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거품경제의 시초 <br>튤립투기(Tulip Mania)

자본주의 거품경제의 시초
튤립투기(Tulip Mania)

  • 329호
  • 기사입력 2015.08.13
  • 취재 김나현 기자
  • 편집 김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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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은 네덜란드 국화로써, 찬란했던 17세기의 영광을 오롯이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쥐고 흔들 때 부유함의 상징으로 들여온 꽃이 바로 튤립이기 때문이다. 층을 막론하고 사랑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꽃이 한 때는 집 한 채 가격과 맞먹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단순한 애호(愛好)를 넘어선 튤립에 대한 광풍(狂風)이 현대 경제사에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 됐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처음으로 ‘거품(Bubble)’이 일어난 것이다. 근대의 금융시장과 투기, 그리고 네덜란드의 튤립투기사건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게 됐는지 파헤쳐보자.

1600년대는 네덜란드의 전성기였다. 16세기 초만해도 네덜란드는 막강한 유럽해상동맹이던 ‘한자동맹’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역에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운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뛰어난 조선술과 노동임금대비 높은 상품가치를 창출해내는 네덜란드 인력이 뒷받침한 건 물론이거니와 예부터 영국과 유럽본토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에 중개무역이 흥했다. 시간이 흘러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항구도시가 빠르게 발전하자 한자동맹에 가장 위협적인 대립세력으로 성장하게 됐고, 한자동맹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해상패권을 물려받은 것은 네덜란드가 됐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6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1602년 건립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가 원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스페인과 전쟁하면서 스페인 군대의 노략을 견디지 못한 상인, 기술자, 자본가들이 기존 터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됐고, 이 세력들이 후에 암스테르담에 밀집해 국력이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년 전쟁 후반에 들어서 스페인이 쇠약해지는 시기와 맞물려 네덜란드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승전보는 네덜란드의 찬란한 17세기를 여는 포성이었다.

Swearing of the Peace of Münster by Gerard ter Borch
Logo of ‘Dutch East India Company’

네덜란드는 17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금융시장도 갖고 있었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융제도를 금지했다. 부자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돈을 대출해주면서 비싼 값의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무너지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필두로 금융시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정부의 인가를 받은 금융시장은 프랑스에서 나타났으며, 금융 상설시장이 세워진 곳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Antwerp) 시장’이었다. 16세기는 금융시장에서 어음과 채권, 그리고 투기가 빈번히 일어났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안트베르펜 시장은 여러 전쟁의 발발과 이로 인한 기업의 파산으로 인해 쇠락하게 됐고, 마침내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폐쇄된다. 상설시장이 문을 닫은 이래로 갈 곳 없던 자본가와 투기꾼들이 눈을 돌린 것은 바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유럽 본토에서 체득한 금융기법과 발달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이 도시에 자리 잡게 되자, 위에서 말했다시피 네덜란드 국력상승의 효과도 가져왔지만 역시 가장 뚜렷한 결과는 항구도시 암스테르담이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 금융시장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17세기 들어 비약적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와 19년 후 서인도회사(West India Company)를 설립하면서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메릴랜드 주와 무역을 진행할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났다. 이는 유럽 전체 국가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 서인도회사는 가나의 흑인들을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을 주관해 이윤을 올리고 있었다. 많은 무역지와 금융시장의 호황으로 전례 없던 윤택한 삶이 네덜란드를 감쌌다. 소수의 부자에서 후에는 다수의 부자와 경제사정이 좋은 서민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나라의 부가 국민 1인당 소득을 한없이 올려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생계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점점 사치품을 장만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부동산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등 투기가 만연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1610년, 고상한 취미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을 더욱 고급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는 희귀품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때 그들의 눈에 띈 것은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은 본디 오스만제국이 원산지다. 튤립이 처음 네덜란드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엽, 오스만제국에 파견됐던 네덜란드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튤립뿌리를 가져온 이래이다. 튤립농사가 시작된 것은 1573년 부스베크 대사가 명망 있는 식물학자였던 샤를 드 레클루제(Charles de l'Écluse)에게 선물하고, 그가 다시 레이던대학교에 소포를 보내 재배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튤립은 네덜란드 땅에 훌륭한 적합성을 보였는데 당시 원예 산업도 일등 가던 네덜란드가 튤립에 매료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17세기 초반 식물애호가들은 대부분 막대한 자본을 가진 부자들이었다. 아직 서민들은 예쁘게 꾸미는 조경에 관심을 덜한 상태였으며 부유층인 귀족이나 자본가들 사이에서 튤립이 크게 유행했다.

Semper Augustus (황제)
Viceroy (viseroij – 총독)
Admiral Verijck (van der Eijck - 제독)

사람들은 튤립에 위계를 매겼다. 가장 아름답고 값이 비쌀수록 ‘황제’, ‘총독’ 또는 ‘제독’, ‘장군’ 순으로 이름이 새겨졌다. 그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람들이 매료됐던 튤립은 Semper Augustus라는 꽃으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암스테르담 집 한 채 값이었던 1200플로린(화폐 단위)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 황제튤립은 보라색 꽃잎에 흰색 줄무늬가 들어간 것이 특징으로 사실 ‘튤립 브레이크 바이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무늬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병에 걸린 튤립은 무늬는 아름답지만 일반 튤립보다 번식이 느렸던 탓에 공급이 더뎠으며 이는 튤립의 희소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한 튤립을 재배하고자 할 때 단순히 뿌리의 겉모양으로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안됐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이는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울 때까지 황제튤립이 될지 일반튤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손에 쥔 뿌리 하나에 집 한 채 값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1620~30년, 서서히 달아오르는 튤립시장은 점점 투기의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초반까지 식물애호가들에 의해 순수히 관상용(또는 과시용)으로 소비할 튤립을 거래했던 1610년대와 달리 투기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튤립 하나에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매입가와 매도가의 차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시가지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1634년부터 느껴졌던 과열현상은 황제튤립의 값이 3배 가까이 오른 6000플로린에 거래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점점 시장에는 관상목적으로 사는 부유층이 줄고 거대한 차익으로 한탕을 노리는 서민투기꾼들만이 남아 무한정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이런 튤립시장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튤립은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에 단시간에 얻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내가 원하는 상품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뿌리가 싹을 틔우지 않는 겨울에는 거래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년 봄, 즉 미래에 틔울 튤립을 지금 사놓아 약속한 때가 되면 시가와 거래가의 차이로 돈을 받는 거래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금융거래 중 하나인 ‘선물거래(先物去來)’의 개념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다. 튤립을 재배하겠다는 계약서를 쓰는 것만으로도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런 선물거래(당시에는 ‘바람거래(windhandel)’라고 불렸다)가 1635년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자 튤립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투기가 절정을 맞이할 때쯤 또 다른 금융상품이 도출되었다. ‘미래에 내가 튤립을 사고 팔수 있는 권리’를 거래하는 ‘옵션거래(Option去來)’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이제는 미래의 ‘튤립’을 사고파는 것이 아닌 ‘튤립을 살 수 있는 권리’와 ‘튤립을 팔 권리’를 사고파는 것이다. 후자는 예를 들어 ‘튤립을 현재 시가에 살 수 있는 옵션’을 샀다면 상품가격이 오를 경우 당시에 샀던 옛날 가격에 싸게 살 수 있으며 파는 경우는 이와 반대의 원리이다. 네덜란드 튤립시장에는 소리만 요란한 바람거래만 존재했다.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튤립을 놓고 거래를 성사시켜나갔다. 그저 계약서에 이름들이 수없이 바뀌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1636년 겨울, 튤립거품이 정점을 찍고 있었다.

1637년 2월 3일 봄이 되자, 튤립가격에 무한정 끼어있던 거품이 붕괴되었다. 아무도 튤립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온갖 횡행했던 약속어음과 옵션거래들이 이때 몰려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현물을 실제로 사고 팔지 않았다. 모든 튤립매매가 동결됐다. 도매상인들은 줄줄이 파산했다.

Jan Brueghel the Younger's Satire of tulip mania c. 1640

튤립투기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자본주의 질서 아래 가격 거품이 한순간에 무너진 사건은 이 사건이 역사상 처음이다. 묘사하자면 수익을 바란 선물(先物)단타매매에 가격이 폭등하고 막상 현물을 인도하는 계절이 오니 붕괴가 일어난 것이다. 서민층들이 가장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 1636년 당시 한탕을 노리고 온갖 패물과 집을 저당 잡히고 대출을 받은 후 샀던 것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기 때문이다. 붕괴된 지 1년 뒤인1638년까지 파산 하는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네덜란드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조치를 취한다. 채권 채무 매매가격의 3.5%만 지급하라는 법령이 내려졌다.



Flora's Malle-wagen van Hendrik Pot 1640

그 후 네덜란드의 풍경은 튤립에 대한 혐오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이 부분은 당시 그려졌던 우화들과 문학작품에 나타나있다. 얀 브루헬 2세의 작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 아닌 원숭이들이다. 튤립의 광풍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간들을 풍자하고자 함이 보이는가? 왼쪽과 오른쪽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디테일한 모습을 살펴보면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풍자요소가 보인다. 또한 꽃의 여신 플로라가 남자들을 현혹하여 사치와 향락의 길로 인도하는 모습을 그린 풍자그림도 재미있다. 당시 튤립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감이 오는 대목이다. 문학작품으로는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검은 튤립(The Black Tulip)’에서 당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튤립투기 사건은 자본주의 거품경제의 시초가 된 사건이다. 투기로 인해 순식간에 거품이 빠져 파산에 이르게 하는 사건은 훗날 ‘미시시피버블’등 여러 번 다시 일어난다. 하지만 튤립투기사건을 그저 ‘버블경제의 원조’보다 현대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선물거래(先物去來)’‘옵션거래(Option去來)’의 개념이 처음 도출됐다는 사실이 더 흥미로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