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악이다

  • 454호
  • 기사입력 2020.10.28
  • 취재 최지원 기자
  • 편집 김민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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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며 관리였을 뿐이다.


 이 두 문장은 얼핏 보면 자신의 직업을 정의하는, 같은 의미를 가진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두 문장을 전혀 다르게 기록한다.


©나무위키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현역 군인 시절 사진)

 페트로프는 1983년 9월 26일 당시, 소련 방공군 중령이었다. 그가 소련 관제센터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있을 때 관제센터 레이더 망에 미국 핵미사일 다섯 기가 감지되었다는 경보음이 울렸다. 그가 해야 했던 일은 상부에 보고해 미국에 맞서 핵 공격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그가 주어진 일을 주어진 대로 수행하여, 소련이 보복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문가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무기의 종류 중 하나인 원자폭탄 오직 한 개만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핵미사일은 원자폭탄의 약 20배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경보시스템의 오작동이라고 보고했다. 미국이 정말 핵전쟁을 일으키고 싶었다면 다섯 기만 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핵미사일 다섯 기로 감지된 것은 위성이 빛 반사 현상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소련은 국가 안보 시스템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감추려고 페트로프를 쫓아냈고 그는 궁핍한 삶을 살다가 15년이 지난 1998년에야 이 사건이 공개되면서 마땅히 받아야 했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998년 유엔 세계시민상, 2006년 세계시민협회 세계시민상, 2013년 드레스덴 상을 받았고 한 인터뷰에서 "그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고 말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무위키(카를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 시절)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 친위대의 장교로 유대인들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 수송의 최종 책임자였다. 그는 500만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자신이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생각해냈기 때문에 맡은 일을 잘해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다가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었고 1961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루살렘 공개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며 관리였을 뿐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의지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되게 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국가의 법에 맞추어 히틀러의 원칙에 입각해 행동하라.’로 왜곡해서 이해하고, 그렇게 주장했다.

 여덟 달이 걸린 긴 재판을 모두 지켜본 독일 태생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직역하면 ‘악의 진부함’)’이라는 단어로 그를 설명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사람들이 악조차도 일상처럼 성실하게 반복함으로써 윤리관이 무디어져 악에 이용당하고, 나아가 악을 돕는 관성의 폐해를 지적한 말이다. (출처: 최진기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66쪽, 스마트북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한 아이히만에게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것, 특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고 했다.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행동할 수 없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이처럼 악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한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의 신상이 공개된 뒤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생겼다는 사실이다.


 (1961년 재판을 받은 후 사형당한 아이히만)


(2013년 드레스덴상을 받은 페트로프)


 이들이 했던 말을 다시 보면, 둘 다 자신이 맡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차이는 ‘사유’에 있다.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은 채 명령에만 따라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고 결국 사형당했다. 페트로프 소령은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압박감에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을 내려 인류를 핵전쟁에서 구해냈다.


 컴퓨터 같은 기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비판의식과 생각 없이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대체 가능하다.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자신만의 색깔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글의 대표 이미지는 찰리 채플린 감독이 만든 영화 ‘모던타임즈(Modern Times)’의 명장면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 취급을 당하는 ‘인간소외’ 현상을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정치의 부속품으로서 일을 했고 페트로프는 부속품이 되길 거부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비판하기. 어쩌면 가장 어렵고 피곤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또다른 부속품으로 전락해 대체 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참고자료>

JTBC, 차이나는 클라스 177회- 냉전, 어디까지 알고 있니?

지식채널e, 그가 유죄인 이유

중앙일보, 냉전 시기 핵 전쟁 막아낸 영웅 페트로프, 77세로 사망

네이버 블로그: 히스토리의 역사산책, 악마를 보았다! 유대인 학살의 1인자, ‘나치의 아이히만’

최진기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대표 이미지 출처: 찰리 채플린 감독, 영화 ‘모던타임즈(Modern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