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받은 약탈자, 사략선

허가받은 약탈자, 사략선

  • 327호
  • 기사입력 2015.07.13
  • 취재 김나현 기자
  • 편집 김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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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세기 대항해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럽 열강들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항해기술이 발전하고 전파되면서 각 나라의 해군뿐만 아니라 민간 상인들도 바다 건너 먼 대륙까지 건너갈 수 있게 돼 식민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유럽의 상인들은 새로운 문물로 귀족층 시장을 꽉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따라서 너도나도 새로운 곳을 찾아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대항해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은 세계사의 주 무대로 자리 잡게 된다. 한편 ‘부를 좇는 자들’이 바다로 나오게 되자 ‘부를 좇는 자를 쫓는 자’들도 덩달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다 위의 도적떼 해적이다. 해적은 다른 대륙에서 본국으로 상품을 수송하는 상선을 나포하여 약탈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상선은 항상 상품이 절반 이상 약탈되고 난 뒤였다. 해적과 국가의 관계는 이렇듯 당연히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해적토벌을 위한 원양해군 파견도 심심치 않게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적대관계를 뒤집는 이해관계가 나타났다. 정부에서 ‘사적으로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략허가증’을 배포하면서 ‘합법적인 해적’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과 해적과의 차이점은 그저 ‘종이 한 장’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과 긴밀한 이해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특수한 노략집단을 ‘사략선’이라고 부른다.

사략선(私掠船 - privateer, corsair)이란 풀이하자면 사적으로 노략하는 것이다. 사적으로 노략하는 것이야 일반 해적과 다를 바가 없지만, 사략선은 ‘포획특허선’, ‘사장나포선’으로 여기서 말하는 사(私)적이란 의미는 국가 공인을 받은 민간해군에 가깝다. 사략선은 첫째, 적국의 상선을 나포 및 약탈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으며 둘째, 휴전 중일 땐 허용되지 않으며 셋째, 자국이 전쟁 중일 때는 해군함대에 편성되어 싸워야했다. 즉 사략선은 국가차원에서는 준군사집단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략선이 활약했을 때는 전쟁 때였기 때문에 사실상 해군과 민간 사략선원의 구분은 모호했다. 해군이 실직하고 사략선원이나 선장으로 활약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사략선의 임무는 주로 적국의 상선을 약탈하는 것이다. 약탈한 노획물은 해사법원의 재판을 거쳐 국가-선장-선원의 몫을 나누어 가졌다. 당시 상선이 나르는 신문물의 상품은 매우 가치 있는 것들로 사실 국가에서는 해적을 토벌하는 것보다 사략선을 만들어 노획물을 세금으로 떼어가는 것이 훨씬 이익이 컸다. 국가는 사략선을 만들기 위해 배에 ‘사략면허증’을 발급하고 그 후 전체 노획물에 대한 권리비, 세금을 1/5을떼어 국가재정에 보급함으로써 이익을 봤고, 선장은 선원보다 더 많은 몫의 노획물을 가져갔으며 선원들은 남은 노획물을 가져가는 것으로 매우 큰 이득을 봤기에 사략선원이 되기 위해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략선은 민간에게 사략허가증을 내주고 노략을 허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히 정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사략허가증을 내줄 때의 조건은 본국과 ‘적국’인 배만을 약탈할 것이며 중립국과 동맹국의 상선은 사략은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하지만 해군이 일일이 사략선의 불법행위를 감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자행되는 사략행위는 적국, 중립국, 동맹국 할 것 없이 자행되었다. 또한 사략선은 국가와 계약한 영업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허가기간이 지난 후 하는 노략행위는 해적으로 간주 해사법정에서 처벌받았다.

‘사략선’이라는 단어가 정립된 것은 17세기 무렵이다. 하지만 사략행위는 17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절(1558~1603) 가장 유명한 선장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다. 1580년대에 시작한 에스파냐-영국 전쟁에서 드레이크 경은 사략선을 몰아 스페인 선박을 격파하는 등 수 많은 공적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 에스파냐는 가장 우위에 서있는 해상무역의 강자였기 때문에 새로 발을 디딘 영국의 입장에서는 에스파냐가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무적함대라고 불렸던 에스파냐의 해군과 맞붙기엔 영국해군이 아직 체계가 불안정했던 상태였다. 정면전쟁은 승산이 희미했기 때문에 영국은 사략선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스페인으로 공급되는 상선을 나포해 공급품을 약탈하는 것이 상당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략선이 활개를 치게 되자 에스파냐 측에서도 상선을 호위하는 해군군단체제 ‘플로타(flota)’를 고안해낸다. 사략선의 전성기를 맞은 16~18세기는 항상 열강들이 해군이 호위하는 상선체제를 고안했지만 작고 빠른 사략선의 표적범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해군의 군사력낭비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호위를 줄이는 등 효과적인 사략선의 대응책이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유형은 다음세기에 프랑스와 미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해군전력을 사략선을 이용해 충당하는 것과 같다. 정부와 사략선 간의 긴밀한 이해관계란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의 주요 국가는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라고 볼 수 있다.

때는 17세기 초반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방에서 얻어온 향신료 등으로 시장개척에 성공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보다 뒤늦게 동방사업에 진출하게 된 영국은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조약들을 내걸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와의 마찰이 잦아지자 세 차례에 걸친 상업전쟁을 벌이게 된다. 1차(1652∼1654), 2차(1665∼1667), 3차(1672∼1674)를 거치면서 네덜란드는 긴 전쟁에 타격을 입고 해상권에서 주도권을 영국에게 뺏기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이득을 본 것은 다름 아닌 프랑스의 사략선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도 전쟁 중이었으며 프랑스는 네덜란드 선박과 영국 선박을 구분하지 않고 약탈을 지시했다. 따라서 프랑스 사략선은 이때 부흥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윽고 1686년 11월 화이트홀조약(Treaty of Whitehall)을 체결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지루한 긴 전쟁의 끝을 보게 된다. 화이트홀조약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영국의 제임스 2세가 사인함으로써 “두 나라 국가가 전쟁 중에 있을지라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국가들은 중립국이며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이 조약은 잠시나마 두 나라에 전쟁이 없는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 사이에도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사략선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화이트홀조약이 일군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에 일어난 두 차례의 큰 전쟁들은 프랑스 사략선이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된다. 1689~1697년에 ‘윌리엄 왕 전쟁’, ‘9년 전쟁’, 또는 ‘대동맹전쟁(War of the Great Alliance)’으로 불리는 전쟁과 1701~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앤 여왕 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그것이다. 본디 사략선이란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전쟁이 잦았던 16~18세기 , 대부분의 열강들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영국 등은 5%의 수입관세를 15%로 올리는 방법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략으로 얻는 적국상선타격과 진귀한 노획물은 마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와 맞먹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각국 의회에서 사략면허증을 대거 발급하고 사략선의 불법행위를 일정부분 눈감아 주는 등의 기만을 하고 넘어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프랑스가 이때시기에 약 435,000 파운드에 이르는 금액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맹전쟁은 루이 14세의 영토 확장정책에 반대하여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이 합세하여 벌인 전쟁으로, 프랑스의 사략선장 ‘장 바르’의 공이 크게 평가됐다. 대동맹전쟁은 1697년 9월 20일 라이스위크조약(Treaty of Ryswick)의 체결로 종결된다. 종전 후 참가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사정을 부흥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전쟁이 끝남으로 인해서 평화가 찾아오자 가장 먼저 직장을 잃은 것은 각 나라의 해군이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해군이 퇴직 후 사략선원 또는 선장으로 들어가 노략을 일삼았다. 아니면 상인의 후원을 받고 해적이 된 사례도 심심찮게 존재했다.

몇 십년후 시작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대동맹전쟁과 비슷한 세력구도를 보여줬다. 간단히 말하자면 쇠약한 에스파냐 왕조에 프랑스가 개입하려들자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때당시에도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해군전력을 사략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이때 활약한 프랑스 영웅의 이름은 ‘뒤게트루앵’이다. 뒤게트루앵과 이전의 장 바르는 둘 다 미천한 신분에서 해군의 사령관까지 오르게 된 사례로 사략선을 이끌었다는 점까지 같다. 이후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Treaty of Utrecht)으로 인해 전쟁이 종결되고 ‘평화의시대’를 맞게 된다. 위트레흐트조약에서 영국은 에스파냐의 식민지 노예 독점권을 가져가고 네덜란드는 목 좋은 항구를 차지하게 되는 등 이익분배가 이루어졌다. 1713년 이후는 ‘평화의 시대’로 불리며 실직한 해군들을 대거 낳게 된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이 조약을 계기로 전쟁 중 발행됐던 ‘사략면허증’이 무효화된 것이다. 사략행위를 문서상으로 금지하게 된 것인데 위트레흐트조약체결 이후 잠시 동안 사략선이 뜸해진다. 하지만 이 공백은 다시 면허장 없는 사략선 즉, 뒤게트루앵 해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제 18세기로 넘어온 바다의 패권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기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영국의 식민지에 불과했던 ‘미국’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미국도 프랑스와 비슷하게 사략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전력을 증강했다. 이 시기의 사략선은 북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가장 활개 쳤기에 ‘북아메리카 사략선 전성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면서 ‘사략선’이 미국함대를 발전시킨 주축발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로 사략선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18세기 초반인 1744~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8년전쟁’ 등으로 불리는 ‘조지왕전쟁(King George’s War)’이 발발했다. 이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건은 바로 1739~1744년에 일어난 ‘젠킨스의 귀전쟁’이다. 로버트 젠킨스는 영국의 상선 선장으로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경비대 사관에 의해 귀를 잘리게 된다. 귀가 잘린 채 영국으로 도망쳐온 젠킨스는 영국의회에 이 같이 상선 선장들이 부당한 처사를 받고 있다며 강력히 호소했고 이에 대해 스페인정부의 배상을 요구했다. 스페인정부는 초기에 배상에 응해주겠노라는 언질을 했지만 올바른 처우를 해주지 않았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영국과 스페인은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조지왕전쟁은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다. 1742년 오스트리아 왕가의 계승을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밀약을 맺어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3파전으로 일어나는 형국이었기에 프랑스는 영국과 그 식민지였던 미국의 사략선에 의해 약탈당하는 일이 잦았다. 스페인과 프랑스 또한 영국과 미국의 상선들에게 사략으로 피해를 주는 등 두 세력 모두 사략면허증을 남용하여 그 수를 급증하게 만든다. 특히 이 전쟁 때는 프랑스가 카리브 해의 소앤틸리스제도, 루이스버그 지방을 사략선들의 요새로 지정해 영국의 선박을 집중적으로 노획하였다.

조지왕전쟁은 결국 영국함대의 우세 끝에 ‘엑스-라-샤펠(Treaty of Aix-La-Chapelle)조약’을 맺고 8년간의 전쟁을 종결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선박의 10분의 1이 사략선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사략선들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영국은 1756~1763년동안 일어난 7년전쟁에서 주요 요새들을 격파시키는 데 성공한다. 1758~1760의 3년 가량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버그, 마르티니크, 도미니크를 점령하여 요새를 불태운다. 이에 프랑스 사략선은 한동안 주춤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제 영국은 이전과 비할 바 없이 강해졌다. 계속해서 이긴 전쟁과 전리품들은 그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한 강력하고 가혹한 세금정책을 피게 되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갔고 마침내 저항을 시작하게 된다. 아직 신생집단에 불과했던 그들은 대륙회의를 거쳐 해군을 마련하지만 17세기 초반의 영국과 같이 힘이 미약하기만 했다. 따라서 그들은 민간집단을 고용해 해군을 보충하는 ‘사략선’을 전술로 적극 이용하기에 이른다.

1775년 미국의 독립을 선언한 직후, 메사추세츠 주의 법원은 미국 최초로 사략을 허용하는 ‘사략면허증’을 발급한 기관이 된다. 이들은 사략선을 이용하여 영국의 모든 선박을 노획할 것을 허가 받는다. 미국의 사략선들은 카리브 해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영국 선박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들은 주로 유럽에 속한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에 대한 지리정보는 단연 미국이 가장 밝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쟁이 오고갔지만 이 사이에서 사략선은 언제나 전쟁의 보조수단처럼 이용돼 왔다. 그것이 보복성에 가까운 사략면허증을 발급하게 한 원인이 됐지만 미국의 독립전쟁은 사략선을 이용함으로써 미국에게 경제력과 해상전력을 급격히 발전시키게 한 추진력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미국의 사략선장은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로 스코틀랜드 출신이기에 영국에게 더 악의에 찬 욕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를 해군의 영웅으로 생각하며 독립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사략선 출신 해군으로 기억된다.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도 1780년대 들어 악화됐다.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독립국가가 된 미국이 프랑스혁명의 중립국으로서 프랑스와의 무역을 원하자 영국은 반발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미국은 제이의 조약(Jay’s Treaty)을 영국과 체결하면서 개선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프랑스와의 관계가 삐걱이기 시작해 1798년부터 시작된 준전쟁(準戰爭 - Quasi War)을 기점으로 미국이 프랑스 사략선 소탕작전을 벌여 승리하기에 이른다. 이후 1800년대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승리하게 되자 모든 중립국들과 유럽국가 간의 무역을 봉쇄시켰다. 중립국인 미국은 이에 항의했지만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영국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이것이 1812년 전쟁이다. 사략선은 여전히 맹렬히 참여해 미국의 해군으로 전쟁에 일임했다. 당시 영국은 상선을 보호할만한 군력이 부족했기에 사략선에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 빈번했다. 따라서 1814년 영국과 미국은 겐트조약(Treaty of Ghent)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시킨다.

사략선은 18세기 중후반까지 서인도제도에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이 시기의 사략선은 북아메리카 중심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옮겨가게 된다. 독립을 원하는 신생 라틴아메리카 정부가 사략면허증을 많이 발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라피트와 같은 전설적인 사략선장을 끝으로 사략선의 시대는 곧 저물어가기 시작하는데, 카리브 해 인근 사략선이 죄 없는 민중을 약탈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잦게 되자 사략선은 폐지해야한다는 여론에 부딪쳤다. 사략선은 이미 그 이전부터 정부의 고삐를 벗어난 망나니 취급을 받으면서 비판에 시달렸지만 이익 공급책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묵인해왔다. 하지만 이제 19세기에 접어들 즈음 세계는 일시적으로 평화가 찾아왔고 사략선의 수요시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침내 1856년 파리선언을 통해 사략행위의 불법을 못박았으며 에스파냐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사략선을 폐지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마침내 국제법상으로 사략행위가 금지된다.


참조 – 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 한잉신, 뤼팡 공저. 김경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