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돌아보기]
잊혀진 이름, 식민지기 여성들에 대하여 2. 정종명

  • 476호
  • 기사입력 2021.09.23
  • 취재 최승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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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과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대치는 반공 이념을 형성했고 이 잔혹한 이념은 철저하게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를 조각냈다. 북한과 관련된 인물 또는 집단, 심지어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식민지기 민족해방운동을 우리 역사에서 추방시킨 것이다. 반공으로 재단된 민족 해방투쟁사에서 우리는 잘려 나간 역사에도 눈길을 보내야 한다. 이번에 조명할 정종명은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여성 지도자였다. 간호사이자 산파(현대의 조산사)였고 여자고학생 상조회, 정우회, 근우회, 신간회 등 쟁쟁한 사회단체를 설립하고 이끌어갔을 뿐 아니라 유명한 대중 연설가로 전국적으로 여성문제에 관한 대중강연을 펼쳤다. 이번에는 그의 삶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1. 자활의 길 – 봉건적 여성에서 벗어나기

정종명은 1896년 8월 5일 서울 남산정 장충단 부근에서 태어났다. 실제로는 1894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정종명은 성장기 언제인가 두창을 앓아서 그 후유증인 곰보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의 외모 묘사에는 항상 곰보자국이 있었고 여러 별명 중 하나가 ‘정곰보’였다.


11세 때 어렵게 배화학당에 입학해 4년간 배화학당을 다니며 당시 조선 여성으로는 드물게 서양식 근대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러시아로 떠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학업을 중단했다. 정종명은 훗날 자신의 성장기를 “빈궁과 고독과 학대로 다진 인생의 최하층에서 나는 태어나서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모조리 보내었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17세 되던 해 대한의원 통역관으로 일하는 박 씨와 결혼했지만 부모들의 결정에만 쫓아서 한 결혼이었기에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다. “당자의 의사와 개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절망적인 결혼마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에서 벗어나 인형 노릇을 한 지 3년 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 박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정종명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해에 낳은 아들 박홍제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2.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사회 운동가로 나아가다 – 간호부이자 산파였던 정종명

1917년 정종명은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학생으로서 병리와 간호 방법을 배우면서도 간호사와 같이 환자들을 돌봐야 했다. 간호인력난이 심각해서 그랬는데 정종명은 당시의 힘든 생활에 신세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고 고된 업무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자 대우 개선 문제를 들고 학생 20명을 선동해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종명이 일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은 운동을 준비하는 주요 근거지였다. 정종명도 그래서인지 3.1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는데 실제로 그는 3.1운동 주모자들을 도운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다. 당시 정종명은 환자로 위장한 독립운동가들(강기덕 등)을 보호하면서 주요 서류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종명은 경찰 심문 정도로 그쳤지만 어머니 박정선은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대동강 사건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정종명은 1920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양성소를 졸업하고 관수동에 있던 김용채 내과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해서 번 돈으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조산부 양성소를 다니며 조산부 면허를 취득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경성 안국동에 독자적인 조산원을 개업했다. 산파는 여성의 출산을 돕는다는 면에서나 개인 생활에 비교적 여유가 있다는 점에서나 상당히 각광받는 직업이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사회활동에 반영하여 근우회를 이끌면서 농촌 탁아소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3. 여성의 해방, 그리고 민족의 해방 – 정종명이 속한 단체와 10년간의 강연 활동

정종명이 여유가 생기고 난 후 처음 발을 벗고 나선 곳은 ‘여자고학생상조회’였다. 1920년 경성 지역 남자 고학생들이 상부상조적 조직인 ‘고학생 갈돕회’를 설립해 운영하다 1922년 여자부를 두었는데 이를 정종명이 주도하여 20여 명의 신진 여자들을 모아 발전시킨 것이다. 1922년 4월 1일 창립한 이 여자고학생상조회는 ‘빈곤과 고독에 우는 여자고학생을 상부상조하자’는 취지 아래 돈을 모으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회를 진행했다.


‘활동가 정종명’의 모태가 되어준 간호사 직군을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조선에 간호사를 위한 조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실상 서양인 간호사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당시까지 진정으로 조선인 간호사들을 위한 조직은 없었다. 정종명은 뜻있는 간호사들을 모아 1924년 1월 26일 진정으로 조선인 간호사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아가 조선 사회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간호 조직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조선간호부협회’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조건 속에서 정종명에게는 ‘병자의 생명을 쥐고 있는 간호사’ 문제보다 ‘사회적 병인’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여성의 해방을 위해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에 나섰다. 동우회는 여성문제의 해결을 사회변혁과 관련시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할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 최초의 여성 단체였다. 정종명은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서 여자고학생상조회와 마찬가지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 계몽사업의 일종인 강연을 했다.


전체 사회운동 내에서의 위상도 날로 높아져 1927년 분열된 국내외의 운동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간회에서는 중앙상무위원을 맡았으며 이어 신간회와 궤를 같이하며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여성운동 조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근우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까지 올랐다.


정종명은 여러 지방 순회강연을 통해 성공적인 대중 연설가로 인정받아 이후 여타 강연회에서도 주요 연사로 등장했다. 1923년의 강연 주제는 주로 여성 문제를 고발하고 교육(성교육 등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24년 들어 정종명의 강연은 보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색채를 분명히 띠었다. 강연 제목도 여성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던 이전과 달리 “현대사회와 무산여성”, “현대 경제조직과 여성해방” 등 유물론과 계급투쟁이 투영되었다. 이런 정종명의 강연은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고 제재를 받기도 했다. 연달은 강연 주의와 중지로 정종명은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지만 자신의 주의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강연을 계속했다.


사람을 좋아했던 정종명은 다른 운동가들의 일상을 돕고, 옥바라지를 하고, 병상을 지키고, 그리고 애통한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한결같이 헌신했다. ‘방울 당나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항상 동동걸음 걷고 활갯짓을 하며 조선 곳곳의 사회운동가들을 보살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정종명은 감옥에 갇혀 화창한 봄날을 즐기지도 못하고 헛헛해했을 사회운동가들의 마음까지 챙겼다. 그야말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4. 정종명의 마지막 활동들 - 기록되지 못한 마지막

1930년 정종명에게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열아홉에 낳아 홀몸으로 키워온 외아들 박홍제가 격문 사건의 주범으로 일경에 체포된 것이었다. 당시 어떤 형태로든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사람은 체포와 수감이라는 상황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외아들의 수감은 어머니 정종명에게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에 들어선 정종명은 “몸을 쉬고 싶다, 절절히 쉬고 싶다”라고 고백할 만큼 많이 지쳐 있었다. 10년 넘게 쉼 없이 달려온 까닭인데, 시대 상황은 그에게 쉼을 허락하지 못했다.


1930년 8월 정종명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이하 ‘당재건위’)에 뛰어들었다. 당재건위는 혁명적 노동조합을 지하에 결성하고 각 공장, 직장, 가두에서 세포를 조직하여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1931년 3월 갑작스레 당재건위는 해제되었고 새롭게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이하 ‘전평준비회’)가 결성됐다. 여기서 정종명은 중앙상무위원으로 노동조합 내에 부인부를 건설하고 그 활동을 지도했다. 하지만 결성 한 달만인 1931년 4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포착한 일제에 발각되었고 조직원 대다수가 검거되었다. 정종명은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3년형을 선고받아 7월 26일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고문이 너무 혹독했기 때문인지 해방까지 10년간 사회운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해방 이후에야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정종명은 1945년 12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에서 잠시 활동하고 이후 북한 지역으로 가서 함남 대표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47년에는 함흥에서 부인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것을 마지막으로 정종명의 모습은 기록에서 사라진다. 1948년에 이미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였으니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사망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5. 마치며 – 기억되지 않기를 원했던 역사,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들

정종명은 두 가지 삶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갔다. 몸을 자유자재로 가지기 위해, 곧 가정의 번잡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절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과 그 자유자재의 몸을 불합리한 현실과 싸우는 큰일에 던지는 것이다. 정종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벗어던지고 여성과 민족을 돌보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 밖에도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농촌과 공장에서, 학교에서, 전장에서 찬란한 투쟁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부끄러울 정도로 빈약하다. 그들의 발자취, 아니 이름이라도 먼저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참고 자료> - 내용

이꽃메, 「일제강점기 산파 정종명의 삶과 대중운동」, 『의사학』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서울: 대한의사학회, 2012. 12.

이방원, 「세브란스 간호사의 독립운동: 1919년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연세의사학』 제22권 제1호, 서울: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2019. 6.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 서울: 철수와영희, 2019.

이애숙, 「정종명의 삶과 투쟁 : 민족과 여성의 해방을 위해 싸운 한 여성투사 이야기」, 『여성』, 서울: 한국여성연구소, 1989. 1.

최규진∙선우상, 「’행동하는 간호사’의 원조, 정종명」, 『의료와사회』 제10호, 서울: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2020. 1.