖고 달아난 남자, 희롱적인 언행을 일삼던 트럭 운전사까지. 그러나 그녀들은 당차게 장애물을 해치운다. 델마를 강간하려던 남자를 쏴 죽이면서 여행은 도주로 바뀌지만 그녀들은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그랜드 캐니언의 벼랑에서도 앞으로 달리는 그녀들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당시 여성 관객들의 많은 공감을 산 영화는 오는 3월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브래드 피트의 반가운 얼굴도 확인하길 바란다.

◈ 겨울왕국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화지만 곱씹어 볼 것이 많다. [겨울왕국]은 디즈니 '공주 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깼다. 공주의 연애가 주된 내용이고 극 중 수동적인 위치의 공주를 보여주던 전형적인 영화와 달랐다. 엘사의 결혼은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으며 안나도 직접 엘사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엘사는 자신을 속박하던 것들로부터 'Let it go'를 외치고 안나는 자신의 조력자와 사랑에 빠진다. 세상을 구한 것은 멋진 왕자가 아닌 엘사와 안나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겨울왕국] 후의 이야기를 다룬 [겨울왕국 열기]에서 두 자매의 우애는 더욱 두드러진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겨울왕국] 열풍이 분만큼 새로운 공주상, 여성상이 자리 잡을 것이다.

◈ 아가씨
[아가씨]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춰 작년에 큰 성공을 거뒀다. 한국의 상업영화 시장에도 [여고괴담]처럼 동성애적 코드를 가미한 작품은 있다. 그러나 [아가씨]만큼 여성간의 사랑을 과감히 보여주는 영화는 드물다. 속고 속이는 관계였던 숙희와 히데코는 종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고 같이 떠난다. 반면 그녀들을 자신의 욕망에 맞춰 이용했던 백작과 코우즈키의 최후는 비참하다. 제목에 관한 일화도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 각본에서 현대 남성들에 의해 오염된 '아가씨'라는 명사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아주고자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영화의 영어 제목에도 의도가 있다. <아가씨>의 영어 제목은 하녀를 뜻하는 단어인 'Handmaiden'이다. 감독은 제목을 각각 아가씨와 하녀로 지으면서 두 주인공을 대등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 연애담
[아가씨]가 화려한 미장센을 자랑한다면 [연애담]은 보다 수수하게 두 여성의 사랑을 관망한다. 일제강점기 배경의 [아가씨]나 1950년대 배경의 [캐롤]과 달리 현대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이 이보다 정직할 수 없다. 영화는 두 사람의 지극히도 평범한 연애 과정을 세심하게 그린다. 윤주와 지수의 '보통의 연애'에 많은 관객이 공감했다. 영화는 개봉 후 홍역을 겪었다. 상영 직전에 대량의 좌석이 돌연 취소된 것. 악의를 품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행동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영화는 두터운 팬덤을 형성했다. 트위터로 입소문이 나더니 DC인사이드에 연애담 갤러리까지 생겼다. 스크린을 확보하기도 힘든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인기다. 퀴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수요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 퀴어 한국영화가 극장가를 채워주기를. [연애담]의 성공이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오롯이 한 인물만의 이야기로 두 시간이 꽉 차는 영화가 있다. 한 명의 여성이 영화의 중심에 서는 작품을 소개한다. 최근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많다. <조이>, <플로렌스>, <덕혜옹주>, <재키>를 비롯한 다수의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실존 인물을 다루는 영화는 그 삶을 재현한다는 의의가 있지만 자칫하면 관객과 동떨어진 영웅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음은 관객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고 몰입시킨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들이다.


◈ 다가오는 것들
[다가오는 것들]은 작년 베니스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중년 여성을 비롯해 다른 관객들에게도 삶을 돌아보게 한 수작이다. 영화는 중년 여성 나탈리의 일상을 보여준다. 나탈리는 여러 위기에 직면한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돌연 고백하고 불안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끝내 세상을 떠난다. 철학 교사로서, 책을 출판한 저자로서의 사회적 지위도 흔들린다. '멀어지는 것들'만 있는 것 같은 상황 속에 흔들리지만 종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애들은 독립했고 남편도 엄마도 떠났지.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이건 낙원이잖아." 나탈리는 수업에서 철학자 알랭의 [행복론]을 읽는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앞으로도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나탈리는 기꺼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주할 것이다.

◈ 죽여주는 여자

노년의 여성을 다룬 영화도 있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 남성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소영은 종로 일대에서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옛날 자신의 고객들은 이제 병원에 누워있거나 치매에 걸려 온전치 못하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처지에 노인으로서 공감한 소영은 자신을 죽여 달라는 남성들의 요구에 응한다. 그러나 살인을 부탁받은 소영의 곤란함이나 죄책감에 공감하고 소영을 걱정하는 인물은 없다. 영화는 계속 소영에게 가혹하다. 가족이 없는 소영에게는 가족같이 힘이 되어주는 이웃들이 있다. 트렌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아이. 소영은 이 세 사람 앞에서 경찰에게 살인 용의자로 끌려가게 된다. 결국 소영은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친다.

지금까지 여성을 다룬 각양각색의 영화들을 소개했다. 대부분 최근 개봉작이다. 예전의 여성 영화를 맛보고 싶다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바그다드 카페], [노스 컨트리]를 추천한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영화들이 제작되어 극장가의 다양성을 지켜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