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하여
– 개인과 공동체의 맞물림

  • 462호
  • 기사입력 2021.02.24
  • 취재 최승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 조회수 4281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틀린 말일 공산이 크다. 개인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 안에서 존재한다. 다만 그 공동체와 자신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자신이 어느 정도로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는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타인과의 연대를 확대해 나가기도 하고, 공동체와의 긴밀함을 끊어내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개인과 공동체는 어떤 형태로든 맞물리게 되어 있다. 개인의 개체성을 중시했던 자유주의와 공동체를 중시했던 공동체주의와의 대립과 조화도 이와 관련돼 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고, 이 이론들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 자유주의, 그리고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는 개인주의는 17-18세기 근대 유럽 사회 전반에 퍼졌다. 자유주의적개인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데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근대적 개인을 기반으로 한다. 또한 타자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체 중심적 개인을 설정한다. 계층에 따라 위계적이었던 전통적 공동체로부터 해방된 개인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게 된다. 국가는 물론이고 다양한 종류의 공동체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이 구성한 가공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개인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면서 이해타산적인 존재라면 협상과 합의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공동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아니다. 시장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합리적 이해타산 방식이 작동되기에 개인의 사적 소유권을 제어하기 어렵다. 동시에 자기중심적 이해타산을 중시하는 근대적 개인은 협력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에 협력적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타산적 합리성을 시장에서의 상행위로 제한하고 시장 이외의 영역에서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면 개인들 스스로가 사적 소유권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나아가 상호 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반이 필요하다. 공동체적 연대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공동체주의다. 공동체주의는 시장 자유주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퍼지는 것을 경계하며 다양한 공동체에서 형성된 가치들도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나 문화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개인이 사회화 과정 속에서 형성한 판단 기준들은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적 가치에 일차적으로 의존한다. 공동체적 가치가 우선순위를 갖는다는 것인데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그가 속한 공동체에 참여해 그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내용을 수용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길러진다고 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공동체에 동참하기에 개인의 정체성도 자율적으로 결정해 나간다고 보기엔 어렵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벗어나기에는 매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특정한 공동체에 참여하여 구성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정체성이 그 자신에 의해 교정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한 개선 가능성을 인정한다.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따라 새롭게 제도와 규칙을 만들어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형성되어 온 역사를 중시한다. 역사적으로 전승된 기존의 전통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는 근대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의 역사적 허구성을 비판하지만, 반대로 근대적 개인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공동체주의를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적인 사상으로 간주한다. 자유로운 이동과 교환이 보장된 근대적 개인에게는 자유를 억압하고 기존의 위계성에 개인을 묶어 두려는 공동체적 전통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자유주의의 ‘독립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규범적 전제는 새로운 비판에 직면한다.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가 계약의 기초단위로서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체 중심적 개인을 상정하고 이를 기초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원자론적 개체 중심적 자유주의가 개인이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길러지며 이 공동체에서 이미 인정되고 있는 제도나 가치들을 자신의 정체성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구체적인 공동체 내에서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적 내용을 실체적으로 습득한 것이므로 그 실체적 모습을 이론 형성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개인은 가족, 민족, 국가 등 다양한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존재로 성장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등의 개념도 사회적 맥락에 따라 내용이 형성되는 것은 맞지만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개인에 대한 맥락적 설명에 더해 개인의 자유로운 성찰 능력을 강조했고 이러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자유주의는 앞의 비판에 대해 공동체주의가 실체에 집중하다 놓친 규범적 기준의 결핍을 반론한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서 규정된 개인이라는 맥락적 해석을 벗어나 보편주의로 이행할 방안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개인으로 성장하면서 갖게 된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에 매몰된다면 그것이 갖는 특수성과 맥락 주의적 해석에 갇혀 그것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보다 보편적인 논점으로 이행하기가 어려워진다. 보편주의로 이행할 수 있으려면 개인 정체성의 형성과 그것의 정당화의 문제를 구분하고 최소한 기존의 특수한 실체적 내용들에 더해 보다 확장된 공동체 내에서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비판적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공동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 발생에 대한 해석과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층위를 달리한다.


◎ 진정한 공동체를 찾아서 –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1) 한국 사회의 가족

90년대부터의 도시형 핵가족 형태에서 나타난 남성 가장 중심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가족주의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자아실현과 행복을 추구하게 됐기에 가족주의도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물질 중심 가족주의에서 이차적이면서 비물질적인 수평적 네트워크형 가치 중심의 가족주의로 변화했다. 가족주의가 변화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 성원들이 점차 개인화되기는 하지만 개인주의적 삶보다 가족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이념인 사회는 아니다. 그렇다고 강한 폐쇄적 집단주의가 강력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처럼 하나의 이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조화를 찾아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주의의 틀 안에서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위계적이고 폐쇄적인 가족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밀성을 기반으로 한 가족주의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울산대학교 철학과 권용혁 교수는 한국의 가족이 그 공동체성을 변화된 상황에 맞춰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구성원들이 개인주의화와 개인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복합적으로 전개되어 온 한국의 가족주의를 경험한 구성원들의 개인화는 수평적 네트워크형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족 지향적 개인화’의 형태를 띨 가능성이 높다. 개인화와 가족 지향이 공존하는 것이다.


2) 가족에서 국가 전체로

개인화를 개체 중심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따뜻한 공동체적 친밀성과 연계할 수 있을까? 이는 현재 진행 중인 개인화와 수평적으로 변화 중인 가족주의를 엮으면 가능할 수 있다. 한국 가족 구성원들은 친밀성을 위계적이면서 배타적으로 구성해 왔다. 가족의 친밀성은 소규모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강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지만, 사회적 연대성은 친밀성이 없는 개인들과 맺는 냉정하고 약한 유대관계로 이해됐다. 만약 친밀성이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네트워크형 공동체 내에서도 수평적 관계를 맺는 데 효율적으로 작동된다면 그것은 사회적 연대성과 상호 보완적으로 연계될 수 있게 된다. 열린 공동체주의적 연대성을 중심으로 기존의 가족 친밀성과 자유주의적 연대성을 구성한다면 친밀성은 열린 네트워크형 연대성을 기반으로 한 친밀성으로, 연대성은 공동체 지향적 친밀성을 기초로 한 연대성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정서적 친밀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독립성, 개성과 자아실현이 보장되고 배려되는 따뜻한 공동체적인 모습을 띨 수 있다. 정서적 친밀성이 작동되는 수평적 네트워크형 민주주의는 과거의 금 모으기, 태안 기름 유출 등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참여들은 이해타산에 입각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합리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감 능력에 따라서 작동된 것이며 이는 가족 내에서 길러진 정서적 친밀성과 연계된 것으로 생각한다.


3) ‘친밀함’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

전통적 공동체는 ‘자족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자족성이란 생산, 고용, 소비 등 경제적 측면의 자족성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자족성을 포함한 총체적 의미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족 공동체에서 개인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곧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개인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다. 그에 반해, 현대 사회는 익명적 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이며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 사회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들의 여러 가지 기능적 역할을 맡으며 사회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들을 대부분의 개인들은 공동의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학교, 회사, 나라들에 자신이 속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때 그것들을 ‘공동체’라 부르고 느끼곤 하지만 이 느낌은 ‘현실적 공동체’가 아니라 ‘상상된 공동체’일뿐이다. 만약 사회 전체를 공동체 사회로 만들겠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개인의 필요와는 무관한 공동체의 의무를 강요할 가능성이 커지기에 다른 공동체의 방향을 찾아봐야 한다.


현대적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혹은 개인의 필요에 따른 연합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공적 논의와 자치가 개인들의 절실한 필요이며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필수적일까?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상 많은 필요를 기능 체계들의 공식 조직들을 통해 충족할 수 있다. 국가와 지방 정부의 행정 서비스, 기업들의 고용, 상점들의 판매, 학교들의 교육은 불만족할 수는 있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불만족으로 인해 공식 조직들의 영역에서도 탈 인격적인 운영 원리에 맞서 더욱 공동체 지향적인 대안 조직들(협동조합, 대안학교 등)이 결성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이 형식만 갖춘다고 해서 강한 공동체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협동조합, 그리고 대안학교에서는 사랑과 우정으로 표현될 수 있는 ‘친밀관계들’이 형성되어야만 비로소 그 구성원들은 강한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된다. 정성훈 박사는 이러한 친밀관계를 기초로 한 도시마을의 네크워크를 ‘친밀 공동체’로 규정했다. ‘친밀성’이 합리주의가 강조되는 기능 체계들의 공식 조직 영역에서는 충족되지 못하는 개인의 절실한 필요라고 본 것이다.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논의의 기본적인 형성 동력은 감성적이다. 공식 조직들의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감성적 유대이다. 친밀 공동체는 이 유대를 형성 동력으로 삼는다.


4) 실재하는 의사소통 공동체와 이상적인 의사소통 공동체의 만남

이제는 세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특정 공동체 내에서의 문제로 국한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지구 공동체 문제로 생각해야만 한다. 점점 더 세계화되고 있는 자본과 노동, 정보와 환경 관련 문제들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 사회는 보다 밀접한 네트워크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 덕에 모두의 의사와 상관없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인류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이 구성원들의 공동 책임 문제를 정당화하며 공동책임 하에 구속력 있는 새로운 제도나 규범들을 고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실체성과 규범성을 둘 다 만족하는 의사소통 공동체는 실재하는 의사소통 공동체와 이상적인 의사소통 공동체의 이중적 구조로 생각될 수 있다. 전자는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그 구성원으로 되는 공동체이며, 후자는 이념적 틀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 인류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공동체다. 이는 서구권의 공동체주의가 가지는 실체 중심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편화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논리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가 형성되면 현실 공동체의 전통과 가치가 갖는 특수성과 폐쇄성을 보편화 가능한 규범에 따라 수정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가 특수성을 벗고 열린 공동체 이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5) 공감의 공동체에서 열린 공동체주의로

인간의 뇌에는 남이 하는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이 실제로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되는 시뮬레이션 세포인 거울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이 신경세포는 동정심, 공감, 감정이입 등의 공감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거울 신경세포 체계를 본능적으로 작동하며 서로 간 공감의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이 장치의 작동과 함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론해 공감하는 인지적 공감도 작동하는데 이 둘이 함께 작동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모방하며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기능이 작동하면서 인간은 직접 접촉하지 않는 타인들과도 함께 공동체 삶을 유지하며 상호 협력한다. 또한 타인과의 더욱 성찰적인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 본능적 공감의 주관성과 인지적 추론의 잘못된 편향을 수정하며 공감의 폭을 넓혀가게 된다. 결국에는 인류가 역사 문화적으로 구성해 온 화폐, 시장, 국가, 자유 등의 상호 주관적인 실재들이 의사소통적인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기존의 감성 공동체나 역사 문화 공동체의 개념들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하여 누구나 정서적, 문화적, 이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해야만 인류는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공감의 공동체는 일단 오감을 통해 형성된 자료를 바탕으로 상호 교감하면서 축적된 친밀성을 바탕을 통해 형성된다. 그렇기에 기억의 공유나 상호 교감이 없는 타자들과의 친밀성이나 공감의 공동체 형성은 무척 어렵다. 친밀성에 바탕을 둔 협력적 ‘우리’를 결속한다는 것은 우리와 무관한 ‘타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부인으로 배척하는 배타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제한되었던 감성의 공유나 상호 교감의 경계가 세계적인 차원의 네트워크 확장으로 점차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변화는 공감이나 친밀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감성 공동체도 타자나 외부와의 소통과 내용의 공유를 통해 스스로 그 폐쇄성을 변경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은 공감이나 친밀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감성 공동체도 타자나 외부와의 소통과 내용의 공유를 통해 스스로 그 폐쇄성을 변경할 가능성을, 즉 타자를 우리로 수용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용혁 교수는 이것도 일종의 열린 공동체의 모습이 작동되는 사례로 간주했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신경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언어적 의사소통이 개입함으로써 특정한 공동체의 역사, 문화, 가치 등이 형성되고 소통되면서 그 공동체의 내용으로 자리 잡는다. 실재하는 의사소통 공동체에서 자라고 협력하는 성원들은 그 공동체가 역사 문화적으로 형성해 온 유산을 기초로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의사소통 공동체도 ‘우리’라는 공동체를 씨족, 부족, 국가, 국제연합, 세계인 공동체 등으로 변경시켰다. 이 변화 과정도 공동체적 경계를 유동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공동체가 타자나 외부에 대해 개방적인 구조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열린 공동체주의’는 그 구성원들을 자유롭고 동등한 자격을 지닌 열린 네트워크의 하나의 매듭으로 설정하여 이 구성원들의 소통을 상호 보장하고 그 외부에 대해서도 개방적이게 구상할 수 있다. 열린 공동체주의는 다양한 실체적 관계 구성에 매몰되어 있는 관계 중심의 공동체주의의 경계를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수평적인 네트워크형 소통을 보장하기에 구성원들이 특수한 공동체 내에서 획득한 다원적 실체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실체성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성찰적으로 그것을 확장할 수 있는 논리적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타자’가 열린 네트워크에서 함께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틀을 짜고 공존할 수 방법을 구성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 마치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체 중심적 개인주의만이 팽배하는 사회와 폐쇄적 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모두 건강한 사회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자는 이해타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만이 존재하여 공동체를 통한 연대와 협동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며, 후자는 자기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타인을 배척하고 개인의 발전을 억압하여 개인의 가치를 무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발전과 자유, 권리를 존중하며 상호 협력할 수 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2번 항목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방향을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 놓았지만 우리 개인이 실제로 그러한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는 울타리를 틀, 혹은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사람의 생각은 프레임에 따라 쉽게 좌우된다. 다소 복잡한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들 생각보다 단순한 형태나 프레임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갈 사회를 ‘개인의 발전을 존중하는 상호 협력 공동체’라는 프레임으로 형성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회화 과정에서 배우는 가치들이 개인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듯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돕고 존중해야 아름다워진다고 말하면 어떨까?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글에서 다룬 공동체의 가치들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참고 자료>

권용혁, 「개인과 공동체」, 『사회와 철학』 제23호, 서울: 사회와철학연구회, 2012. 04.

권용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재구성 시도」, 『사회와 철학』 제28호, 서울: 사회와철학연구회, 2014. 10.

권용혁, 「공동체의 미래」, 『사회와 철학』 제37호, 서울: 사회와철학연구회, 201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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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경제의 속살 1 (경제학 편)』, 서울: 민중의소리, 2018, 87~94쪽 참조.

정성훈, 「공동체주의 공동체의 한계와 현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인 공동체」, 『도시인문학연구』 제8권 제2호, 서울: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201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